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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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하여
  • 장현정
  • 승인 2018.10.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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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장현정 / 공감미술치료센터 상담팀장
 
 
 
학창시절 나는 모범생이었다. 학교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착한 아이.
 
당시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아빠와의 관계였다. 권위적인 아빠에 대한 반발심이 점점 커져 중학교 3학년 무렵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나는 아빠에 대한 ‘분노, 짜증, 미움’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죄책감’은 나쁜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부적절함’으로 이어져 자존감과 자신감을 갉아먹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부족하고 문제 많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교회에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하면 아빠를 위해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조언해주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사랑’과 ‘용서’ 같은 말들은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깡마르고 작은 여자 아이, 짧은 단발머리에 남색 교복, 빨간색 책가방을 맨 한 소녀가 넓은 콘크리트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낙엽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던 시원한 가을 바람이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내 교복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너무나 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래, 그냥 좀 싫어하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그냥 싫은 것은 싫다고 하기로 했다. 미우면 미운대로, 화나면 화난대로, 심지어 증오와 같은 강렬한 감정이 올라와도 증오는 증오대로.
 
감정에 솔직해지자 상황은 오히려 분명하고 단순했다. 수없는 죄책감들,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후에도 아빠로 인한 부정적인 사건들과 그로 인한 부정적 감정들은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아빠가 밉고 힘들었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한 부적절한 생각들로 괴롭지 않았다.
 
감정에 대한 통찰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공감’이라는 가치는 감정을 진정 이해받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아이들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 다만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 수 있음을 이해하고, 감정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는 제한할 수 있다. 표현의 방식을 알려주고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당시의 경험은 착한 모범생이던 내 삶에서 가장 큰 일탈이었을 것이다. 참는 것, 막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 이후의 나는 더 이상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나답게, 자유롭게 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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