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교사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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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교사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하자
  • 이수석
  • 승인 2013.04.2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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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인천교육 미래찾기⑦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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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교사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하자
 
 
이수석(인천교육연구소, 석남중학교)
 
 
요즘 어른들은
 
요즘의 학생들을 일러 ‘모르는 것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신인류’라고 한다. 인터넷과 모바일 유튜브 등을 통해서 요즘 학생들은 자신들이 알고 싶은 것은 그 무엇이든지 찾고 알아낸다. 하지만 그 깊이가 없고 정통성이 없다.
 
이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의 교사들은 참으로 힘들다. 도대체 어느 수준에서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익히도록 해야 하는지. 학습동기 유발과 학습 성취도를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를 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의 교사들은 끊임없이 수업에서 좌절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의 사표를 쓰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의 살의를 느끼고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다.
 
요즘 교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까를 모색하면서 이 책 저책을 섭렵한다. 이 강의 저 강의를 열심히 수강한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수업은 다르다. 똑 같은 수업의 내용을 갖고 반을 들어가도, 어떤 반에서는 성공하고 또 다른 반에서는 참담한 심정으로 좌절을 겪기도 한다.
 
새로운 강의 기법을 배우기 위해 도착한 강의실. 학부모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교수들도 수강생으로 있는 강좌다. 그런데 아뿔싸. 강사의 열강을 방해하면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 누군가 핸드폰 끄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런, 진동으로 해 놓은 어떤 어른은 의자 밑으로 들어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의 작은 통화 소리는 강의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얻는다. 그러나 통화하는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왜 잘못되었는지 조차도 모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오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도 전화벨 소리와 통화는 계속 들린다. 도대체 더불어 사는 에티켓, 매너가 없다. 예의가 없다. 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예의도 안 배웠나 보다.
 
배려의 마음이 없다. 양보의 마음이 없다. 더불어 산다는 공동체의 마음과 의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는 마음뿐이다.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귀에는 그들의 소음이 나의 수면을 방해한다. 난 지금 몹시 힘들고 지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을 잘 수 없다.
 
요즘 아이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그 어디를 가더라도 문자 중독과 게임 중독에 빠진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자신이 하는 게임의 소리를 크게 틀어 놓는 아이도 더러 있다. 그는 게임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한다.
 
게임을 하면서도, 음악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들은 문자로 소통을 한다. SNS로 그들은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이어 산다. 그들에게 주변의 사람들은 투명인간이다. 자신과 소통하고 있는 사람만이 의미가 있다. 옆에서 차를 타고 함께 가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그들에게 핸드폰은 자신과 친구들, 타인을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줄이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하면 핸드폰을 반납한다.
 
수업시간 중에 울리는 전화벨소리와 문자 도착 알림 소리. 그리고 아주 작게 들리는 자판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 이런 소리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들의 핸드폰을 아침이면 수거한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받아간다.
 
요즘 아이들은 멀티미디형의 인간이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자판기를 보지도 않고 문자 통신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억울한 일을 요구하면 항의하고, 못 견디면 동영상이나 사진을 찍어 동료에게 알린다. 그와 연결된 친구는 그 내용을 이곳저곳으로 퍼 나른다. 순식간에 그 학생에게 벌어진 일은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이런 핸드폰의 부정적 측면 때문에 고가의 개인재산을 교사들은 매일 아침이면 수거를 해서 교무실에 보관한다.
 
요즘 아이들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절대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것은 없어도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지금 아이들에게만 문제였을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발견한 2,200여 년 전의 로제타석에는 “요즘 아이들이 걱정이다.”는 말이 나온다. 아주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젊은이들은 문제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요즘 아이들은 정말 문제다.
 
 
 
요즘 우리들은
 
요즘 어른들은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도대체 무얼 배웠을까? 도대체 학교에서 무얼 가르치고 배웠기에, 요즘 아이들이 이럴까를 많은 어른들이 걱정한다. 동감한다. 하지만 또 다른 그 많은(?) 어른들은 어디서 무얼 배웠기에, 그토록 안하무인격으로 전화를 하고, 수강생으로서의, 학생으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일까?
 
조상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글은, 벼슬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나타내는 지방(紙榜)이다. 난 이것을, 인간은 죽어서도 배워야 하는 학생이라고 달리 해석한다. 어른도 잘못했으면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어른도 배우고 고쳐야한다. 그런데 어른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다. 싸움만이 일어날 뿐이다. 이때는 어찌하라?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젊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학생이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더욱 크게 성장하는 게 젊은 그들이다. 그래서 삶을 배우는 모든 사람을 학생이라 한다. 이 때문에 사람에게는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도록 일러 깨우치게 하는 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공공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다면, 공공의 질서를 지켜야 함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야 한다. 아무 곳에서나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도 교육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누구나 다해야 하는 것이고 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실천의 의미를 주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 더 나아가 이제는 학생과 교사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때다. 학생과 교사가 그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때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할 때다.
 
도대체 요즘 우리들은-학생과 교사와 학부모는, 보다 살기 좋은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억압과 통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대는 지났다. 야단을 맞으며, 욕을 먹으며, 매를 맞으며 크는 아이들의 시대는 지났다. 벌금과 벌점, 벌칙으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가르칠 시대는 지났다. 칭찬하자. 상점을 주자. 많이 격려하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자. 아이들의 시선으로 학교를 보고, 어른인 우리들의 모습을 살피자.
 
이제는 학생들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자. 핸드폰의 사용은 공공의 질서를 지키면서 사용해야 함을 교육하자. 문명의 이기답게 정보를 검색하고 지식의 확장을 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학생들과 학부모 및 교사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이 어른들을 존경하고 자신들도 존중받을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자. 학생들을 훈육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하지 말자. 그들도 더 잘살길 원하고 행복해 한다는 동료라는 생각을 갖자.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라고 요청하거나 명령하지 말자. 그저 아이들이 보고 배우며 따라 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자. 그런 점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어른의 스승일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어른을 지켜보고 있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라며 아이들이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배우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보고 있다. 아이들에게 배우자.
 
 
 
우리 모두를 그렇게 보지 마세요
 
‘실내에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핸드폰을 잠시 꺼 주십시오.’라는 정중한 부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 전화벨이 울리는 사람이 있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지만 꼭 있다. 그 한두 명을 갖고 아이들 모두를 진단하지 말자. 그 한두 명을 갖고 모든 학생들이 문제라고 하지 말자.
 
핸드폰 사용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핸드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있다. 담배를 몰래 피우는 학생이 있다. 수업 중에 핸드폰을 사용하는 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면, 자신의 잘못을 안다. 담배를 피우다 걸린 학생은 자신의 잘못을 안다. 그리고 미안해한다. 왜 잘못했는지, 왜 미안한지를 들어보면,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무엇인가?
 
아이들이 아파한다. 아이들은 대화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 어른들의 사회와 질서만을 그들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성장한다. 우리 어른들도 그런 시절을 겪지 않았던가? 어른들이 위에서 밑으로 내려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비로소 의식의 전환이랄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일어난다. 학생과 교사, 아이와 어른의 역지사지가 일어나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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