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안 됐는지... 그리고 살아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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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안 됐는지... 그리고 살아남았지
  • [인천섬마을조사단] 이재은
  • 승인 2013.09.09 0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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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마을조사단> 인터뷰 - 서검도 김창열 전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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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다섯 시. 강화에서 서쪽으로 10.2㎞ 떨어져있는 서검도는 적요하고 따듯했다. 도시의 한여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적막과 고요에 섬마을조사단 일행은 발소리를 죽이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그동안 갔던 두 번의 섬(교동도, 백령도)과는 다르게 아기자기하면서 컬러풀했던 서검도의 일상. 골목에 널려있던 흰 옥수수, 파란색 그물 소쿠리에 담긴 생선비늘, 우물가에 있던 검정색, 갈색의 고무 양동이, 철근에 거꾸로 걸려있던 주황색 장화, 절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던 회색의 마른 나무뿌리 등. 잘 익은 빨간 고추가 있었고, 탐스러운 노란 배가 있었고, 늘씬한 보라색 가지가 있었다. 마을이 좁은 탓에 우리는 방금 헤어졌다가 금세 다시 만나곤 했다. 멋쩍게 웃는 동안 어디선가 개가 짖었고 서서히 해가 졌다.
낚시터이자 서검도의 유일한 민박집에 짐을 풀고, 조사단 일행은 서검도에서 나고 자라셨다는 김창열 할아버지(82. 전 노인회장)를 만나기 위해 마을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낮 2학년이야
 
- 예전에는 섬에 사람이 많았나요?
사람 많았지. 나 어릴 때는 집이 한 30호 정도. 6.25사변 나고 농지가 30만평 늘었지. 그 이전에는 어업 반, 농업 반이었어. 농지가 6~7만평밖에 안 됐지.
 
- 학교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대신 강습소라고, 조그맣게 집처럼 생긴 게 있었어요. 내가 열 살 때 해방이 됐으니까. 하여튼 난 초등학교도 못 다녔어요. 그때는 선생을 어디 가서 사와야 돼. 한 달, 혹은 일 년에 보리쌀 얼마 주는 식으로 해서. 그것도 비위에 맞지 않으면 관두고 가잖아. 그러니 새로 선생이 와도 밤낮 2학년이야. 3-4년 동안 2학년만 다닌 거야. 그러다가 해방되고 나이만 먹었지 뭐.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댕겼지.
 
- 할아버지도 농사 짓고, 고기 잡고 하신 거예요?
그 전에는 농사를 짓다가 나도 배를 부렸어요. 16년간 배 하다가 망했지. 잘 안 됐어요. 배 하다가 다리뼈에 금이 가서 한 일 년 놀고. 볼음도 뒤에 말도라고 있어요. 배 타고 거기까지 갔지. 꽃게잡이 한 거예요. 첫 해에는 괜찮았는데 그 후로는 계속 적자야. 사람 사야지, 물건 사야지, 보통 5, 6백씩 들어요. 다음 해에 통 잔뜩 사서 넓혀놨는데 안 되더라고. 새우젓 같은 게 지금은 좀 되지. 그때는 왜 그렇게 안 됐는지. 지겹게 안 됐어. 경운기 하나 사서 논농사 지어다 배할 때 진 빚 다 갚았어요. 내 땅은 없었고 남의 땅 가지고 하는데, 동서남북 할 것 없이 구석구석 다니면서 농사지었죠. 그리고 살아남았지.
 
 
병원 가는 게 참 불편해
 
-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사모님도 여기 분이세요?
옛날에는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니까. 앞, 뒷집 살았어요. 군대 나가는데 자꾸 대답하고 가야된다고 하는 바람에, 중간에 휴가 나와서 3년 만에 결혼했어요. 그때 마누라 나이가 스물, 내가 스물다섯이었지. 내가 4년인가 5년 군 생활을 했어요. 원래 강원도 인제로 갔다가 수원 오산, 그리고 후방부대로 가야한다고 해서 인천으로 왔지. 옛날에 송도에 고사포 사격장이라고 있었어요. 지금은 돌산이 됐더라고. 거기 레이더망이 있었어. 조개 펄 바깥으로 무인비행기를 띄워서 사격을 하는 거야. 미군부대에서 최초로 인계받아서 했지. 여기저기서 몇 개월씩 훈련하다보니 남보다 오래 했지 뭐.
 
