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념 넘도록... 실향의 가슴 시린 시간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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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념 넘도록... 실향의 가슴 시린 시간을 넘어
  • 김주열
  • 승인 2013.09.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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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마을조사단, 교동도 피난민 최병숙 할머니 인터뷰
최병순.jpg
 
우리시대 기록 유산의 가슴 시린 연대기
 
  김주열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지척(咫尺). 아주 가까운 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도 30cm 남짓의 거리이니, 엎어지면 코가 아닌 무릎이 닿을 거리이다. 하지만 지척이라는 말 뒤에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을 하지 못했다’와 같이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는 부정적 의미의 서술어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거리’라는 말이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서로 다다를 수 있는 시간적 개념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멀고 가까움에는 시간이 녹아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교동도에 인천섬마을조사단(이하 ‘조사단’)이 찾아 간 것은 이곳이 시간이 녹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013년 5월 11일. 1박 2일의 일정으로 조사단의 답사가 있었다. 조사단은 인천녹색연합, 인천in,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소가 함께 인천의 섬을 대상으로 섬마을에 남아있는 인문·사회적 요소와 자연·환경적 요소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그 첫 대상지를 교동도로 했다. 근래에 ‘시간이 멈춘듯한 섬’으로 주목받고 있는 교동도는 연륙교 완공을 몇 개월 앞두고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섬의 모습을 담는 작업이 가장 시급한 곳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TV프로그램 ‘1박 2일’을 통해 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했던 대룡시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우리시대의 기록 유산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리적으로 뭍에서 멀지 않음에도 시간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는 남한만큼 가까운 거리에 북한을 마주보고 있지만 반백년이 넘도록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야 말로 지척의 거리에 50여 년의 시간이 먹먹하게 녹아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 가슴 시린 시간은 대륭시장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조사단이 대풍식당에서 만난 최병숙(87) 할머니는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고 해산으로 시집와서 25살에 교동으로 피난 왔다고 한다. 본래 시댁과 친정이 부유했으나 작은 쪽배를 타고 교동으로 피난 와서 온갖 고생을 했다는 할머니는 피난민 시절과 그 후의 세월에 대해 말할 때 한숨을 쉬곤 했다. 같이 피난 온 가족들도 모두 세상을 등졌고, 이제는 고향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서 굳이 바라는 것이라면 자식들 고생 안 시키게 죽는 것만 생각한다는 할머니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아래 인터뷰 내용은 녹취를 바탕으로 재구성 한 것이다.
 
