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장은, 때로 하나의 세계를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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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장은, 때로 하나의 세계를 끌어낸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6.12 0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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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박물관, 인문학강좌 <우선멈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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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박물관 상반기 인문학강좌 <나의 문학과 인천>가 6월11일 진행됐다. <모르는 척> 등을 쓴 소설가 안보윤씨가 자신의 소설과 자신이 성장하고, 살고 있는 인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씨는 2005년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받으면서 등단했고, 2011년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을 펴냈으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책을 좀 읽으시나요? 사실, 이 질문은 좀 민망합니다. 볼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각화해 있는 장르와 소설은 다릅니다. 소설은 시대에 따라 특색이 달라집니다. 소설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나오고, 도시 가족 친구들 얘기… 그래서 다른 장르보다 접근이 쉽기도 합니다. 소설은 작가가 선택해야 할 게 많습니다. 화두를 정해야 합니다. 이 친구를 만날 때는 이 이야기를 하고, 저 친구를 만날 때는 저 이야기를 할 것을 정하는 것처럼 선택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소설의 밑작업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선택입니다. 누구 이야기를 할까? 세대는 어떻게 잡을까? 아파트, 단독주택, 아님 무주택으로 할까?”

“저는 지금 사회에서 등한시되고 있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소설을 쓰게 되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습니다. 소설가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공모전, 신춘문예, 책을 내거나, 하지만 다 어렵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경향 분석’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위축돼 있을 때는 힐링이 되는 책을 찾습니다. 예로, <아프니까 청춘이다> 경우에는 잘 씌어지기도 했지만 소설가들이 ‘시대성이 맞았다’고 합니다. 지금 취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드니까 그들을 어루만져 주는 책이 필요한 거죠.”

“소설은 시대마다 특색이 다릅니다. 1950년대는 소설 자체가 힘들었고, 60, 70년대에는 전후시절이었고, 8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으로 문화의식과 사회의식이 올랐습니다. ‘계몽성’을 띤 소설이 많았죠. 90년대에는 그동안 너무 큰 맥락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에 반해, ‘자아를 찾기 위한’ 소설이 많았습니다. 홀연히 여행을 떠나는 ‘자아찾기’ 소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복사실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나는,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만. 90년대는 이처럼 ‘개인에 대한 삶’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었죠. 2000년대 들어서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20,30대 젊은 작가들이 많고, SF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혀 색다를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거죠. 2010년대에는 우리와 굉장히 맞닿아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고시원에 살고, 누구나 경쟁상대입니다. 이럴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면 치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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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 속에 인천이 많이 들어가 있더군요. 사회적인 문제를 써도 문득문득 인천 광경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제 소설을 읽고 ‘월미도 디스코 팡팡 안다’고 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제 소설을 읽고 쓰다 보면 어떤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화가 나서 때리고 싶다고 가정합니다. 이때는 사람이 적은 ‘공원’으로 해야 하나? 왜 공원일까? 그렇다면 아는 사람이 만나서 가야 하는 거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소설을 전개합니다. ‘나는 언덕과 골목, 계단의 미세한 틈을 따라 걸었다.’ 저는 만수동, 간석동, 구월동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디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거든요. 유년시절엔 구월 주공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거대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가 됐습니다. 당시 구월주공아파트에는 아궁이가 복도에 있었습니다. 그후 보일러로 바뀌었죠. 딱 1년 사이에 그렇데 소중하던 연탄이 구시대 유물이 됐습니다. 새벽에 연탄을 갈러 나가지 않아도 됐고, 눈이 와도 연탄재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강의할 때 연탄 이야기를 하니까 ‘연탄삼겹살집’이라고 하더군요.”

