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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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 윤세민
  • 승인 2014.01.08 19: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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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민의 영화읽기 (1)<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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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이 뜨겁다. 열풍을 넘어 광풍이다.
영화 <변호인>이 지난 1월 7일, 상영 19일 만에 누적관객수 800만 명을 기록했다. 정식 개봉(지난해 12월 19일) 3일 만에 100만, 7일 만에 300만, 12일 만에 500만, 14일 만에 600만, 17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기록 중인 <변호인>은 이로써 19일 만에 8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이전 25일 만에 800만 관객을 모은 뒤 10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7번 방의 선물>(최종관객수 1280만 명), <광해, 왕이 된 남자>(1231만 명), <아바타>(1362만 명)의 기록을 대폭 앞당긴 속도다. 이 같은 속도로 봤을 때, 이번 주 900만 돌파를 넘어 역대 흥행 영화 중 가장 빠른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할지 영화계 안팎의 귀추가 주목된다.
<변호인> 광풍의 이유가 무엇일까? 해석이 분분하다. 시대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해석이 난무한다. 여기선 가능한 그런 관찰을 제외하고 영화적 맥락을 중심으로 들여다 볼 것이다.
 
 
 
 
<변호인>은 실화인가 허구인가?
 
 
<변호인>은 1980년대 초 부산을 배경으로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다섯 번의 공판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양우석 감독의 연출 데뷔작으로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임시완 등이 출연했다.
그동안 웹툰 작가로 활동했던 신인 양우석 감독은 <변호인>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자신의 이름에 배우 송강호의 성을 따, 주인공인 변호사를 ‘송우석’이란 캐릭터로 창조해냈다. 소위 ‘부림사건’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영화의 소재로 차용했지만, 양우석 감독은 이를 통해 더 넓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영화 <변호인>은 이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그러나 허구가 개입됐다는 사전 안내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스크린과 현실의 창을 겹쳐서 영화를 본다.
이미 알려진 대로 <변호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리고 있다.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자리를 잡은 노 전 대통령이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부산의 학림사건: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공안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모임 학생 등 22명을 불법 감금 고문해 기소한 용공조작사건))을 접하면서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뤘다. 제작진은 부림사건과 노 전 대통령의 사연에서 “모티브만 따왔다”고 선을 긋지만,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실화와 영화 속 이야기를 겹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서 그런지 여느 영화보다도 갑론을박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팩션’(faction: fact +fiction)이라고 하는 이런 영화들은 실제 사건에 허구를 가미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 끈이 생기면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팩트의 힘이 있고, 그만큼 개연성을 보장해 주니까 흥미도 커진다.
팩션 영화 <변호인>은 공권력의 폭압과 민주주의의 부재한 상황 속에서 한 인권 변호사의 고군부투를 그려내면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답을 주거나 미스터리를 풀어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영화에 빠져드는 건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팍팍한 현실에서 우리는 늘 패배하는 것 같은데, 영화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악을 응징하는 쾌감을 주고, 설령 <변호인>처럼 패배하는 설정이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결국, 감춰진 진실에 대한 호기심이 흥행으로 연결됐고, 카타르시스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영화가 팩트와 픽션 사이에 있다는 걸 잊고 영화 속에서 규정되는 선과 악의 구도를 무작정 현실로 끌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도 현실도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변호인>의 경우도 영화가 차용한 팩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속물이었던 한 인물이 ‘주변인’에서 ‘주인공’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그 놀라운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왜? 그것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송강호의 열연과 <변호인>의 매력
 
