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비난하지 않거나, 남의 비난을 수용하거나
상태바
남을 비난하지 않거나, 남의 비난을 수용하거나
  • 최원영
  • 승인 2018.10.29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5) 비난 넘어 행복 누리기


 
풍경 #96. ‘오늘은 선장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살다보면 비난이나 비판을 받곤 합니다. 잘한다고 했는데도 때로는 그것이 비난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것이 상처가 되어 삶을 곤혹스럽게 하고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타인의 ‘나’에 대한 비난이 왜 상처가 될까요? 이종선 씨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이나 논리 때문이 아니라 감정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을 다루면서 ‘감정’은 외면한다. 그래서 상대가 분노한다. 누구나 비판에 상처를 받는다. 아무리 뜻이 좋고 아무리 말이 맞아도 감정에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읽다 보면 오늘날 온갖 매체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들이 연상됩니다. 여야의 막말들, 노사 간의 다툼들, 부모 자식간의 소통의 부재들, 갑질 논란들... 이 모든 다툼의 기저에는 감정에 큰 상처를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받은 감정은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상처를 주는 사람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라는 책에 원양어선 선장과 항해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평소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던 항해사가 얼마나 지루했던지 술을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를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선장은 그날 항해일지에 ‘항해사가 술을 마셨다’고 적었습니다. 항해사가 술을 마신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선장은 그가 해고되길 바랐기 때문에 그것을 적었던 겁니다. 이를 알고 항해사가 지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장이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술을 마신 것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뿐이오.”
며칠 후 항해사가 항해일지를 쓰는 날입니다. 항해사는 ‘오늘은 선장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라고 적었습니다. 매일 술을 마셨는데 그날만큼은 마시지 않았다고 오해할 만한 글입니다. 이를 알고 선장이 지우라고 했지만 항해사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장님, 오늘 술을 마셨나요?”
“아니, 마시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래서 제가 마시지 않았다고 사실대로 적었는데 이게 무슨 문제인가요?”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난하면 그 순간은 통쾌한 마음이 들겠지만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비난보다는 칭찬이나 격려의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비난이나 비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어차피 들어야 할 비난과 비판이라면, 그것이 상처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게 바꿀 수는 없을까요?
 
《CEO 경영우언》이란 책에 야생오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리는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져 사육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길들여져 본래의 기상을 잃은 오리는 다시는 드넓은 창공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다.”
맞습니다. 비난이나 비판에 ‘발끈’하는 태도에 길들여지면 본래의 나다운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겁니다. 발끈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비난을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비난을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어제보다 성장한 나로 거듭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 책의 저자는 성공한 어느 경영자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조언합니다.
“CEO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휴가 때 낚시를 함께 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만 중용해 주위에 포진하면, 기업으로서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는 일이다. 내가 찾는 사람은 개성이 강하고 사소한 절차에 구애됨이 없이 때로는 사람을 불쾌하게 할 정도로 직언을 하는 그런 인재들이다.”
길들여진 사육된 오리보다 드넓은 창공을 비상하는 야생오리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철학이 담긴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의외로 행복을 누리기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쏜 화살이 나를 아프게 할 화살이었음을 알았으니까 ‘나’는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으면 되고,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들을 때는 그것을 수용해 ‘나’를 변화시켜 배움으로 삼으면 창공을 훨훨 나는 야생오리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