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은 부자, 조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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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은 부자, 조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 이한수
  • 승인 2016.01.1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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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⑦KBS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 5부작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크버그가 회사 지분의 99%를 사회에 기부하고 세금 혜택도 받지 않겠다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규모는 자그마치 50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주 낯선 이야기이지만 미국에서는 종종 들을 수 있는 미담인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20년간 40조 원이 넘는 액수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부자와 권세사가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니 참 건강한 사회이지 않습니까. 이런 전통을 가진 사회는 든든한 공동체로 번창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미담이 구전되고 전통으로 자리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눈 씻고 봐도 존경받을 만한 권세가를 찾을 수 없으니 이 나라가 참 창피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우리 역사 속에는 그런 존경받을 만한 권세가가 없었던가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모리배들이 덮어 감추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제(귀족의 사회적 책임)의 대명사 이회영 선생의 일대기를 들여다보면 서구의 부자 얘기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 집안은 참 대단한 가문입니다. 대대로 판서(장관급)와 정승(총리급) 벼슬을 거르지 않았더군요. 재산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서울의 노른자,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 YWCA 건물 일대가 다 이회영 집안의 소유였고 그의 형 이석영은 조선에서 몇 번째 드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경술국치(1910년)에 6형제 온 가족이 서울 명동의 노른자위 땅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모든 재산을 바치는데 그 재산의 규모가 자그마치 2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급하게 처분하느라 헐값에 처분하여 지금 돈으로 약 6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갖고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항일 지사들 대부분이 이회영 선생이 세운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되새기는 일은 우리 사회를 좀 더 아름다운 사회로 가꾸기 위한, 바른 전통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회영 집과 가까이 있는 상동교회의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입니다. 이회영은 김구, 이동녕, 이동휘, 이상설, 신채호, 최남선, 주시경, 이상재, 이승만 등과 함께 다닌 감리교 상동교회에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들 중 특히 이상설과 가까웠는데 이 둘은 1905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동교회 동지들을 주축으로 항일 비밀 결사체 신민회를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지만 국운은 점점 더 기울어 가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은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형제들을 설득하여 만주로 망명합니다. 6형제가 모두 뜻을 한데 모아 전 재산을 처분하였고 해방된 노비들도 대부분 따라 나서게 됩니다. 그는 노비들에게, 이제 동등한 인격체이니 만큼 주인 모시듯 굽신거리지 말 것을 부탁하고 그들에게 존대를 하였으니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들은 대부분 만주로 동행해서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군이 됩니다. 




만주 길림성 유하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이 스스로 경작을 하며 군사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원봉의 의열단도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고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부대의 군인들도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합니다. 만주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회영은 이렇게 독립운동가를 길러내고 고종이 파견한 이범윤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설, 이범진(이범윤의 동생이자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아버지) 등 여러 항일 지사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간도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울 기반을 다집니다. 고종은 이회영의 망명 건의에 긍정적으로 화답하고 망명 정부 청사를 구입하기 위한 자금도 마련해 주었는데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고종은 독살당하고 맙니다. 일제 친일 매국노들의 만행은 독립 투쟁의 기운이 동아시아 전역에 휘몰아치도록 만듭니다. 1918년 만주에서 일으킨 무오독립선언, 1919년 일본 한인들이 일으킨 2.8독립선언, 연이어 조선 본토에서 휘몰아친 3.1만세운동, 들불처럼 일어난 비폭력 투쟁은 일제의 총칼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독립투사들은 중국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가 무장 투쟁을 펼치게 됩니다.

중국 본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간도 지역의 독립군은 급속하게 세를 확장하여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립니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간도, 연해주 일대의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데 간도 지역의 경신대참변으로 3만 이상, 연해주 지역의 4월참변으로 5천 이상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고한 조선인이 2만이나 학살된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만주의 독립군은 일제의 대학살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고 연해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한 독립군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복잡한 정세에 휘말리게 됩니다. 적군(볼셰비키), 백군(멘셰비키), 일본군 사이에서 복잡하게 얽혀들고 결국 자유시참변이라는 끔찍한 내전으로 조선 독립군은 붕괴되고 맙니다. 이 사건 이후로 독립 운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임시정부도 내분을 겪게 되며 임정의 분열상에 좌시할 수 없어 이회영 신채호 등은 임시정부 떠납니다.

