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시내 한복판을 광범위하게 점하고 있는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조 18년(1794)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을 이룬 수원화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수원화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건설한 도시 성곽이다.
조선의 성은 임진왜란(1592)을 맞아 무참히 허물어져버렸다. 이에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서애 유성룡( 1542∼1607)은 전쟁이 끝나자 『징비록』을 작성하여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수원화성을 쌓는 데 크게 반영되었다.
본래 수원의 행정청은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의 화산 아래 있었다.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과 민가들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읍명을 화성이라 했다.
정조는 곧 화성 축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행궁을 설치하는 등 화성성역이라 부르는 신도시 건설이 무르익어갔다. 이에 정조는 일찍이 유성룡이 제시했던 설과 유형원·강항·조중봉,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이 주창한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는다. 실학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대역사였다.
남인의 영수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번암 채제공이 성역의 총 지휘를 맡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특히 정약용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매우 쓸모 있게 사용됐다. 요즘의 크레인에 해당하는 거중기는 40여 근의 힘으로 2만 5천 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사기간이 이전에 비해 5분의 1이 단축되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 것도 수원화성이 처음인데,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의 시가지를 포용했고, 산성의 방어기능을 이 읍성에 결합했다. 상공업을 장려해 정치·상업적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실용성과 합리적인 구조·구조물을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하는 등 수원화성은 이때까지의 건축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게다가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면모가 일품이다.
사대문 밖에는 이중으로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아담한 옹성을 설치했는데, 이는 서울 동대문에만 있는 구조물이다. 사대문엔 또 구멍이 5개 뚫린 물탱크를 두어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었다.
사대문 사이에 암문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 있게 배치하였으며, 성내에는 행궁을 마련해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제반 시설도 모자람 없이 갖추었다.
그리하여 인가라곤 겨우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200년 전의 광막한 벌판이었던 수원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고,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성장했다.
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렇게 작성된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은 1,280명, 연 동원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들에게 생활보장이 넉넉히 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된 사실도 여기서 밝혀지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서 계획, 도제, 의식, 동원된 인력과 경비, 사용된 기계 등 축성의 전말과 당시의 모든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경제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형편을 연구하고 성역을 보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파손된 성곽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했기에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사이의 일부와 행궁이 복원되지 못했으나 수원화성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수원화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긴 했지만, 기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 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하며 마무리짓고자 했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1)의 세력을 탕평책과 규장각 설치만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그 아름다운 자태만은 변함이 없다. 누구나 한나절만 할애한다면 유서 깊은 수원화성을 둘러보며 정조의 이상과 꿈의 일면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이다.
여러 기록에는 성벽의 전체 둘레가 8.36㎞에 이른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둘러보며 만난 수원화성의 안내판에는 5.52㎞라 되어 있다. 아마도 전자는 당초의 성 둘레였을 터이나 차츰 성곽 안팎으로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고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축소되었는지, 사대문 양 옆으로 끊긴 성곽이 계산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수원 시내 한복판에 있는 수원화성을 찾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수원 시내로 들어서면 곳곳에 팔달문·장안문 등을 알리는 표지판이 많이 있어 찾아가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차를 타고 돌아보는 것은 도심이 혼잡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성 한 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성벽을 따라 성을 돌아보는 것이 편하다. 화서문 주변이 주차하는데 좋은 편이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