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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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이다
  • 김기용 선생님(인천교육연구소 연구원, 인천석남초교교사)
  • 승인 2014.05.06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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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인천교육 미래찾기(51)

삼립빵.jpg
사진 출처 : 진건초 33회 동창회 카페
 

‘15 대 25’ 라는 비율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대변하는 슬픈 비율.

 

미국 통계국의 발표에 의하면 2012년 5월, 세계 인구는 약 70억 2천만 명(당시 대한민국은 약 5080만 명)이었다. 그중 15%는 너무 많이 먹어서 성인병 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고, 25%는 기아로 인해 극심한 고통 속에 빠져있다고 했다. 이 25%를 수로 환산하니 약 17억 5천5백 명. 대한민국 인구의 34배가 넘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쫄쫄 굶다 쓰러지거나 하루하루 파리하게 야위어 간다는 말이다. 이에 한 사회학자는 이런 탄식을 했다.

“모두가 먹고 남을 만큼 식량을 생산하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굶어 죽는 사람이 존재하는 불행한 세계, 바로 지금!”

 

한 때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다.’ 라는 말을 다들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물정 밝은 사람이야 듣는 순간 벌써 마음속으로 웃고 말았겠지만, 세류에 둔감한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믿었다. 상대적으로 남보다 없으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부끄럽거나 위축될 일은 아니라고 믿고 살았다. 나중에 깨달았다.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란 것, 눈치 없는 것도 느려 터진 것도 하늘이 주신 복이라는 것…. 내가 그렇게 속 편하게 곰단지처럼 지내던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죽네 사네 난리를 치르며 살았던 것이다.

 

둔감하고 미련한 천성은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교직생활 초창기에 나는 전체 가운데 몇 명의 상대적인 ‘없음’을 배려하지 못했다. 수학여행비가 미납되면 나는 학부모에게 전화해서 어렵더라도 참가시킬 것을 강권하곤 했다. 대부분 십여 만원의 여행비를 부담스러워하는 빈곤층이었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여행비를 해결할 수 있는 별다른 도움도 주지도 못하면서 선생의 관점으로만 열심히 설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참가했던 학생이 여행에서 좋은 기억과 배움을 겪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참 몹쓸 짓을 한 사람이다.

 

그 무렵이 거의 15년 전이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교실에서는 비슷한 모습들이 쉽게 눈에 띈다. 저학년 담임인 나는 가끔 과자파티를 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사전 준비물로 과자 한 봉지와 마실 물을 알림장에 써주는 데, 그럼에도 두어 명은 늘 챙겨오지 않는다. 함께 나눠먹으라고 하면 짝꿍이 책상 가운데 먹거리를 둔다. 그런데 어린 녀석들이 눈치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친구의 과자를 편하게 먹지 못하고 얻어먹거나 신세를 지는 듯 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보면 대체적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어본 아이들이다. 아마 집이나 밖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경험이 작용했으리라. 그 외에도 체험학습비가 없어 주눅이 드는 아이들, 방과 후 자유수강권 담임추천을 부탁하며 면목없어하는 부모들도 있다.

 

물론 부모들이 경제력이 부족한 것이지 아이들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부모들의 경제력이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하니까, 아이들도 가난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다. 나는 어릴 때도 유달리 눈치 없고 둔했다고 하는 데, 그런 내게도 얼굴 화끈거리는 기억이 있다. 아마 10살쯤 되었을 때인가….

 

아버지는 삼립빵같은 봉지빵(요즈음은 대부분 제과점 빵을 먹지만)을 슈퍼에 배달하는 일을 하셨다. 커다란 짐자전거의 높은 빵통에 대리점에서 받은 각종 빵을 싣고 새벽부터 온 동네 가게를 돌아다니셨다. ‘노을’이나 ‘보름달’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빵이름들이다. 저녁 무렵 하루 일을 마치시고 돌아오시는 아버지는 가끔 서너 개의 빵을 내놓곤 하셨다. 가게에서 오래 팔리지 않아 곰팡이가 슬어 반품되는 빵 중에서 심하지 않은 것들만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보기에는 멀쩡해서 동생과 나는 여기저기 변색된 부분만 떼어낸 후 먹곤 했다. 특히 나는 단팥빵이 맛이 있었다. 그 시절의 에피소드.

 

어느 여름날, 친구들과 놀다 만난 소낙비로 우리 집 처마 아래에서 잠시 비 그치길 기다리던 참이었다. 친구와 재잘거리다 집안의 빵이 생각이 난 나는 얼른 내와서 친구랑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때 마침 친구를 찾으러 다니던 친구엄마는 뭘 먹느냐 물으셨고, 나로서는 칭찬이 잔뜩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용이랑 빵 먹고 있어….” 입안 잔뜩 우물거리며 말하는 친구 손의 푸르스름한 변색된 빵을 보고 기겁을 한 친구엄마는 번개처럼 낚아채 빗물 바닥에 냅다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은 왜 그렇게 비이잉 돌고 얼굴은 왜 또 그렇게 불처럼 달아오르던지…. 근 사십년 전의 그 기억은 아직도 떠오를 때마다 묘한 감정을 일으키곤 한다.

 

돈을 빌려주면 돈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잃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말마따나 물질의 위력은 대단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돈을 꾸어주는 사람은 우정과 돈 두 가지를 모두 잃는다.”라는 격언까지 있을 정도이니…. 세월이 가도 사람 사는 곳에서는 동, 서양을 불문하고 마음 가치가 대접받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가보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는 가난으로 인한 비극이 속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1주년 다음날, 생활고를 비관한 세 모녀가 서울 송파구 반 지하 방에서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울산에서는 결혼을 앞둔 서른셋의 청년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민하다 차량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버렸고, 휴학 중이던 스물여덟의 대학생은 장기휴학, 취업난 등으로 괴로워하며 자살을 시도했다. 가족들은 해체되고 개인들은 심신이 피폐해지며 파산에 이른다. 도대체 이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15 대 25” 라는 불합리한 비율의 시대. 우리는 가난의 굴레와 구속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가난을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말이다. 가난의 근본 원인이 단지 개인의 게으름과 무지 때문인가?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할 대가는 제대로 주어지고 있는가? 우리나라 국민은 정말 부지런히 일하고 노동시간을 다른 나라와 비교 해봐도 늘 상위권이라는 데, 주변에는 왜 그리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가? 가난함과 부유함이라는 이 소유의 간극은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인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국회의원, 빈민운동가였던 아베 피에르(H.A.Groues, 1912~ 2007) 신부는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라고 말했다. 가난함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웃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일게다. 이웃의 가난을 나의 가난처럼 생각한다면 꼭 나라님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삼성가의 고 이병철(1910~1987) 회장은 죽기 전에 24가지의 질문을 남겼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뭇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다 가는, 그의 최후의 질문 중 첫 번째는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였다고 한다.  

 

피에르 신부의 고백과 이병철회장의 질문을 이제 선생이 된 가난한 빵배달부의 아들이 되뇌여본다.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이다.”

“신이 있다면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연약한 세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지 않는가?”

 

더구나 요즘 우리는 또 다른 대형 참사에 넋을 놓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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