 
<변호인>은 대중적 휴먼드라마의 구조를 띈다. 무리 없이 감정을 따라가게 한다. 탄탄한 스토리와 함께 선동 없이도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거기에 출연 배우들의 열연이 작품을 뜨겁게 달군다. 특히 국민배우 반열에 올라선 송강호의 연기는 이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변호인>의 영화 제목은 ‘변호사’가 아닌 ‘변호인’이다. 변호사(辯護士)와 변호인(辯護人)은 그 의미가 다르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더라도 변호사는 직업적인 특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변호인은 ‘대변인’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이 있다. 변호사는 직업인으로서 법을 통해 ‘돈’을 버는 직업인의 의미가 강하지만, 변호인은 법을 통해 ‘사람’을 위해 변론하는 사람 그 자체 의미가 강하다. 이런 의미에서 <변호인>은 송강호가 분한 ‘송우석 변호사’가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인권을 변론하는 ‘변호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즉 사(士)라는 개인이익과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람과 사회를 대변하는 한 사람(人)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만큼 감정의 기복이 큰 캐릭터의 변화 과정을 송강호는 자연스럽게 천연덕스럽게 또 아름답도록 감동스럽게 열연하며 우리의 웃음과 눈물을 지켜준다.
특히 송강호의 마지막 변론 장면은 압권이다. <변호인> 최고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스테디캠을 통해 3분 롱테이크로 담아낸 변호인 송우석의 변론, 그리고 송우석의 뜨거운 진심이 담긴 변호는 카메라가 법정 전체를 비추며 조용히 마무리 된다. 그 순간 몰려오는 뭉클함은 한 인물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네 국민들에 대한 위로의 마음과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로 승화된다.
더 나아가 송강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을 사자후로 외칠 때, 이 영화는 과거가 아닌 현재가 된다. 그 전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줄로 알았던 헌법 제1조 2항이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을 넘어 2014년 오늘에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살아나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체험을 보편적 공감대로 살려내는 송강호의 열연과 함께 부림사건의 담당 경감 ‘차동영’ 역할의 곽도원의 연기 역시 칭찬할 만하다. 나름의 신념과 광기로 ‘또 다른 애국 괴물’로 살아나 송강호의 대척점에서 가히 빛나는 연기를 펼친다. 현재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그만큼 악역을 잘 펼쳐낼 배우가 있을까 싶다.
그밖에 송 변호사의 단골 국밥집 주인 ‘순애’로 분해 고문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송 변호사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인물로 뭉클한 감동을 안긴 김영애, 국밥집 아들 ‘진우’로 신인임에도 침착하고 성실한 연기를 펼친 임시완, 냉철하면서도 영악한 검사 역의 조민기, 수완 좋고 능글능글한 판사 역의 송영창, 사람 좋은 선배 인권 변호사 역의 정원중 등도 배역을 잘 소화해내는 호연을 펼쳤다.
다만, 송 변호사 사무장 역할의 오달수는 특유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는 배우의 잘못이라기보다 다분히 스토리 전개와 러닝타임 조절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송 변호사 아내 역의 이항나, 변호사 사무실 미스 문 역의 차은재를 비롯해 배석 변호사들의 캐릭터 구축과 연기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하겠다.
 
 
 
 
영화작법과 영상미학 측면에서의 아쉬움
 
 
<변호인>은 영화 전체적인 스토리텔링이나 대중 관객과의 교감 등에서 분명히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런 만큼 현재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변호인>은 사실 영화적으로 볼 때 걸작이라기보다는 수작에 가깝다. 영화작법과 영상미학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잘 짜여지고 잘 만들어진 영화지만,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허점을 숨길 수는 없었다.
80년대라는 시대적 이분법에 대해서 <변호인>은 21세기적 대응이 아닌 여전한 이분법적 감수성으로의 무리한 복귀를 요구한다. 진지한 영화적 작법보다는 단순한 이분법, 또 도전과 비판으로 점철된 서사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송우석이 국밥집 아들 진우의 면회를 통해 극적으로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인’으로 거듭나는데, 감정적으론 이해되면서도 무언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 인간의 엄청난 인생 반전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송 변호사와 진우와의 관계에 있어서, 또 그런 엄청난 변화에 어울릴 만한 어떤 복선이나 인과관계를 더 설정했어야 했다.
그리고 과도한 클로즈업과 빅클로즈업 사용 등의 카메라 앵글이나 카메라 워킹, 편집 기법, BGM 삽입 등 기술적인 면에서도 제대로 영상미학을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인>은 초보 감독의 처녀작으로선 대단한 성공작이며 수작이다. 전체적으로 연출이 꾸밈이나 잘난 체 없이 담백했다. 초보 감독으로서 서툰 장면을 간과할 순 없지만, 오히려 이런 점들이 주인공의 촌스런 캐릭터와 잘 부합되면서 영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인물의 삶과 시대적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한 진정성과 진실성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거듭나는 영화와 세상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거듭난 송우석은 풀뿌리 인권을 위해, 그가 주창한 ‘진정한 국가’를 위해 끝까지 싸워 나간다. 마침내 1987년 그 날에, 이번에는 자신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 그리고 그를 위해 부산 변호사 124명 중 99명이 변호인으로서 참석한다. 영화 초반에 상고 출신에 사법서사나 하는 등기 업무나 한다고, 삐끼처럼 명함 돌린다고 그를 무시하던 변호사들이 그를 위해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웅변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앞이 보인다고, 옳은 길을 걸으면 끝내는 알아줄 때가 온다고...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 이런 게 어딨어요?"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거듭나는 송우석의 이 외침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상식적인 세상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 <변호인>. <변호인>은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로 승화되고 있다. 영화 <변호인>, 그리고 사람 ‘변호인’의 아름다운 완성을 기대한다.
 
 
 
 
 
윤세민 / 경인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언론학박사). 대학에서 스토리텔링, 시나리오 작법 등을 강의하며, 시인이자 문화평론가로서 주로 출판, 방송, 영화 등에 대한 평론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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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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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천사 2014-01-09 11:26:38
영화를 잘 봤지만 뭔가 2%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는데...윤세민교수님의 예리한 해석 읽고 잘 이해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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