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효과와 학교 부적응 - 이상권 장편소설 [난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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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효과와 학교 부적응 - 이상권 장편소설 [난 할거다]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2.2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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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15.
 
학교가 교육을 하는 곳이라기보다 평가하고 선발하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명히 거꾸로 선 건데 너무 만연하다 보니 이제는 문제라고 여기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교육은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진정한 교육자를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클 때에는 가정 형편까지 뛰어넘어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무모한(?) 선생님이 꽤 계셨다고 기억합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사는 학생을 평가하여 골라내느라 분주합니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학생을 받아서 성공의 영광을 함께 나누려는 욕심만 그득한 것 같습니다. 이러니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 아니라 골라내고 솎아내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학교에서는 멀쩡한 아이도 문제아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기범의 [문제아]가 이 문제를 다룬 이야기로 가장 유명할 겁니다. [문제아]가 단편이라 좀 아쉬운 면이 있는데 이런 문제를 다룬 좀 호흡이 긴 이야기를 찾는다면 [난 할거야]가 적당할 거라고 봅니다. [문제아]가 중학생용이라면 [난 할거야]는 고등학생이 읽기에 적당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문제아]의 주인공 ‘창수’는 할머니 약 살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선배 학년들한테 맞선 일로 문제아 낙인이 찍히고 [난 할거야]의 주인공 ‘시우’는 도시 학교로 전학 오면서 잘 적응하지 못해 문제아로 낙인찍힙니다. 그 사연을 들어보면 혼내고 벌주어야 할 만큼 삐뚤어진 아이도 아닙니다. 한 번 그렇게 낙인이 찍히면 악순환을 거듭하여 헤어날 수 없는 문제아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걸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아를 다루는 소설은 대부분 낙인효과(스티그마 효과)의 비교육적 측면을 그리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쉽게 얘기해서 한 번 찍히면 헤어 나오기 참 힘든 게 학교생활의 비정함이라는 겁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교사의 문제아 낙인만 있는 건 아닐 테지만 이 요인만큼 결정적인 것도 없을 듯합니다. 성적이 너무 낮거나 친구가 없어서 학교 다닐 맛이 안 나는 수가 있는데 선생님이 '저 놈은 안 돼' 하는 것만큼 학업 중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도 없을 듯합니다. 성적으로 경쟁이 심하다 보니 ‘나는 안 돼’ 하는 부정적 자의식을 갖는 학생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골치 아픈 아이’, ‘문제아’로 낙인찍혀 무기력과 부적응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 늘 시험 결과로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들으니 점수가 좋으면 스트레스로 공부가 점점 싫어지고, 점수가 나쁘면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니 모든 애들이 문제아가 되는 겁니다.
 
