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생명의 땅, 아픔의 땅 ,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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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생명의 땅, 아픔의 땅 , 교동!
  • 문경숙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 승인 2013.09.14 20:2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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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마을조사단 1차 탐방 - 교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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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과 처음 마주한 것은 몇 해전 일간지에 실린' 시간이 멈춘 교동' 이란 기사였다.
시간이 멈춰버린 교동엔 대체 무슨 사연이 녹아 있을까?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교동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이번 5월 11일, 12일 이틀간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단원으로 선발되어 조금 더 교동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교동으로 떠나기 전날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임이 가득했다.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으려 새벽잠을 설쳤다. 하나둘 단원들이 모여 교동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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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 긴장감, 그리고 마주한 교동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약간의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무장한 군인이 보이고 철망앞엔 얼마 전 자살하려는 시민을 구하려다 순직한 정옥성 경위를 찾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 숙연해지는 마음이었다. 간단하게 각자의 신분확인이 끝나고 교동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수십마리의 갈매기가 먹이를 찾아 뱃전으로 몰려드는 속에 저 만치 교동에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교동' 이란 글귀가 반겨주는 월선포에 닻을 내렸다. 군사 접경지역이여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의 눈빛에 바짝 긴장감이 몰려 왔다.
포구에 내린 섬마을 조사단원들은 인천녹색연합 장정구 사무처장의 브리핑을 듣고 첫 조사지인 '교동대교' 건설현장이 마주보이는 방파제로 향했다. 방파제 현장은 그야말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했다.
그 많던 '숭어'와 '대하'는 어디로....
방파제로 향하는 길은 보통의 길이었으나 방파제가 붕괴되면서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방파제 안쪽에 위치한 양어장은 그 기능을 잃은지 오래 되어 보였다. 이 곳에서 '숭어'와 '대하' 를 양식했다고 하는데 현장의 모습은 '그랜드캐년' 처럼 물이 빠진 자리에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미 바닷물에 잠겨 말라버린 나무에서 예전의 모습을 짐작케 했다. 조사단이 걸어가는 길도 곳곳에 손목이 들어갈 정도로 갈라져 위태로워 보였다. 이미 길이 아닌 길을 따라 조사단원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발길을 멈춘 그 곳엔 갓 낳은 듯한 새의 둥지, 그 옆은 부너져 내린 방파제 절벽이 조사단의 안타까운 마음을 더 했다. 부디, 탈 없이 훨훨 날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해무 속에 교동대교의 건설현장이 이곳의 사정을 알고는 있는지 무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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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교동엔 적막감이'
1박2일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시간이 멈춘 교동' 대룡시장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조사단이 방문한 날도 여러 팀이 촬영을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문을 닫은 가게들이 더 늘어난 모습과 마을 곳곳엔 폐가가 방치되어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찾아 조사단원들은 2개조로 나누어 활동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원교동주민과 이북이 교향인 실향민들 사이게 깊게 자리한 해결되지 못한 앙금이 어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교동대교 개통을 두고, 앞으로 발전을 기대하는 사람과 '다리가 놓인다고 달라질게 뭐있냐?' 라는 의견이 갈라져 있고 이제 나이가 들어 생전에 통일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시선은 멀리 연백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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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이 된 그 자리'엔 무성한 잡초만이
무거운 발 길를 돌려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애인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주신 '송암 박두성'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조사단원이 마주한 그곳엔 무관심을 대변이라도 하듯 잡초만 무성했고 그 흔한 안내판 조차도 없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송암 선생이 땅을 기부했던 '교동교회'도 덩그러니 비어 있어 적막감만 맴돌았다. 나즈막히 쌓아올린 교회마당의 계단과 종탑은 세상의 빛이 되었던 송암 선생의 모습을 닮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흔적만 남은 그 자리에서 밀려드는 이 죄책감은 무엇일까? 송암 선생의 생가터를 돌아서 오는 길에 자꾸만 자꾸만 발길이 멈칫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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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성? 관미성?'
각 방송사에서도 특별 취재를 다녀갔을 만큼 요즘 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개산성엔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가늠케 했다. 조선시대 한증막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에서 조사단원들이 직접 들어가 보면서 잠시나마 그 시절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화개산 정상에 오르니 산자락엔 조팝나무꽃이 하얗게 눈밭을 이루고 있다.
