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잘 보이지 말자!
상태바
그들에게 잘 보이지 말자!
  • 이설야
  • 승인 2016.02.12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로 쓴 인천(3) - 김영승의 시
 
1987년, ‘반성’이라는 낯선 시적 영토가 출현하였다. 이 영토는 김영승이라는 한 ‘도덕적 천재’에 의해 전위적으로 실험되었다. 인천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1980년대 해체시의 선두 주자인 김영승 시인(1959~)은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여, 이듬해인 1987년 첫 시집 <반성>을 출간하였다. 그는 인천의 도시 산업화라는 물결에 휩쓸려, 참혹한 젊은 시절을 구월동 골방에서 보냈다. 첫 시집은 8년 가까이 쓴 1,302편의 ‘반성’ 연작에서 82편만 추려 엮은 것이다. 그의 지적인 통찰은 거대 담론이 아닌, 미시적인 일상을 탐색하여 비속어와 산문적 진술로 시집에 잘 녹아 있다.

김수영의 계보를 잇는 시인 김영승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비시적(非詩的)인 언어와 전복적인 진술을 통해 보여준다. 김수영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라고 고백했다면, 김영승은 “왜 그 모든 사랑엔/ 피 냄새가 나는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첫 시집 <반성>이 나온 1987년은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던 시기로, 민중시(노동시)와 더불어 서정시와 해체시가 시단을 이끌었다. 특히 김영승의 <반성>은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황지우의 <나는 너다>와 같은 시기에 출간되어 해체시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세계의 징후를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반성’ 연작은, “푸줏간 같은 도시의 진열장에 걸린”, “빨간 고깃덩어리”가 “빨래처럼 널려 나부끼는/ 열악한 육체와 영혼의 평면도”(‘반성 · 序’)이다. “일부러 노력하여 병신이 되어 가는”, 단수인 <나>와 복수화된 <나>들의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불온한 전위시를 쓰는 시인은 “두 개의 빤스를 입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반성 1’)다. 그래서 그 힘으로 지금도 인천의 동춘동 어두운 방에서 시를 쓴다.
 

시인은 반성하지 않는(못하는) 자아를 반성한다. 자신의 무기력한 일상과, 그 일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시인은 반성하지 않고, 반성을 가지고 논다.

그는 단지 선풍기의 스위치를 발로 눌러 끄는 것에 대해,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해한다. 그는 “동물에겐 도대체/ 말썽이 없다”(‘반성 659’)고 본다. 지렁이나 코끼리, 그리고 “붕어나 참새 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는 비애를 안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고, 그러나 이것은 반성이 아니다. 그들에게 잘 보이지 말라!는 반어적 표현이다.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반성 99’), 늘 없어질 존재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인은, 반성을 하고 “빨리 사람이 되고 싶”(‘반성 108’)지만, 사람이 되어 “뭔가를 자수”(‘반성 83’)하고 싶지만, 아직 반성이 덜 끝나서 사람이 되지 못해서, 지렁이나 쥐에게 자조적인 연대의식을 느낀다. 가끔은 “너의 기생충”이 되고 싶고, 암캐인 밍키의 남편이 되기도 한다.
 
김영승 시인은 자신이 통과해 온 1980년대를 거대한 똥통으로 인식한다. 거대한 똥통인 세계에, 그가 빠뜨린 슬리퍼는 멀쩡한 슬리퍼. “어머니도 신고 형도 신는 슬리퍼”인데, “한 귀퉁이가 뜯어진 왼쪽 슬리퍼”가 아닌 멀쩡한 슬리퍼를 똥통에 빠뜨렸다. 그 멀쩡한 슬리퍼를 건져낸 후 시인은 고민한다. “뜯어진 걸 꿰맬까/ 아니면 한 짝마저 뜯어 버릴까//그랬던 것 아니냐/ 떠나간 아내야,//잠시 생각”(‘반성 827’)하는 그의 고민은 너무 사소하지만, 이 시의 끝에 매달린 페이소스는 힘이 세다. 이 슬리퍼는 시인의 간절한 현실이다. 그는 가끔 말을 잃고 구관조 앞에 서서, “구관조의 말을 흉내”(‘반성 627’)내고, 자신의 말이 아닌 구관조의 말을 한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 주신다”(‘반성 608’)

 
결국 시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자유를 얻는다. 신이 그를 포기한 상태. 신도 놓아버리고, 자신도 놓아버린 상태. 그것은 시인에겐 축복이다. 온전히 시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다.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主조차도 놓아주는 시간이야말로 온전한 반성의 순간이 아닐까?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는 비굴한 얼굴에, 세상의 그 모든 패악에 ‘반성’의 시를 쓰자! 그들에게 잘 보이지 말자!
 
 
 반성 156
김영승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 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휜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