[난 할거야]의 주인공은 시골에서 도시로 진학해 온 학생으로 열등감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학교는 비교 평가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곳이니 당연히 부정적 자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시골 학교에 비해 도시 학교는 이 문제가 좀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근처 학교에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학군 문제는 그 단적인 예입니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빌라촌에 사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생활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무튼 주인공은 고등학교 생활 첫날부터 선생님한테 찍힙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오기도 했고 고등학교 첫날이라 너무 불안했는지 갑자기 글자가 안 보이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왜 그런지 살피기는커녕 일단 두들겨 팹니다. 한 번 이렇게 호되게 당하니까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걸리고 두들겨 맞으니 완전히 문제아가 되어 버립니다. 당연히 성적도 안 나오지요. 학교로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골칫덩이인 거지요.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다 땐다고 합니다. 한글 정도는 기본이지요. 우리 클 때에는 중학교에 들어가야 배웠던 영어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운답니다. 선생학습을 금지한다는 법까지 만들었지만 좀 있는 집 애들은 어떤 식으로든 앞서 나갑니다. 그러니 가난한 집 애들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열등생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려고 왔는데 뭘 배웠냐고 나무라면 아이는 어떻게 하란 건지 답답할 수밖에 없지요. 넉넉한 집 애들은 귀염을 받고 가난한 집 애들은 천대받기 일쑤입니다. 선생님들 마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적이 좋은 애들을 받은 선생님들은 뭐든 수월합니다. 그러니 지금 제대로 안 되는 건 다 질이 떨어지는 애들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투덜거리기 쉽습니다. 가정교육 안 된 애들은 가르치기도 몇 배 더 힘들고 애써 가르쳐봐야 티도 안 난다고 야박해집니다. 점수 일 점이라도 더 올리는 교사가 좋은 평가를 받으니 쓸데없이 가정방문 갈 일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불우한 형편을 들여다보는 건 참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정작 참다운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역설로 인해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나 점점 교육으로부터 소외되어 갑니다. 애들이 공부를 재미없어 하니 점수로 옭아매고 갖은 벌로 다그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겁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요. 그런데 공부가 힘겨운 게 당연하지 즐거울 리 있겠냐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뒤집힌 상식(?)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늘 시험 결과 등수로 비교당하고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공부가 재미없는 게 당연한데 어른들은 공부가 원래 그런 거라고,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윽박지르기만 합니다. 학교의 학력 향상 의지와 학부모의 교육열이 아이의 공부를 방해하고 있다는 걸 잘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른의 열정이 아이를 문제아로 만든다고 합니다. 문제아로 낙인찍히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며 루저(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건가요? 주인공 ‘이시우’는 결국 벗어납니다. 그냥 벗어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훨훨 날아오릅니다. 고치를 뚫는 고통을 겪은 나비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그러니 ‘이시우’에게 문제아 낙인은 오히려 은총이 되는 겁니다. 그에게는 모든 고통과 비극이 종내 찾아올 영광과 자유를 장식할 이야깃거리로 잉태됩니다. 그는 진정한 삶, 사연이 있는 멋진 삶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삶은 진실합니다. 이 진실성은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바꾸어낼 큰 힘으로 쌓여나갈 겁니다. 아기 때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늘 귀염을 받은 아이가 삶의 진정한 이면을 보게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천덕꾸러기인 아이가 환경의 굴레를 뚫고 자신의 삶을 일구어내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정한 삶은 그 사이 어디쯤인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시우’로 그려진 작가 이상권의 자전적 성장기에, 스스로 몰입하는 공부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시우가 가출하였다가 돌아와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나는 곧장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그만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버렸다.

“엄마!”
“오매, 이놈의 새끼!”

놀랍게도 어머니가 부엌에 서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내 눈물 그릇은 이미 엎질러지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내 얼굴을 자꾸만 어루만졌다.

“얼굴 좀 보소. 그래, 니가 돌아올 줄 알았다. 며칠 전에 느그 선생님 만나고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뭔가 삭혀진 말들을 뱉어 내려다가 참고는, 다시 내 얼굴을 요모조모 훑어보았다.

“시우야, 어매는 말이다, 느그 선생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내 자식을 함부로 나쁘게 말하지 마씨요. 내 자석은 절대 그런 학생이 아니요. 선생님이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요. 그놈은 아직까지 누구하고 쌈박질 한 번 안 해 본 놈이요. 술이요? 술이야 어려서부터 단술이랑 막걸리 먹어 봤응께, 맘이 고달프면 한두 잔씩 할 수도 있는 것 아니요. 그것이 뭣이 문제요.’ 시우야, 나 그렇게 말해 버렸다. 너도 당당해야 써. 암, 항시 말이다. 어매는 항시 너를 믿는다.”

조금도 떨림 없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다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서 밥을 먹자고 하였다 어머니는 도깨비방망이를 든 사람처럼 뚝딱뚝딱 음식을 차려 냈다. 밥상이 금세 음식으로 가득 찼다. 나는 어머니의 살 냄새 나는 밥을 두 그릇이나 꾹꾹 쟁여 넣었다.

어머니는 더 말을 풀어놓지 않았다. 선생님들 이야기도, 고향 이야기도, 빈 방에서 애타게 자식을 기다린 시간의 아픔에 대해서도, 책상 위에 교과서보다 많이 쌓여 있는 원고지에 대해서도. 그런 여백 사이로 졸음이 쳐들어왔다. 나는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깊은 잠이었다.

문살을 환하게 밝히며 새어 든 햇살의 간질임에 못 이겨 눈을 뜨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순간 고향집에 와 있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어머니와 겸상하면서 새삼 나라는 생명체를 이 세상으로 보내 준 숭고한 얼굴을 보았다.
내가 어머니 살을 먹고 살아왔구나!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물줄기가 거슬러 오른다.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일어난다. 나는 화장실에 앉자마자 끄억끄억 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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