화개약수터에서 목마름을 해결하고 내려오니 '효자묘'가 잠시 머물러 가자 손짓했다. 얼마나 효심이 지극해 시묘살이를 했으면 아직도 머리를 조아려 큰 절 올렸던 자리가 화석처럼 남았을까? 죄송한 마음을 안고 산자락을 내려오니 '연산군 유배지'표지석이 잠깐 발길을 멈추라 한다. 교동은 연산군 외에 여러 왕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구본선(교동교회) 목사를 만나 송암 선생과 교동교회의 이야기와 교동지역 학교현황 등 지역의 역사를 듣느라 하루의 일정이 빠듯하게 지나갔다. 교동향교로 떠났던 다른 팀이 돌아오고 잠시 저녁식사를 겸한 휴식을 취했다.
흔적, 흔적, 그리고 바람
조사단 일행을 맞이한 교동의 밤은 요동쳤다. 천둥번개와 강풍과 비바람에 놀란 가슴은 전쟁이 난줄 알고 밤새 인터넷 검색창을 확인하는 해프닝 이야기로 아침을 맞이했다.
고읍리 곳곳엔 '흔적'의 연속이었다. '옥사터'엔 어렴풋한 흔적만이 소리없이 맞이했다. 현청터에선 물푸레 나무를 두고 300년이란 설과 150년이란 설이 서로 자웅질을 했다. 고수저수지를 둘러싼 마을 곳곳엔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마을 이장님의 안내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성'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 이번 조사단의 거둔 수확이라고 할까? 그러나 문화재의 흔적을 싹 지워버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어야 하는 괴로움도 겪어야 했다.
기존 도로의 폭을 확장하는 문제를 두고 강화군과 지역주민들간의 의견를 듣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없는지, 어느 재력가가 땅을 구입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터엔(갈공사지로 추정됨) 낯선 건축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동엔 이 외에 안양사지, 화양사지, 법정사(월정사)지 등이 있다. 폐교 된지 10여년이 지난'화동국민학교' 의 교정엔 '독서하는 소녀상, 이승복 어린이상, 이순신 장군 동상만이 가시덤불 속에서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철책선을 따라 해무 속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비'에 잠시 머무니 백로의 자유로운 날개짓이 한 없이 부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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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9길을 따라 걸으니 이 땅의 아들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이고 쓰레기 더미속에 파묻힌 '계루석'이 '나 여기 있다' 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손이 분주한 들판을 지나니 어느 집 대문처럼 되어 버린 '교동읍성'이 조사단을 맞이했다. 마을 곳곳엔 '성'의 흔적이 밭의 돌담으로 어느 집 담장으로 각각의 운명처럼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연산군을 모신 사당 '부군당'엔 제사 지낸지 며칠 지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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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랑을 따라 발길을 옮기니 교동의 넒은 들판 같은 모습의 '느티나무'가 조사단을 반겼다. '느티나무'가 품어주는 싱그러움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교동부지'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은 표지석과 한 때는 화려했을 일본식 건물이 남아 그 규모를 알려 준다.
뒤뜰에는 아직도 메마르지 않은 우물이 서 있다. 일행과 뒤쳐진 걸음을 바지런히 옮기니 '연산군 적거지' 가 휑하니 나타났다. 표지판 앞쪽에 남아 있는 우물엔 이 곳의 사연을 알음직한 고목의 밑둥이 우물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세월의 무상한 바람이 역사의 무관심을 깨우치듯 저수지를 따라 불어왔다. 마을 가운데엔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 했다는 전설이 있는 '황룡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여정인 '동진포'에 들러 이번 조사단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교동'의 역사를 어찌 한 두번의 방문으로 다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역사와 지역의 문화와 환경과 생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 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할 몫인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우리가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고 우리 후손으로 부터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고
-2013년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문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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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kdcks 2013-05-26 06:01:00
현지민 처럼 드나든 저보다 더 자세히 그리고 입체감 나게 잘 쓰셨네요.
이런 분이 섬마을 조사단원이니 자주 갈 필요없어졌네요.
그런데 교동뿐 아니라 인천 앞바다에 동동 떠있는 섬들 어떻게 변해야 되는건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건지는 현지 주민들의 몫인것인데 너무 들뜨게 하는건 아닌지요?

민경찬 2013-05-25 08:49:36
외지인들에게는 거의 '대룡시장'으로만 알려져 있는 교동도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됐습니다.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군요.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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