“복도 베란다 턱에 연탄이 많이 쌓아두는 곳이 있었습니다. 옆집 할머니와 엄마는 연탄 때문에 늘 싸웠습니다. ‘연탄 세어라.’ 연탄을 세어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일러가 생기면서 연탄이 쓸모없게 되었죠. 경비아저씨가 빨리 치우라고 방송하고, 엄마는 옆집 할머니에게 두세 줄을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했던 것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제게 ‘상처’였습니다. 마당에 개를 키우던 집을 밀어내고 아파트가 생겼습니다. 가파른 언덕길은 힘들었지만 ‘추억’과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불도저로 밀어도 되나. ‘기억을 빼앗아도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상처처럼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곳이 많습니다. 빌라로 변했고, 아파트가 생겼고, 주차장이 됐습니다. ‘왜 나한테는 추억이 남아있지 않을까?’ 갈라지고, 쪼개지고, 찢겨졌습니다. 그러한 파편들이 소설에서 쓸쓸한 유년을 그리는 테마가 됐습니다. 남인천여중, 문일여고를 다녔을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운동장에 급식소가 만들어졌죠. 편하게 됐을지는 모르지만 아쉽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책을 좋아했습니다. 소설과 시집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살 순 없어서 배다리 헌책방에 자주 갔습니다. 중2 때 종로 헌책방엘 처음 갔습니다. 인천에도 그런 곳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행복했습니다.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줄 것 같았고, 책 사이에서 터져죽은 벌레를 발견했습니다. 책장 끝에 매달려 있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책장 사이에서 과자부스러기를 만나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사람도 나처럼 엎드려서 과자를 먹으면서 책을 봤구나라는 생각에 즐거웠습니다.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사연과 이미지가 좋았습니다. 배다리에 가면 ‘그 책들이 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초기에는 수능문제집, 대학전공서적, 위인전세트가 많은 아동 문학서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문을 닫은 곳도 많아졌습니다. ‘배다리 헌책방은 엄청난 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헌책을 뒤지다보면 손이 더러워지는데 그럴 때는 책 뒤쪽에 있는, 시멘트를 대충 쳐발러 놓은 수돗가에서 계산하는 동안 손을 닦았습니다. 책 뒤로 늙수구레한 노인들이 주인인 곳, ‘깎아주세요’ 하면서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갔더니 젊은 주인이 인터넷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바코드도 찍찍 찍히고 카드도 된다고 하고, 물티슈를 뽑아주더군요. 이전의 것은 없어졌습니다. 가끔은 아주 불편해도 좋았던 것들이 있습니다.”

