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불을 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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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불을 켜세요
  • 양진채 소설가
  • 승인 2014.04.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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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공간을 거닐다 (7)-인천근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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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나는 인천역을 중심으로 자유공원과 신포동 일대, 부두와 이민사박물관 근처까지 모두가 천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숨겨진 보석들이 많았다. 비단 내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타지의 사람들과 그 주변을 누비다보면 이런 곳이 있었다니 새삼 놀라는 얼굴을 하곤 했다.
고백이랄 것도 없지만 소설적 주 무대를 1920-30년대 인천으로 잡아 무성영화 시절의 최고 인기를 누리던 변사(辯士)를 주인공으로 나는 소설을 썼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그 덕분에 무엇이든 옛 냄새가 나는 물건만 보면 단박에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중구 차이나타운 화교 앞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 역시 내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근대박물관’을 찾아간 날은 기온이 뚝 떨어졌고, 바람까지 불었다. 나는 중국인 거리로 들어가기 전, 패루 옆 벽에 붙은 중국인 거리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삼국지 거리, 자장면 거리, 제물포구락부, 조계지 계단를 차례대로 훑었다.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안내도를 따라 ‘인천근대박물관으로’ 걸어 갈 때마다 한 세월씩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인천근대박물관’이 개인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수집품만으로 박물관을 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수집이라고는 어렸을 때 한참 붐이 일었던 우표 수집을 오빠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한 정도가 전부인 나였다. 대통령 외국 순방 시리즈, 다섯 장이나 열 장으로 이어진 숲 그림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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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공사
 
  인사를 나눈 최웅규 관장은 다부지고 고집 센 인상이었다. 누가 뭐래도 한 길을 갈 사람. ‘도 아니면 모’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2층으로 된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수집품들은 좁은 공간에 여백 없이 가득했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고개를 갸우뚱할 물건들도 많았다. 그 진귀한 물건들이 최 관장이 40여 년간 수집해온 자료 중 극히 일부일 뿐이라니 대단했다. 게다가 그 자료들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아낙의 바늘쌈지, 성냥의 변천 과정, 칫솔과 치약, 모자, 그 당시의 카메라, 축음기, 가정용 영사기, 자장면의 발상지 운운하는 ‘공화춘’ 문 양 옆에 세워졌던 현판 등등 옛 것이 넘쳐났다.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보는 동안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나, 홍란이 성냥갑을 접어 붙이고, 기담과 묘화가 지금의 자유공원인 만국공원을 올라가고, 춘식이 배가 들어오는 포구로 내달리는 착각에 빠졌다.
  들어오자마자 유심히 보았던 장식장은 구한말 영국영사관에서 사용한 영국제 대형장식장이었다는 데 흠집 하나 없이, 못 자국 하나 없이 일일이 짜 맞추고 조각한 것으로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게 보였다.
  1970년대에 충남 당진에서 인천으로 이사 온 최 관장은 개항장 거리를 보는 순간 인천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싶은 욕구로 불타올랐다고 한다. 인천은 그만큼 타 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를 가진 매력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모아들인 수집품들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1995년 ‘향토민속자료 생활 용구류 특별 展’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고, 텔레비전에 출현한 것 뿐만 아니라, 미국 L.A에서 ‘그때 그 시절 생활사 자료 展’이라는 주제로 2만점이 넘는 물건을 전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천근대박물관’의 자료 전시품 말고도 두 군데 창고를 얻어 보관해야 될 만큼 많은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데, 전시된 자료를 주기적으로 교체 전시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의 수집품은 국가기록원 나라기획관에 개인자료실을 운영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최 관장이 수집품 하나하나에 쏟은 노력과 애정은 그 누구도 함부로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인천의 역사 자료가 풍부해졌고, 그 가치를 보존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시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치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관장의 수집품은 개인의 수집품 이전에 인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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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을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윤후명 소설가가 펴낸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를 떠올렸다. 생각난 김에 책을 펼쳐보았다.
 
20대 중반, `아지방`이라는 골동 상점에서 도자기 몇 점을 샀다.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 선생의 원고를 받으러 간 길이었다. 그 상점의 주인이던 선생은 초짜인 내게 도자기 강의를 들려주기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특별히 도굴꾼과 거래하지 않고 물건들을 얻는다고 했다. 골동 상점들을 어슬렁거리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못 알아본 물건을 발견해 가져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좀 보게, 이분청의 그림, 피카소를 능가하지."
그 언변에 녹은 나는 박봉의 상당부분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보는 눈이 중요한 게야. 눈."
매혹적이고 무서운 말이었다.
"진짜 가짜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건 간단해. 그 골동을 사다 놓고 오래 지켜보는 걸쎄."
도자기를 오래 지켜보면 결국 싫증이 나는 것과 안 나는 것으로 나뉜다. 싫증나는 것은 가짜일 공산이 크다. 어찌 들으면 근거 없는 논리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곰곰 곱씹고, 또 살아오면서 여러 몹쓸 일 겪기를 오래 하다 보니, 금언이 따로 없었다 <맹자>에 나오는 ‘존구자명(存久自明)’,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말!
 
아무리 지켜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도자기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덧 붙여 ‘존구자명存久自明’ 즉,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말까지 덧붙여 글도 그림도 다시 읽고 다시 봐도 싫증나지 않는 작품, 그것이야 말로 진짜가 아니겠느냐 했다. 그 글귀가 떠오른 것은 자료의 진품이 의심나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고두고 바라보아야 할 것들이었다. 잠깐 들렀다 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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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길에 아쉬워 곽성냥으로 성냥갑 한 통을 기념으로 샀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나는 몸을 웅크리며 성냥갑을 안았다. 문득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 성냥불을 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켤 때마다 따뜻한 집과 달콤한 케이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100년 전쯤의 과거들이 한 장면씩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좋고, 아이의 손을 잡고와도 좋다. 우르르 몰려오는 것보다 하나, 둘, 서넛이 오면 더 좋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장님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모르는 물건은 묻기만 하면 얼마든지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나들이 오듯, 쇼핑 가듯 자주 들러 그 물건들과 눈 맞추었으면 좋겠다. 틈틈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이 물건 저 물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석유난로의 심지를 돋우고 성냥으로 불을 켜던 내 어머니가 보이고, 인선기차표를 내보이며 기차 칸에 몸을 싣는 아버지가 보이고, 맥고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모습을 닮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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