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너와 행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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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너와 행복하기
  • 최원영
  • 승인 2017.09.18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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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지렁이


 

풍경 #58. 지렁이

 

요즘 뉴스를 틀면 어김없이 갑질 논란이 보도되고, 심지어 어린 학생들의 도에 넘는 폭행이 뉴스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누구나 장점과 약점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준은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어른들에겐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느냐, 얼마나 큰 권력을 손에 쥐었느냐,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명예 따위가 기준일 겁니다. 어쩌면 어른들의 그런 삶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 역시 나보다 못한 ‘너’를 무가치한 존재로 보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것, 내 부모가 이룬 것들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결국 강자와 약자로 구분 짓곤 합니다. 나와 다른 너는 함께 걸어가야 할 벗이 아니라 토벌해야 할 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즉 돈, 권력, 명예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는 불행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역시 불행할 수 밖에 없겠지요. 나와 다른 너를 친구로 여기고, 나와 다른 장점을 가진 너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일 텐데 말입니다. 그래야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교만해지거나 비겁해지지 않고, 권력의 유무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박수를 받든 받지 않든 그저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보장될 수 있어야 살만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와 다른 너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쩌면 공감하며 사는 삶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요. 공감이란 나와 다른 너의 아픔이나 슬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행동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우리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도 징그럽게 여겼던 지렁이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생명체란 사실을 알고는 지렁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에 있는 걸 겁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들의 기준으로, ‘선하다’고 믿고 있는 ‘나만의’ 기준으로 다른 생명체의 귀천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풍경 #59 . 스님과 구세군

 

제 지인이 보내준 글귀에서 저는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어느 추운 성탄전야였습니다. 매우 추운 날씨임에도 변함없이 구세군은 종을 딸랑이며 온정어린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그곳에 멈춰 섰습니다. 스님은 짐을 주섬주섬 풀고는 구세군 냄비 옆에 주저앉더니,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탁소리와 구세군의 종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자, 구세군 사람들은 짐짓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시간이 흐르자, 구경꾼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호기심이 발동했을 겁니다.

‘어느 쪽에 기부금이 더 많이 쌓일까?’

‘아니, 저 스님은 왜 하필 구세군 냄비 옆에서 계시는 거야?’

이렇게 온갖 추측을 하며 바라보았을 겁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스님은 시주를 멈추고는 주위를 한번 힐끗 돌아보더니, 시주함에서 돈을 꺼내 세기 시작합니다.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스님은 짐을 싸들고는 돈을 덥석 집어 들고는 구세군 냄비로 가더니, 그곳에 그 많은 시줏돈을 넣고는, 손을 탁탁 텁니다. 그러더니 합장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립니다.

웅성대던 사람들의 아우성은 그 순간 멈추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들은 감격해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너를 대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모두 다를 겁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장점이나 취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약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삿대질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행복한 동행은 어렵겠지요.
 

어린 학생들의 폭력사태가 줄어들게 하려면, 아마도 구세군 냄비에 자신의 시줏돈을 넣는 스님의 모습처럼 공감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그 가능성이 커질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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