“아쉬워서 ‘달동네 박물관’을 갔습니다. 인위적인 장소였습니다. 남아있으면 안 된다고 밀어붙인 게 아쉽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내 무의식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들>에 배다리 헌책방 장면을 쓰게 됐습니다. 구시대 느낌이지만, 누군가를 포용할 수 있는 곳을 원했습니다. 또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서울로 가거나 아예 지방으로 내려간 거죠. 공무원이 된 친구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소한 문제들>에 나오는 ‘두식’에게 헌책방은 도태돼 있고, 누구나의 시간이 똑같고, 고여 있는 시간이 무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레 대형서점과 비교하게 됐습니다. ‘책’ 자체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책을 운명적으로 만날 때가 있죠. 수능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몰래몰래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이것저것 뒤지다가 신경숙이 쓴 <외딴방>을 읽게 됐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지시등 역할을 하는 게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헌책방엔 책기둥이 무척 많았습니다. 저는 맨 아래에 있는 책이 궁금했습니다. 주인들은 아마 싫어했을 겁니다. 마지막에 있는 책을 찾기 위해 누군가 세워놓은 책기둥을 옆으로 옮겼습니다. 누군가 세워놓은 책기둥을 허물면서 새로 쌓은 거죠. ‘책기둥을 허무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다섯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저처럼 축소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은지, 건물에 벽화도 그려져 있더군요. 이렇게 ‘배경’만 제 소설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닙니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 끼어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4월말 인천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포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던 시기였습니다. 가장 요격되는 장소는 ‘인천’이더군요. 엄마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도망갈 시간도 없다. 먹을 건 먹자’고 했습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다음 달에 엄마 카드값이 세 배가 나왔다고 합니다. 스포츠댄스를 비롯해 ‘하고 싶은 걸 다 하자’고 한 게 그렇게 됐습니다. 포럼에서 작가들 소개를 들으면서 놀랐습니다. ‘인천’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떤 작가는 아내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었다고 했고, 어떤 작가는 이혼도장을 찍고 왔다고 했습니다. 불안, 가장 먼저 놀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심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천사람인 나는 경계의 틈에 끼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로처럼 인천시민도 할인해 주면 잘 될 것이다는 게 있어서 제가 세 번째 회원이 됐습니다. 반년이 지나도 50명이 안 됐다고 하더군요. 인천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학로나 홍대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문화공연이 적은 거죠. 전라도 광주나 청주에 사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문화단체들이 활성화해 있습니다. 서울과 지나치게 가까워서 예술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이처럼 내가 살던 곳에 남은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수동 간석동 구월동에 살았는데, 대형아파트를 짓느라고 공사차량이 많이 다니고 먼지가 많이 일었습니다. 그걸 바라보는 전경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아파트들, 제겐 경계였습니다. 논현동은 신도시 느낌이 많이 납니다. 동인천, 도원동은 시골 느낌이 많이 나죠. 거주지로 확정된 곳에서 쇠락한 느낌이 듭니다. 소래 논현동에 가면 다 체인점입니다. 어딜 가나 다 있는 곳이죠. 하지만 동인천 쪽은 소소한 주인들만의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경계에 놓인 세대’ 같습니다. 제가 소설을 배울 때는 전쟁을 겪은 선생님들이 가르쳤고, 저는 지금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경계와 불안’이 저한테 있습니다. <모르는 척>에는 형제들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하게 나옵니다. 틈이 어중간한 걸 보여주기 위해, 제가 경험한 공간과 배경이 쓰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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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습니다. 군인복장과 군 지프차로 이동하던 기억들은 제겐 아무렇지 않은 기억입니다. 지난번에 송내역에서 무장한 군인들을 봤습니다. 송내 쪽에 있는 군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책이 나오고 데뷔를 했지만, 일이 없었고 시간과 돈이 필요했습니다. 군 부대 안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군인들이 훈련 나가고 없으면 책 보고 글 쓰고 좋았습니다. 직원할인가로 책도 많이 샀습니다. 주말에는 아들을 면회 온 부모들이 책을 많이 샀죠. 그때가 참 평화로운 기억입니다. 책을 사러 무기를 들고 오진 않잖아요. <맥심>이라는 잡지로 몰래 구해다 주곤 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무게감, 일종의 불안함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소설가가 됐지만 사실 백수다, 라는 ‘불안감’이 있었을 겁니다. 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불안정하고 상처받고 찢어져 있습니다.”

“‘철로와 기차.’ 학창시절에 주로 소풍을 간 장소는 월미도, 전등사, 협궤열차가 서 있는 전시관이었습니다. ‘배’가 아니라 ‘철로’, 그것도 ‘끊어진 철로’였습니다. 철로의 흔적은 있지만 아무데도 데려가주지 않는 ‘불확실성’이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 그 이미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르는 척>에는 어린 남매가 성장하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암울한 인생 이야기입니다. 제 안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그리고 싶은 인물상과 맞아떨어진 거죠. 사실, 서울에 있는 길이나 카페를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기 전까지 인천 이미지는 제 소설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등록금에 보탤까 싶어 월미도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귀신의 집에서 ‘귀신 역할’을 하는 거였습니다.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처녀 귀신’이 됐습니다. 분장실에서 두껍게 새하얗게 분장하고, 피도 흘리고, 소복 입고 구석에 서 있는 역할이엇습니다. 손님이 많이 안 오는 데라 어떤 때는 한 시간도 서 있었습니다. 꼭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손님이 왔죠. 하지만 사흘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남자분들은 그냥 보는데 여자분들은 너무 때리더군요.(웃음) 차라리 도망가면 될 텐데, 가발이라고 생각하고 머리를 뜯어요. 또 어떻게든 귀신을 이겨보려고 허세를 부리는 학생들이 있더군요. 당시에 소설 속 인물은 ‘어디로든’ 가기 힘든 때였습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제 생활이 드러나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과 잘 지내는데 고통스런 가족사를 쓰는 것도 좀 그랬습니다. ‘소설과 나를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내 것들이 많이 스며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죠.”

