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 맞서 민주화 앞장서다 추방당한 시노트 신부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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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 맞서 민주화 앞장서다 추방당한 시노트 신부 선종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12.2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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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부주교로 한국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

1975년 강제추방된 지 14년만인 1989년 4월에 한국에 다시 입국한 시노트 신부
([여원] 1989년 5월호,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사건(이하 '인혁당사건')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다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추방됐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James Sinnott, 한국명 진필세)가 12월 23일 오전 3시 30분 향년 85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60년 8월 29일 한국에 처음 입국한 시노트 신부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일하던 중 인혁당사건을 접했다. 그는 이 사건이 고문 등으로 조작됐다고 폭로했고 사형선고 당한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씨 등을 살리려고 유가족과 함께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 관계자들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1975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됐고, 이에 항의하던 시노트 신부는 그해 4월 말 당국의 체류기간 연장 불허로 강제 추방당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민주화운동연표>에 따르면, 시노트 신부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의 개선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삼선개헌 무렵 박정희 정권과 그들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50인 위원회”(50인모임)부터였다고 한다. 이후 이 모임은 월요일마다 정례화되면서 “월요모임”으로 정착되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에 대한 소식을 나누며 지원방법을 찾아 실천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유신헌법이 공포되기 이전부터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때로는 협박을 당했다. 긴급조치 1, 4호와 민청학련사건 이후, 국민적 저항이 점차 커지자 박정권은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입국과 체류가 가능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취약한 조건을 이용하여 그들에 대한 탄압을 시도했다.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추방을 당한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설립 당시의 명칭은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설립한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 목사였다. 1961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오글 목사는 1974년 12월 14일 인혁당 사건의 문제점을 처음 공식적으로 발언해 외국인 선교사 중에서 처음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오글 목사에 이어 두번째로 강제 추방된 인물이 바로 시노트 신부였다. 시노트 신부는 인천교구 부주교로 있으면서 1974년부터 한국사회의 억압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인권유린 문제에 신앙적 입장에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고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 회장의 직분을 맡아 활동했다.

1975년 조선동아투위 기자들의 활동을 지원 격려하였으며, 1975년 2월 24일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있었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인혁당사건 진상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인혁당 사건의 공동조사를 제의하는 기자회견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시노트 신부의 활동의 계속 이어지자 박정권은 1975년 3월 25일 “내국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단체들을 이용하여 국내 혹은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리고 때마침 1975년 4월 14일 시노트 신부가 체류기간 연장을 신청하자 법무부가 이를 불허해 4월 30일까지 한국을 떠나도록 통보했다.

오글 목사의 추방령과 집행에 비해 시노트 신부는 다소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시노트 신부 추방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기도 했다. 천주교 주교단의 진정서, 메리놀회 한국지부의 항의성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서와 기도회 등이 잇따랐다. 그러나 시노트 신부는 결국 4월 30일 한국국민과 동료 사제, 목사들에게 보내는 성명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1989년 4월 4일, 추방된 지 꼭 14년만에 시노트 신부는 경북대에서 열리는 인혁당 15주기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이후 시노트 신부는 2002년 한국에 재입국해 선종시까지 생활해왔다. 2004년 10월에는 <1974년 4월 9일>이란 책을 내 인혁당 사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남겼다. 
 


2002년 민주화기념사업회 주최 간담회에 참석한 조지 오글 목사(오른쪽)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천주교 인천교구 부주교로 인천에서 활동 

시노트 신부와 인천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얼마 전 출간된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 보면 시노트 신부의 활동의 일단과 함께 인천과 연관된 구체적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74년 11월 11일 천주교 인천교구 부주교였던 시노트 신부는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계속된 구속자 석방을 위한 단식 기도가 끝난 후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 30여 명과 함께 종로3가까지 가두 행진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11월 21일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형을 받은 구속자 가족 19명이 종로구 소재 미국대사관 앞뜰에서 ‘더이상 못참겠다 구속자 석방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다 15분 만에 경찰에 전원 연행돼 경찰버스에 실리자 이에 항의하며 시노트 신부도 경찰버스에 함께 올라타고 이동했다고 한다.

이에 법무부 인천출입국관리소에서는 11월 23일과 11월 29일에 두 차례나 시노트 신부를 소환해 입국목적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전국도시산업선교회 소속 목사와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 등 30여 명이 12월 13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소회의실에 모여 천주교 인천교구 부주교 시노트 신부와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에 대한 소환 심문은 정부의 종교탄압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지시를 받은 법무부 인천출입국관리소는 인혁당사건 관계자 사형 집행 직후인 1975년 4월 14일 시노트 신부에 대해 종교 이외의 활동을 하지말라고 3번째 경고를 하고 나서 4월 25일 체류 연장을 불허하고 30일까지 출국하라는 출국지시서를 보냈다.

이에 천주교 인천교구에서는 4월 29일 시노트 신부를 위한 기도회를 인천 답동성당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나길모 주교와 시노트 신부 공동 집전으로 거행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4월 30일 시노트 신부는 출국 직전 ‘내가 사랑하는 한국국민과 복음을 전파하는 동료 사제들과 목사님께 드린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한 후 오후 7시 출국했다.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는 강제추방 이후에도 해외에서 계속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2002년 국내에 정착한 이후에도 시노트 신부는 인천을 자주 찾았고 2004년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영종도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함세웅 신부 번역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온 곽한왕 미추홀미디어시민위원회 공동대표는 "인천교구의 부주교로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시노트 신부의 선종을 계기로 인천에서 그에 대한 연구와 선양사업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노트 신부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25일 오후 3시 입관식에 진행됐다.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1시 경기 파주시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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