- 제대하고 바로 배 타신 거예요?
섬 밖에 나와 살려고 서울의 쌍문동, 사당동 뭐 이런 데 장사 좀 하려고 디밀었어요. 그때는 사당동이 전부 모래판이야. 산 변두리에 집 하나씩 있었고. 막 시장이 생겨서 황소 한 마리 판 것 가지고 노점에 스뎅 좀 깔아놓고 했는데 사람이 없으니 잘 안 되더라고. 종일 앉아서 졸다가 저녁에 밥 한 그릇 사서 둘이서 나눠 먹고. 몇 개월 지나니 못 견디겠더라고. 오류동에서 해볼까 하고 장사 신청했는데 주위에서 전망 없다고 못하게 해요. 다시 인천 제철공장 다니다가 사글세 방 얻어서 장판 밑에 돈 깔아두고 그럭저럭 지냈어요. 그랬는데 마누라 아파서 번 돈을 다 병원비로 썼어. 도립병원, 기독병원 다 다녔는데 병명이 안 나왔지. 사촌 매형 아들이 서울대학병원에 있어서 거기서 수술도 여러 번 했어. 콩팥 다 떼 내고. 지금도 병원을 자주 가요. 여기서는 그게 참 불편해. 당일로는 못 가니까. 이상하게 토요일, 일요일 급한 일이 많이 생겨요. 주말에는 나갈 수도 없고 의료할 데도 없어요.
 
- 헬기 같은 걸 띄울 수는 없나요?
이론상으로는 위급할 때 띄울 수 있는 헬기가 있대요. 부르라고는 하는데 그게 보통 문제입니까. 배는 돼요. 밤중에도 가능하니까 강화까지는 갔다 오는 거예요. 헬기는 못 불러 봤어요.
 
 
연백으로 장 보러 다녔어
 
- 한국전쟁 전에는 이북에도 가보셨어요?
그렇죠. 지금은 강화가 이웃이지만 그 전에는 연백으로 장 보러 다녔어요. 지금은 엔진 배지만 그때는 풍선 하나 타고 갔지. 돛단배 알죠? 바람 이용해서 가는 거. 아니면 노 젓는 배로 가고. 여기도 피난민 많았어요. 물밀듯 들어왔지 뭐. 다들 배 타고 들어오는 거야. 우리 집에서도 하룻밤에 애 둘 낳은 적도 있다니까. 부엌이니 헛간에 꽉꽉 들어찼었지. 여기서 몇 달 살다가 전쟁이 안 끝나니까 다 육지로 나갔지. 나간 사람들은 다 잘 살았어요.
 
- 한국전쟁 때 피해는 많지 않았어요?
공격피해는 없었어요. 대한청년당이라고 해서 우리도 목총 갖고 경비 서고 그랬어요. 여기 사람들 먹을 게 없잖아. 나도 사람들 따라서 연백에 16번인가 들어갔다 왔어. 가서 쌀 한 가마니 가져오면 세 말은 내 거야. 세 가마니 가져오면 한 가마니가 내 몫이고. 또 소금 얻으러 가자, 그러면 소금 세 가마 퍼오면 한 가마는 내 거야. 들어갔다 죽은 사람도 많아요. 아무튼 가장 힘들었을 때가 전쟁 때지. 나도 몇 번 죽다 살아났어. 총에 습격 당하고 그런 생활을 했어요, 내가.
 
- 군부대 제재 때문에 갯벌에서 야간 조업이 어렵다고 들었어요.
항상 군인들에게 얘기하는 게 그거야. 내가 서검도 태생인데 뺑뺑 돌아도 다 물 울타리야. 가면 어디로 가냐 이 말이야. 뭘 잡아다 먹고 해야 생활유지가 될 텐데 여기서 막고 저기서 막고 하니 갈 데가 없어. 낚시나 한 번씩 하는 건데 그것도 뭐 자꾸 막아서 할 수가 없지. 둑에서 바다로 던지기만 하는 건데. 이런 건 풀어줘야 되거든. 사실 뭐 사고 날 이유라도 있으면 그런다 치지만 사고 날 이유가 없잖아. 가만히 앉아서 던지기만 하는데. 아주 괘씸해.
 
맘 편한 게 제일이야
 
- 집들이 깨끗하고, 조용한 것 같아요.
1981-82년도에 정부 혜택으로 집을 지었고, 근래에는 지붕을 새로 얹은 곳이 많아. 조력발전 때매 삼산에 다리 놓이면 여기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겠지. 물론 발전성은 있겠지만 쓰레기가 많아질 것 같아. 요새도 낚시꾼들이 돌 사이에 틀어박아 놓고 가고 그러거든. 그래도 조용하고 좋아요. 여기 있다가 도시 나가면 사흘을 못 있어. 차 비켜 다니고 사람 비켜느라. 아이구.
 
- 자녀분들은 섬에 자주 오세요?
그럼요. 시간 되면 오고. 다 인천에 있으니까 자주 모여요. 근데 요새는 우리가 인천으로 나가. 자식 넷에 손주가 둘씩. 그럼 얼마야, 사사십육, 열여섯이잖아요. 우리 둘만 가면 해결돼요. 그렇게 해서 찾아가는 게 낫지.
 
할아버지는 그날이 당신 생일이라고 하셨다. 입고 계셨던 분홍색 티셔츠는 자식들에게 받은 선물일까? 약주 드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자, 친구들하고 마시다가 약속 때문에 나온 거라고 하신다. "간만에 젊은 처자들과 얘기하니까 즐겁다"고 하며 웃으시는 걸 보니 '우리가 어르신께 민폐만 끼친 건 아니었나보다'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인천섬마을조사단 : 서은영, 이규원, 이재은
녹취록 풀이 : 서은영
정리/사진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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