이회영은 임시정부의 국무원장으로 추대되기까지 했는데 왜 이를 이를 거부하고 임정을 떠났을까요. 그는 인물 중심 임시 정부 조직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걸출한 영웅의 위대한 업적보다 민중의 대동단결로 진정한 민주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신문에 낸 논설에 그 정신의 일부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대영웅이 대국민만 같지 못하다 함은 천만년의 격언이요 진리가 있는 보훈이로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상고컨대,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이회영은 당장 독립운동 지휘부가 필요한 것이지 정부를 세우는 게 급한 게 아니라고 봤으며 인물을 신격화 우상화하여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한 파벌 대립으로 권력 투쟁에 빠지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아나키즘의 이론에 의거하여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한 결과 얻은 생각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논리와 닮게 된 것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회영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인물 중심의 임정은 이후에 파벌 싸움으로 분열을 거듭하게 됩니다. 신채호 선생이 임정 회의석상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쏘아붙인 말은 임정의 안타까운 실상을 짐작케 합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따지고 보면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나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해방 후 이승만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미군정과 함께 친일파를 옹호하여 권력 기반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은 이회영이 임정을 떠나 북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아나키스트 비밀조직 흑색공포단을 만들고 1931년 천진항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 천진 일본 영사관 폭파 의거를 일으키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할 때까지 1년 남짓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는데, 조선인 일제 경찰, 일본인 신문 기자, 친일 매국노 사이에서 밀약하는 미모의 아나키스트 등의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짜내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집니다. 권력에 빌붙어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가 판치는 조선의 현실과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자유연합(아나키즘) 사상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 참 악독한 친일 매국노로 김판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일본 특무대 소속으로 이회영을 체포하라는 밀명을 받고 이회영 가족을 회유 협박하고 흑색공포단 단원을 추적합니다. 흑색공포단 미모의 여성 투사 홍정화라는 인물은 어릴 때 매국노 김판출에 의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일제에 대해 원한에 사무치게 되는데 이들이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일제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동족 매국노의 추적을 피해 가면서 고난의 투쟁을 펼쳐 나가는 이회영 선생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한데 선생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면 가슴이 저립니다.



조선에서 몇 번째로 손꼽히는 부자였던 이석영이 중국 상해의 누더기 판잣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장면입니다. 이회영의 둘째형 이석영, 이 분도 참 대단한 분입니다. 동생 이회영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떠난다고 하니 전 재산을 처분하여 보태줍니다. 그리고 본인 가족은 만주에서 거지처럼 살았지요. 그의 아들 이규서는 이런 집안 내력에 대해 분개합니다. 자기 가족이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데 누구 하나 알아주느냐고 울분을 토합니다. 결국 삼촌 이회영를 밀고하여 죽게 만들고 말지요. 이회영의 가족도 온갖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치료를 못해 아들은 죽고 딸들은 빈민구제원에 맡겨지기도 했답니다.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이시형은 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동하여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까지 했지만 그의 후손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이게 부끄러운 이 나라의 역사입니다. 이완용은 25억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회영 집안은 600억 재산을 모두 나라를 위해 바치고 그 후손은 전부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회영이 만든 아나키스트 조직 흑색공포단에는 특이하게도 조선인,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소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민족주의자 김구와는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요. 드라마가 일본인 기자 기무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것은 흑색공포단의 아나키즘 철학과 국가를 뛰어넘는 세계 평화 사상을 드러내는 설정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냥 상상에 지나지 않는 허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인 아나키스트로 오스기 사카에라는 실존 인물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자는 여운형 선생, 김원봉 선생과 가까웠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국적을 초월한 연대 투쟁을 온몸으로 보여준 자입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당시 이회영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삶을 정확하게 잘 그려내었다고 봅니다. 

극중 서술자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는 조선총독부 실세 기무라 엔토의 아들로 1905년에 조선 경성에서 태어나 조선어에 익숙한데 그가 종군 기자를 자처하여 상해로 와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이회영을 취재하면서 일제의 아시아 침략에 맞서 싸우는 아나키스트들의 헌신적 투쟁에 공감을 하고 이회영 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됩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정현섭, 백정기, 홍정화는 실존인물입니다. 특히 홍정화는 조선에서 이회영 집안의 노비였는데 함께 만주로 갔고 아비가 죽고 나서는 이회영이 딸처럼 키웠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자 뜻있는 선비들이 자결을 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 지사의 진면목을 보여준 일이 많았는데 홍정화의 삶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6개월만에 상해까지 진격해 들어오고 전승기념식을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게 되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윤봉길 의거에 의해 일본국 대장이 즉사하고 일본군 장성 다수가 중상을 입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윤봉길은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는데 홍커우 공원의 거사는 윤봉길 의사만 준비할 게 아니었습니다. 흑색 공포단의 정현섭, 백정기도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입장권을 확보하지 못하여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이회영은 만주로 떠납니다. 양세봉의 동북항일의용군에 결합하기 위해 만주로 가는 도중 대련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다가 죽었습니다. 

김원봉이 아나키스트 의열단을 군사조직 조선의용대로 전환하였듯이 이회영 또한 아나키스트 흑색공포단 활동에서 군사조직 대일 항쟁으로 변신하려고 했다고 봅니다. 연해주의 끔찍한 자유시 참변을 전해 듣고, 동지 조소앙으로부터 러시아 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확인한 그는 사상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그 어떤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연합주의(자유공동체주의)를 내면화 했습니다. 그가 동지 조소앙과 김종진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면 이회영 선생의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인에게 빈부의 차이가 없는 균등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처럼 자유가 없는 인간생활이 가능할까? 그리고 인간생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평등 생활이 하루에 세 끼 밥을 균등히 주는 감옥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 상호간에는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가 있어서는 안 되네. 자유합의로써 운동가들의 조직적 희생으로 독립이 쟁취된 것이니까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제를 확립해야 하고 아울러 지방자치체들의 연합으로 중앙정치기구가 구성되어야 한다.”

근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삼한갑족으로 누대에 걸쳐 권세를 누린 집안 출신의 그가 조국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운 60 평생이 18세기 이후 근 2세기에 걸친 서구 근현대사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을 알면 누가 우리 역사를 오욕의 역사라 하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역사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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