조사단(이하 ‘조’) : 피난은 언제, 어디서 오셨어요?
최병숙(이하 ‘최’) : 황해도 연백에서 스물다섯 살에, 피난 와서 낳은 아들이 환갑이야.
조 : 그럼 처음에 바로 이곳 교동도로 오신 건가요?
최 : 바로 여기로 왔지. 가족이 다 내려 왔는데 지금은 다 없어. 시댁 식구는 다 내려왔고, 친정 식구는 오빠 둘이 같이 왔는데 지금은 다 돌아가셨어.
조 : 내려오실 때 배타고 오셨나요?
최 : 다들 지키고 있으니까 밤에 배타고 몰래 나왔지. 작은 배에 몇 명이 앉아서 그렇게 왔어.
(같이 자리했던 할머니는 배에 20명 정도는 탔을 거라고 한다.)
조 : 피난 나와서 뭐가 제일 힘드셨어요?
최 : 다 힘들었지. 고생한 거 말도 못해. 내가 고향이 연백이고 시댁이 해산면인데, 친정하고 시댁이 다 잘 살었거든. 논농사도 짓고, 밭농사도 짓고. 그런데 여기 와서 뭐 먹을 게 있나, 뭐가 있나. 고생 많았지
조 : 그럼 살림살이 다 놔두고 몸만 내려오신 건데, 처음에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최 : 부자였는데 가지고 내려올 수도 없으니 땅에 묻고 왔는데, 제사 지낼 때 쓰는 유기 같은 거 다 땅에 묻고 왔지. 빨갱이들이 득실득실 거리니 밤에 몰래 왔지. 그런데 여기 와보니 여기도 농사가 안 돼서 다들 굶고 있는 거야. 어찌 보면 우리(피난민)들이 먹여 살렸지. 그 사람들(교동 주민)이 방을 하나씩 주면 돈을 얼마씩 주고 거기서 살고 그랬지. 나중에는 한 번 올라가기도 했고.
조 : 고향에 한 번 올라가셨다고요? 뭐 가지러 가신 거예요?
최 : 몰래 갔었지. 그런데 낯선 사람이 보이면 의심하니까 몰래 숨어 있다가 내려오는데, 그냥 갈 수 있나. 우리 올케 둘이서 독에다 쌀을 담아서 누가 물어보면 소금 사가지고 온다고 하고 그 쌀 주고 그랬어. 옛날에는 행주치마 입었잖아. 올케가 행주치마를 두 개 입고 와서 하나는 벗어서 나 주고 그랬어. 작은 시어머니가 있어서 만나려고 했는데, 배가 왔다고 해서 (만나지 못하고) 그냥 왔지. 한 달 만에 왔어. 동짓달 초하룻날 가서 다음 초하룻날 왔으니까.
조 : 위험하지는 않았나요?
최 : 위험하지. 거기 사람들이 우리(피난민)를 싫어해. 만나면 반동분자라고 하고. 그래서 몰래 왔지.
조 : 부유하게 살아서 험한 일 안 해봤을 텐데, 어떻게 사셨어요? 농사짓고, 장사하고, 남의 집 일 해주고...
최 : 농사는 무슨.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지. 원래 여기가 장마당이었거든. 여기서 두부도 해서 팔고, 떡도 해서 팔고. 고생 많았지.
조 : 피난 나왔을 때 동네분들도 같이 이곳에 오셨나요?
최 : 같이 나온 사람도 있지. 그런데 다 지금은 없고. 지금도 주민들하고 피난민들 하고 갈등이 남아 있어.
조 : 갈등이 아직 남았다고요? 처음에는 엄청 심했겠네요.
최 : 처음에는 피난 나오니까 자기들(주민)은 사람, 우리는 그냥 피난민 그랬다고. 사람 수를 셀 때 사람 몇 명, 피난민 몇 명. 이런 식으로 셌어.
조 : 피난민에게 구호물자 같은 건 없었나요?
최 : 구호물자로 알락미쌀, 콩 주면 먹고. 옥수수 가루 주면 그걸로 엿 고아서 팔고 그랬지.
조 : 할아버지는 살아계세요?
최 : 돌아가셨지. 조상(선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항상 자식들에게 “내가 돌아가야 너희들이 찾는다.”고 하더니 6년 전에 돌아가셨어.
조 : 자제분들은 인천에 살고 있어요?
최 : 내가 아들 셋에 딸 하나인데, 큰 아들 작은 아들은 중학교 밖에 못나왔어. 막내하고 딸은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그런데 여기 살면서 고생하며 자라서 그게 항상 미안해. 손주들은 결혼을 안 해서 걱정이고.
조 : 이곳 대룡시장에서 장사 제일 잘 되는 곳은 어디에요?
최 : 여기(대풍식당)가 제일 잘돼. 냉면, 국밥, 비빔밥, 만두 이것만 해. 1박 2일에서 밥 먹고 가서 더 잘 되.
조 : 자제분들이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요리 있으세요?
최 : 옛날에는 다 맛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손맛이 떨어져서 맛이 없어. 자신 있는 건 두부하고 엿 만드는 거. 김치두부는 두부 끓여 갖고 (간수 대신) 김치를 넣으면 돼.
조 : 요즘 바라는 거 있으세요?
최 : 바라는 게 뭐 있어. 애들 고생 안 시키게 죽는 거지 뭐.
 
인터뷰 내내 조사단과 파를 다듬던 할머니는 이제 마땅히 할 말이 없다는 듯, 열무 다듬기를 시작한다. 파와 열무는 다듬으면 된다지만, 그 긴 세월을 다듬기에 인터뷰 시간은 짧고, 할머니의 주름은 깊었다.
 
역사를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과 기억의 합집합이라고 조심스레 전제 한다면, 최병숙 할머니의 그것은 분명 역사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아직도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날 것 그대로의 개인사가 못내 아쉽다. 덧붙여 중요성을 미처 알지 못해서, 혹은 인력과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에둘러 변명하기에 우리들의 무지와 무관심이 너무 크다. 보다 전문적인 조사와 기록이 이어지길 바라며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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