“제게 ‘바다’는, 연안부두의 갇혀있는 바다, 거의 흙에 가까운 소래 바다, 배에서 본 회색빛 월미도 바다입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뱃고동 소리 들려?” “sbs 나와?” 하고 물었죠. 최근까지 ‘바다’가 적었습니다. 그동안 어떤 글을 썼나, 책 다섯 권을 천천히 읽다 보니 철로 이미지와 함께 바다 이미지가 많더군요. 바다이면서, 육지이면서,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메마른 바다로 내 소설 속에 있지 않을까. 소설에서 ‘쓸쓸하고 막막함’을 묘사할 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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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작가 ‘이브 탕기’ 그림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원으로 살다가 25살쯤 어느 화랑에서 그림을 보고 독학으로 공부한 화가입니다. 초현실주의로 우뚝 선 그는 바다의 세계를 담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 안에 바다라는 이미지가 고여 있다 보니 끌렸을 겁니다. 이브 탕기의 바다 이미지가 강하게 끌렸습니다. 이 사람을 둘러싼 배경들이 어떤 식으로든 문학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작가는 외형적인 것에 휘둘리기 쉽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지난 생일 때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받았습니다. 이는 위험에 대한 재인식일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 소설에는 배다리 책방에 대한 나름 이미지와 철로가 주는 묘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은 때로, 물비린내처럼 집요하게, 코가 빽빽한 그물처럼 치열하게, 하나의 세계를 이끌어냈다.’”

“편의상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가도 그 지방 특색이 묻어나옵니다. 유년에 겪은 신비하고 독특한 경험은 나오게 됩니다. 제 소설에서 많이 그려지고 있는 장면들,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들로 다 끌려갈 수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이미지,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 유년을 되돌아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변하는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어린이들이 어른이 돼서 소설 속에 그릴 장면은 또 다를 것입니다. 내 앞집, 뒷집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은 누군가 읽어야 형성되는 문장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자의 손이 많이 갑니다.”

-질문
“헌책방에 많이 가는 편입니다. 얼마 전에 대한서림에 갔더니 1,2층이 빵집으로 바뀌었더군요. 상실감이 컸습니다. 박물관 강의를 자주 오는데, 여기는 옛날 극장맛이 납니다. 소설을 읽어보니, 잔인한 내용이 많이 나오더군요. 식구들과 사이가 어떠신가요?”

-대답
“저는 아버지랑 친합니다. 제 소설은 적나라하고 잔인한 데가 많다. 전 가족과 친합니다. 제가 소설을 공부할 때, 저희 부모님은 취직에 대해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돈을 벌면서도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죠. 저한테는 무척 소중한 가족입니다. 소설에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고백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저는 반대작업을 한 거죠. 소중한 물건이 깨지고 나서 후회하는 것, 저는 이런 류의 작업을 합니다. 가정이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깨어지게 하면서 ‘당신의 가족은 평화롭습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선멈춤>은 제가 쓴 다섯 권 소설 가운데 가장 잔인합니다. ‘당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소설을 쓸까, 지금은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서림은 아쉽습니다. 언젠가 큰맘 먹고 스페인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18,19세기 건물이 그대로 있더군요. 안에는 살기 편하게 개축하고 겉은 ‘남겨놔라’면서 정부에서 지원한다고 합니다. 사라진 것은 안타깝지만, 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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