비정규직, 그 반원의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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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그 반원의 터널
  • 정민나
  • 승인 2013.04.1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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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정민나 / 시인
사진17.JPG
 
자아와 대상 사이의 틈을 어떤 새로운 관계 맺음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미스 김’이라는 최근의 드라마에서 엿볼 수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현상은 부재중에 있는 현존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데리다는 우리가 사물 자체를 잡을 수도 보여 줄 수도 없고 현재가 현존될 수 없을 때 기호라는 우회로를 통해 표상한다고 했다.
 
나는 기간제 교사다. 육아 휴직한 어느 젊은 여교사의 그
림자인 나는 교사명단란 그녀의 이름 옆 ( )속에 갇혀 있
다. ( )인 나는 십년을 일해도 백년을 일해도 근무연한 5
년차까지만 인정받는다. 성과급 지급은 물론 공무원증도 발
급되지 않는다. 전자문서 결재란에도 급여 명세서에도 따라
붙는 기간제라는 말, 교무회의 때에도 ( )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눈도, 귀도,
가슴도 없이, 그저 괄호인
 
- 중략 -
 
                                                - 박수현 < ( ) 괄호 > 부분
 
십년을 일해도 백년을 일해도 이 시의 화자는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로서 정규직 교사 옆에 ( )로 살아가는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존재일 뿐이다. 괄호로 살아가는 이 땅의 무기력한 존재들은 그런 뜻에서 미래의 풍경 속에서도 지연 연기되고 유보되는 존재들이다.
 
위의 시, 표기되지 않은 2연에서 ‘아이들이 달려와 내년에는 몇 학년을 맡을 거냐고 물을 때 시 속의 화자는 ( )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그저 ( )로 웃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괄호로 웃을 수밖에 없는, 이 웃음은 자조적인 웃음일 것이다. 자본주의 조직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노동의 유연성이나 탄력성이라는 명분으로 언제든지 잘려나갈 수 있는 보조적이며 잠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것과 동일화된 화자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예의 드라마에서는 정규직 직원이 비정규직 직원에게 “연봉 삼천 받는 사람과 연봉 천을 수령하는 사람이 우정을 나눌 수 있는가?” 라고 노골적으로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사회적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 아니다. 드라마는‘미스 김’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정규직자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할 수도 있고 자기 임무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홍지문 터널이 빠르게 달려온다
나는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길가 원추리 꽃들이 흩뿌려진다
와이퍼가 닦아내지 못한
빗방울들이 엉기다 주룩 흘러내린다
 
- (중략) -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미, 일의 반응과 우리 정부의 대응책을 말씀해 주시죠. 건조한 목소리의 사내가 열변을 토한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바꾼다
 
- (중략) -
 
렉카와 앰뷸런스가 앵앵거리며 달려오고
후면경으로 순한 짐승처럼 엎드린 차들이 보인다
누군가 또 이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리라
 
- 박수현 <반생이 흘러가다> 부분
 
프로이트는 인간의식이 현존이 아니라 차이에 있다고 간파했다. 이 것은 ( )라는 시간과 공간화에 따른 구별이고 차별이며 간극으로 볼 수도 있는데 홍지문 터널을 이 ( )라는 기호로 바꾸어 놓고 보았을 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존의 표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틈 (한계)에 속하는 존재성의 범주를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이 틈은 회전이 급한 터널이나 추월당하지 않으려고 핸들을 꽉 잡는 화자나 앵앵거리며 달려는 렉카와 앰뷸런스 때문에 미래의 몸 안으로 넘어갈 수 없는 유보된 삶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질서와 균형보다는 불안정, 혼란, 불균형의 삶을 드러내고 누가 이 반원의 타널을 지연시키는가?
 
정수리에 까맣게 어둠이 박히네
 
몇 개의 행성을 광속으로 내처 달려온
젖은 햇살이
몸 속 어둠을 한꺼번에 말리네
 
출구이자 막장인 그곳은
자꾸 단단해지고
박수현 - <피보나치 법칙으로-해바라기>
 
내 안의 선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것은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서 바닥에 닿기까지의 시간과, 예수가 십자가에 매여 돌아가시기 까지 극렬하게 부딪혀 왔던 무명의 실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악당인 조크가 선의 화신인 베트맨을 끝까지 방해하고 막아서면서 “You Complete Me! 내가 왜 이 세상에 출현했는지 아느냐 네가 있어서 내가 왔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러나 프로이트는 차이 없이는 파열이 없고 차이 없이는 흔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출구이자 막장인 그곳은 그럴수록 단단해지고, 마침내 <몇 개의 행성을 광속으로 내처 달려온 / 젖은 햇살이 / 몸 속 어둠을 한꺼번에 말리>는 마치 良久 수행처럼 막장을 터치하는 순간 컴컴한 세계가 확 밝아지면서 존재자의 껍질이 깨어지고 심청이(화자)는 수정궁(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교사는 대개 그 스스로 타자를 향한 제도와 억압의 상징으로만 그려져 왔는데 앞의 시에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인 시인은 부조리한 존재의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다. 즉, 현재의 시간 속에 괄호로 주어진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가를 삶의 구체적 체험을 통해 형상화 한다. 일상의 경계를 뚫고 나아가려는 자아의 욕구와 그것을 가로 막는 기존의 관습과의 갈등을 시인은 자신의 직분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나타내면서 스스로를 삭제하는 무의미한 존재를 표기한 ( )라는 기호 개념에는 현존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삶의 대칭적 요소가 숨어 있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 세계와의 비적응성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시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응시함으로써 불안과 불균형의 현실을 돌파해 내려는 현실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어떤 한계에 의해 경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조의 입구와 출구가 여전히 게임의 일부분이 되어가는 구조 그물망이 된다는 시적 전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상이한 것으로 대치시키고 전치시킴으로써 근원적인 존재학과 현상학을 뛰어넘는 드라마 ‘미스 김’이라는 캐릭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기도 할 터이다. 좌충우돌하는 드라마가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결핍으로 가득한 지금 이곳과 대비되는 양극단의 혼융을 보여주고 그것은 마치‘상습적으로 정체되는 대상과 지친 자아 사이의 틈에 ‘불현듯 공룡 알이 부화되고 싱싱한 원시림이 자란다.’는 시인의 상상력과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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