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갈 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수갑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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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갈 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수갑차고..."
  • 김연식
  • 승인 2016.04.0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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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함께여서 낼 수 있는 작은 용기 - 김연식/그린피스 항해사

<2015년 10월 함께 승선한 친구들. 왼쪽부터 빅토리아(아르헨티나), 텍사스(캐나다), 필자, 디에고(칠레)>


# 혼자라는 착각

-살아야 한다. 이제 혼자 살아내야 한다.

에스페란자에 승선한 첫날, 침대에 누워 혼잣말로 속삭였다. 지금부터 생면부지의 사람들 속에서 남의 언어를 쓰고 남의 음식을 먹으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동생이라든가, 한참 양보해서 강원도 출신이니 충청도니 경기도니 하는 식으로 범위를 넓혀도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전 세계 15개국에서 온 낯선 사람들. 그리고 유일한 한국인인 나. 이제 그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

어디 하나 편한 게 없다. 음식을 먹을 때 코를 푸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것인지, 이성에게 포옹하는 것이, 연장자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이, 동료의 침실에 찾아가는 것이, 담배 한 개비 얻어 피우는 것이, 자리를 뜰 때 인사 없이 사라지는 것이 무례하고 기분 나쁜 건지 아닌지 도통 알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불편하다.

갓 군에 입대해서 짐 가방을 메고 선임병들이 기다리는 내무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선임병들이 죄다 영어를 쓴다. 피부색도 제각각, 고향은 정말이지 제멋대로. 나는 그 앞에 잔뜩 긴장해서 얼어있다. 선원들과 일일이 인사하는 것조차 걱정이었다.

-그래, 그래. 정신 차리자. 입술엔 가벼운 미소, 부드럽게 양끝을 올리고, 눈빛은 힘 있게, 목소리에는 적당한 흥분과 반가움을 담고,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되 손은 느슨하게 잡고 가볍게 위 아래로 흔든 뒤, “아엠 연식, 프롬 싸우쓰 코리아.”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 잘 할 수 있어!

나름 속으로 연습했지만 기대와 달리 내 첫 인사는 절망적이었다. 갓 상경한 대학 신입생이 사투리를 안 쓰려고 애쓰는 어색한 서울말처럼 내 영어는 참담했다. 그러니까 내 대사를 우리말로 옮기자면 “안녕, 내 이름은 김연식이야, 서울에서 왔어. 그런데 너의 이름은 무엇이니?”하는 식이다. 나는 눈을 시퍼렇게 뜬(정말 시퍼렇지 않은가)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래서 더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조금만 더 긴장했더라면 걸을 때 로봇처럼 직각으로 방향을 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참한 첫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짚다가 나도 모르게 이불을 걷어찼다. 창피해서 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빈 울음소리를 냈다. 첫날의 긴장이 모여 어깨가 단단히 뭉쳤다. 딱히 한 일도 없는데 피곤했다. 나는 낯선 잠자리에서 깊게 잠들었다.


# 처음을 함께 한다는 것

일단 에스페란자에 대해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길이 72미터, 폭 14미터, 2천톤급 쇄빙선이다. 그린피스에 있는 환경감시선 세 척 중 가장 크다. 1982년 폴란드의 조선소에서 건조해서 러시아 무르만스크 항에서 해상 화재 진압선으로 사용했다. 그린피스가 인수해 개조한 뒤 2002년부터 환경감시선으로 재탄생했다.

손가락을 접어 따져보니 지은 지 34년이나 된 배다. 나이가 나보다 많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부터 유치원, 초중고교를 다니고, 대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꾀고 헤어지고 다른 아이를 만나고 차이고 또 만나고, 군대 갔다 차여서 탈영을 고민하며 엉엉 울고, 대학에 복학해서 취직 걱정 속에서 꾄 여자를 만나고, 첫 직장에서 일 못해서 상사에게 구박받고 울고, 그러다 사직하고 여친과 헤어지고, 백수되어 혼자 방황하다 부산에 가고, 5년간 질리도록 배를 탄 과정을 통튼 내 지난 일생보다 긴 시간이다. 그 세월 속에서 이 배 역시 쉬지 않고 물 위에 떠있었던 것이다. 나도 짧은 인생 여정에서 수많은 여자에게 차이고 아파하며 나름의 고비를 겪었는데, 이 배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나는 34년 된 배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로 갑판을 쿵쿵 찼다. 철판은 여전히 단단했다. 나도 그만큼 단단한지는 모르겠다.

이 배에는 선장과 기관장, 요리사 등 선원 스무명이 승선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공헌하자는 뜻을 품고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선장은 배 전체를 책임지고, 1, 2, 3등 항해사 셋이 각자 8시간씩 나눠서 하루 24시간 내내 항해하거나 배를 돌본다. 이 외에도 기관사, 갑판원, 용접공, 의사 등 각자 임무가 있다. 내 역할은 3등 항해사다.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4시간씩 두 번 항해를 맡는다.

