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작은 금고, 용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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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작은 금고, 용현2동
  • 유광식
  • 승인 2016.03.25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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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소요] (1) 유광식 / 사진작가

작년 가을, 남구 용정근린공원 내에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활용한 마을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인데, 누가 들으면 무언가 할 정도로 그 의아함이 샘솟을 것이다. 토지금고는 인천 남구 용현2동과 5동을 지칭하는 옛 지명이다. 인천은 지난 100년 전부터 바다매립이라는 물의 역사가 뭍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한다. 지금부터 얘기할 용현2·5동 또한 원래는 바다의 뻘을 지난 시절 땀 뻘뻘 흘려 만든 간척지인데, 이곳에 소금밭을 만들었다가 해방 이후 서민 주거지로 정착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다. 토지금고가 현재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고 용현2·5동은 여전히 토지금고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소금으로 일군 땅이다.
 
4년 전 쯤 우연찮게(어디든 그렇다.) 발을 디디게 되었다. 운행은 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수인선로와 오밀조밀하고 위태로운 주택들. 진입 초기에도 빈집이 있었으나 2/3 이상은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제1경인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2동과 5동이 위치해 있다. 작가는 2동 지역을 먼저 살피게 되었고 지금은 5동 지역을 살피고 있다. 19세기 보들레르 같은 산보객이 되어 도시의 관상을 관찰하며 현재의 속성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도시는 너무 빠르게 자극하고 작가는 애써 안전거리를 염두하며 묵묵히 걷는다. 길옆 텍사스촌과 물텀벙 거리, 무수한 철학관(점집) 그리고 철도(역), 문구점, 이미용실, 중화요리집, 치킨집, 목욕탕, 세탁소, 교회, 구멍가게, 쌀상회 등 작년 말 인기리에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모습이라 해도 믿을 만한 곳이다. 한 철도 건널목 한쪽에는 소금을 파는 커다란 공장이 있었는데 나중에야 과거 염전의 제염소가 가까이 있었음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쳤다. 한편 바다 위에 얹혀졌던 한 쪽(용현2동) 마을은 지금쯤 어디까지 떠내려 갔을까?
 


용현2동, 2013, ⓒ유광식
 

2012년만 해도 아이들이 골목 따라 보이고 야채장수의 컥한 소리가 마을방송이었던 때였다. 겨울이면 협동이 아니면 힘들었을 커다란 눈사람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결국은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으로 다음 날 아침 넘어져 있기 일쑤다.) 점집의 슬레이트 지붕 처마 아래로 신심의 정도인지 가히 1m도 넘는 고드름을 보았다면 믿겠는가? 또한 이 곳엔 분명 어렵게 그리고 열심히 사셨던 나의 부모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을 이력으로 보자면 여기서 자란 7~80년대 아이들은 현재 또 한 세대를 책임지고 있는 또래일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가 마을길을 슈웅~!하고 가더라도 가끔 옛 자전거의 따르~릉! 경적이 정겹던 곳. 2층 단독주택과 빌라, 연립아파트, 블록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모양내며 지냈던 곳은 차츰차츰 이사가 늘었고 거닐던 길에 보초와 경비차가 생기는 등 조금씩 옥죄어 오게 된다. 2014년부터는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의 따뜻했던 부피가 고스란히 차가운 부피로 이월되었고 작년에는 전면 철거작업(용마루 지구)이 진행되었다.

 

용현2동, 2012, ⓒ유광식
 

2002년 서울서 인천 간석동으로 이주한 필자는 줄곧 인천의 실재감을 조망해 왔다. 용현동도 그런 지역 중 하나로 3년 여의 답사와 기록이 뒤따랐다. 수인선이 최근 옛 라인을 따라 송도역에서 인천역까지 지하로 완공되었다. 용현동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굴곡 없는 시절이 없었는데 현재 토지금고라는 금고 속에만 가두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다. 수인철도 역명에서는 용현이 빠지고 인하대가 밀려 오며 기억에 변곡이 생기지만 조만간 애처롭게도 자연스러울 것임도 안다. 한편 토지금고시장은 살림을 도맡아 마을을 살찌우고 있으나 지역에서는 그저 어느 동네의 시장구석이라는 말이 도는 게 엿보인다. 얼마 전 시장을 지나는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다른 곳에서 오셨는가 토지금고가 뭐여무어여 하는 소리가 잔잔히 가슴에 남았다. 용현2동은 5동에 비해 마루턱이 존재한다. 옛날 바다에 접한 야트막한 산이었을 이 곳에 집이 들어서고 아이들 성장의 함성이 뒤섞였을 적의 이야기가 왕소금이 되어 함께 이사 갔기를 바란다. 혹시 공간의 기억까지 함께 옮겨 줄 이사짐센터는 있는가?

 


위와 아래: 용현2동, 2013, ⓒ유광식
 

2015년 용현2동 지역은 둘레에 펜스가 세워지고 사마귀 같은 포크레인들이 집을 부수기에 더 이상은 거쳐 지날 수 없었는데, 남아지고 담아 논 사진을 정리할 때인듯 싶었다. 최근 무작정 나가 본 마을의 터엔 무섭게 파괴되어 먼지 날리던 풍경이 정리되어 매끄러운 붉은 땅으로 아니 불판이 되어 내 눈 안 파노라마로 놓여졌다. 간석동 시절 간석자유시장 옆 마을이 허물어져 갔을 적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2~30층 높이의 아파트 단지가 새로 생겼는데 어찌된 이유인지 그 곳은 마음 속 지도 까만 구역이 되고 말았다.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좁은 구역을 나누어 지내고 있기에 공간을 매개로 지내기가 쉽지는 않다. 결국 자본의 침투로를 따르기 마련인데 작가는 심상의 흐름을 우선하기에 전해 오는 분위기나 지리적 위치, 역사, 일상산업의 분포 등을 꽤나 궁금해 하며 산다.
 


용현2동, 2016, ⓒ유광식
 

유년이었던 80년 대 초 작가의 마을은 10채(세보니 8채)도 안 되는 작은 시골이었다. 어린 아이 눈으로는 낡은 의아함과 미지가 존재했던 공간이었을테다. 전제조건이 조금 다를 뿐이지 도시라고 다른 양상의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시골마을은 나무가 말라가듯 집도 말라 무너지는 시간이라는 자연속성이라도 있다지만 도시는 이 속성을 방관치 않고 하물며 파괴적이어서 과정상 많은 (공동)마찰과 (장소)상실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에게 별다른 연고가 없는 용현2동이지만 거닐었던 지난 시간을 어찌 내칠 수 있을까? 많은 집들이 화장된 콘크리트 무덤지 중앙에 달랑 남은 교회 하나, 종교 하나. 옛날 아이들의 종교였던 동네닭집은 과연 어디로 내쫓겼단 말인가? 조만간 이 종교보다 거대하고 거만한 콘크리트 나무가 봄비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라 날 것이다.



용현2동, 2016, ⓒ유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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