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이 인천의 전부였던 시절
상태바
‘동인천’이 인천의 전부였던 시절
  • 유동현
  • 승인 2018.09.03 0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⑧ 동인천 역전 -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었을 당시에는 ‘동인천역’이란 이름은 없었다. 현재의 동인천청과물시장 자리에 ‘축현역’이 있었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축현역은 증가하는 승객과 화물을 감당하지 못해 1908년 맞은편(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이전했다. 이후 축현역의 이름은 상인천역(1926)으로 변경되었다가 광복 후 축현역(1948)으로 환원되었다. 1955년 ‘동인천역’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59년도 제물포고 앨범

1961년도 인천무선고(현 재능고) 앨범. ‘간첩자수기간’ 현수막이 이채롭다.


 

역사(驛舍)는 오랫동안 목조 건물이었다. 이 역사는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57년 12월 23일 콘크리트로 만든 대합실이 새로 지어졌다. 학생들은 이 대합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졸업 앨범 촬영으로 동인천 역사를 배경 삼기도 했다. 1989년 동인천 민자 역사가 들어서면서 이 대합실은 철거됐다.

 


1965년도 영화여상 앨범.


 

1960년대 중반 동인천 인근의 중구와 동구에 인천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살고 있었다. 당시 인천인구는 58만 명가량 되었다. 그 중 중구(9만)와 동구(17만)에 26만 명이 거주했다. 동인천역 광장은 박촌, 김포 등으로 가는 시외버스 터미널 역할까지 하는 바람에 늘 사람이 들끓었다.

 
 


1968년도 동인천고 앨범.

 

동인천역 주변이 인천 상권 최고조였던 70년대 초 큰 건물마다 대형 광고판이 세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미원’ 네온 광고판이 빛을 발했고 이에 질세라 건너편 빌딩에 후발 조미료 업체인 ‘미풍’의 광고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업체의 현대식 네온 광고판의 경쟁적인 불빛으로 역 광장은 한밤중에도 훤했다.     

 

 

 1975년도 중앙여상 앨범. 현재의 건물과 변한 게 거의 없다.
 


1960년대 70년대 광장에서는 주로 북한 규탄대회가 빈번하게 열렸다. 역 앞에는 ‘광장(廣場)’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작았지만 그래도 인천에서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규탄대회, 궐기대회, 환영행사, 기념행사 등 각종 집회가 이곳에서 주로 열렸다.

위 사진은 1974년 8월 15일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사건을 규탄하는 궐기대회 모습이다.  

 

 

1962년도 인천무선고(현 재능고) 앨범.

 

한때 동인천역은 마라톤 출발지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30년대에는 ‘인천A마라톤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코스는 상인천(동인천)역전을 떠나 경인국도를 거쳐 부평역을 왕복하였다. 60년대에는 인천~서울 구간을 나눠 달리는 ‘역전마라톤대회’가 종종 열렸다. 그때 출발지는 동인천역전이었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