선원들은 보통 3개월간 승선하고 3개월간 고국으로 돌아가 쉰다. 선원을 한꺼번에 교체할 수 없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나눠서 교대시킨다. 이번에는 4명이 승선하고 4명이 휴가를 떠났다. 나와 하루 이틀 차이로 세 명이 더 승선한 것이다. 나와 같은 초짜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녕, 난 빅토리아야. 아르헨티나에서 왔어. 만나서 반가워.
-안녕, 난 디에고야. 칠레에서 왔어. 만나서 반가워.
입술엔 가벼운 미소, 부드럽게 양끝을 올리고, 눈빛은 힘 있게, 목소리에는 적당한 흥분과 반가움을 담고,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되 손은 느슨하게 잡고... 이튿날 도착한 두 사람은 어제 나처럼 로봇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배에 꽤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그들을 맞았다.

배에서 함께 승선한다는 것은 곧 함께 내린다는 의미다. 우리는 승선기간 내내 동고동락할 것이다. 나는 나만큼 엉성한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이라면 누구나 이렇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처음을 함께할 것이다. 힘든 시간을 누군가와 같이 보낸다는 건 이래서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하나라도 좋다. 둘은 더 좋다. 나는 스페인 말을 하는 두 친구와 함께 배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에스페란자에서는 종종 보트를 타고 시추선이나 오염 의심 선박에 오르는 연습을 한다. 실제 상황을 고려해 물대포를 쏘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감옥에 갈 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총구 앞에 설지도 몰라. 수갑 차고 밧줄에 돌돌 묶여서 연행되는 건 예사지. 괜찮겠어?

1등 항해사 에밀리는 사뭇 진지했다. 흰 머리에 하얗고 덥수룩한 수염이 온 얼굴을 덮은 스페인 사내는 정적과 진지한 목소리를 적당히 섞어 무거운 긴장을 만들어냈다. 풋내기 선원에게 그린피스의 활동과 에스페란자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얼굴을 바꾸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건 실제 일어난 일이야. 그것도 최근에.

사건은 이렇다.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중 하나인 아틱 썬라이즈(북극의 일출) 호는 2013년 9월 북극해에서 석유를 시추하려는 석유기업 쉘(SHELL)사의 시추선에 접근해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시추선에서는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선원들에게 물대포를 쐈고, 러시아 해군은 활동가 주변에 기관총을 난사했다. 선원들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기도 했다. 러시아 해군은 헬기로 특공대를 급파해 아틱 썬라이즈 호를 나포하는 한편 선원들을 감옥에 가뒀다. 해적활동을 했다는 혐의다. 그 해 12월까지 아틱 썬라이즈 선원들과 활동가 서른 명은 100일간 러시아 무르만스크의 차가운 감옥에 갇혔다.

같은 배가 2014년 11월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석유기업 렙솔(REPSOL)사의 석유시추 반대운동을 하다 억류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원과 활동가 두 명이 스페인 해군의 강력한 무력 제지에 그만 바다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다. 다행히 환자는 구조되고 완쾌했지만 간담이 서늘한 이야기다. 풋내기들은 어느새 벙어리가 되어있었다.

-그린피스는 평화적인 환경운동을 추구하지 않나요?
-그렇지. 우리는 절대 비폭력을 유지해. 그렇다 해도 군대나 기업의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거야. 그냥 얻어맞아도 괜찮겠어?

어안이 벙벙했다. 겁이 나기도 했다. 감옥에 가는 이야기, 군대와 충돌하는 이야기, 군대의 보트와 충돌해서 다리가 부러지고 바다에 빠지는 이야기까지. 당시를 기록한 동영상을 봤지만, 동영상의 긴장과 흥분, 비명소리는 영화 속 비현실 세계처럼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서른 명이 러시아 감옥에 갇힌 100일 사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전 세계에서 선원들의 석방을 요구했지. 각 나라 대사관에 탄원하고 정치권은 물론 경제계에까지 전 방위적 로비가 시작된 거야. 당시 석유를 시추하려던 기업 쉘(SHELL)이 후원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의 경기장에 뜬금없이 그린피스 선원들을 석방하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나타나고, 우승자가 샴페인을 흔드는 자동차 레이싱 시상식에서 시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집요하게 들고 있었던 거야. 이 밖에도 도로에서, 광장에서, 텔레비전 생중계 현장에서 시민들은 러시아 정부와 석유기업 쉘을 비난하고 나섰지. 결국 러시아 정부는 그린피스 활동가들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어. 우리에게는 총이나 칼 같은 무기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활동을 지지해주는 시민들과 동료들이 있어. 러시아 사태는 총과 칼보다 시민들의 신념과 연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야.

에밀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퍼부었다.
우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나는 옳은 일을 하다 감옥에 가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다 다치거나 죽는 것은 두렵다. 나는 안중근이나 윤봉길 의사같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감히 그런 분들을 떠올리는 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일개 소시민일 뿐이다. 만일 내가 오늘 태연한 표정으로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치기로 용광로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리고 최근의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쌓았고 더 강해졌어. 우리는 작은 용기를 내면 돼. 모든 것은 뒤에 있는 친구들과 시민들에게 달렸을 뿐이야.

이미 배에 올랐으니 돌아갈 수도 없다. 에밀리가 말한 아주 작은 용기. 내게 필요한 건 그 뿐이다. 이날 나는 내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게 분명했다. 혼자라면 맞닥뜨릴 수 없는 거대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두 친구 빅토리아와 디에고, 그리고 그린피스를 지지하는 전 세계 시민들과 함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시간 차와 맥주를 나누는 선원들. 평상시에는 여유와 유모가 넘치는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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