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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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지혜
  • 이수석
  • 승인 2019.02.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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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 글 이수석 / 강서중 교사, 그림 이다희 / 강서중 2학년

                                                                                         

잠이 안 온다. 잠 못 드는 밤이 며칠 째다. 수면제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한 알을 먹고 잤다. 지난밤에 나는 왜 잠 못 들었을까?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일까? 꿈의 학교인 강서중학교에서의 생활이 또 한 해가 갔기 때문일까?

2017년 3월1일자로 강서중학교에 발령받았다. 강서중학교는 하점 벌판을 앞에 깔고 언덕위에 동남향으로 지어진 학교이다. 전교생이 35명인 남녀공학의 아주 작은 학교이다.

내가 꿈꿔 왔던, 학생과 교사가 스스럼없이 대화하면서 자신의 꿈과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학교이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살아온 삶을 존중해 주는 학교이다.

학생들 모두가 내 눈에,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그들도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들은 나를 ‘수석쌤’ ‘사회쌤’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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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선생님께는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나는 그들 각자와 눈 맞춤을 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학생자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이들 스스로가 학생자치를 실천하고 있었다. 1인 1역할을 하고 있었고, 3학년 2학년 1학년 식으로 식사를 질서 있게 하였다. 각 학년별로 식사순서도 그들 스스로가 정했다.

장애우 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다. 천천히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하여 함께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애우 역시 친구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아! 수업시간에 그렇게 돌아다니면 안 돼. 자기 자리에 앉아야 해!”라고 하면 ○○이는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가 무서워!”라며 장애우가 울거나 싫어하면, 친구들은 각자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법보다는, ‘사람이 먼저’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아이가 급한 사정이 있을 때는 그들 스스로가 양보도 하였고 서로를 위하였다. 각자의 맡은 청소 구역을 책임감 있게 열심히 하였다. 가장 귀찮은 화장실 청소는 학생회장과 부회장이 하였다. 이것은 강서중학교에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강서중학교 선생님들은 교장 포함 12명이다. 교사들은 동아리를 만들어 응원과 지지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 누군가 “힘들다.” “지친다.” “피곤하다.” “짜증난다.”라며 힘들어 할 때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를 도와 주었다.

아침에는 티 타임을 가지며, 학생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어느 학생이 무엇을 잘하며, 그의 꿈이 무엇인지, 가정환경은 어떠하며 무엇이 그 학생에게 필요한지를 이야기 나누었다. 학생들 개개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교사의 시선을 통해 여러 모습의 학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행정업무처리를 힘들어 하는 나를 백순향 선생님과 원채원 선생님, 그리고 윤덕성 선생님은 자신의 일인 것처럼 마음을 내어 도와주었다. 그리고 류선희 선생님은 컴퓨터를 잘 못하는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강서중학교 발령 동기였다. 협업하여 일을 처리하니 학교생활이 행복하였다. 물론 강서중의 선임교사(?)들은 ‘왜 강서중의 교사 생활이 행복한지’를 몸과 마음으로 보여 주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인 1970년대 후반기 때의 지식공급처는 오직 선생님 밖에 없었다. 교권이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높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필요하다면, 궁금하고 호기심 어린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어디에서도 다양한 방법과 내용으로 찾을 수 있다.

모든 혁명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겹쳐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1차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기 에너지를 기반으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가능해진 2차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생각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한 사람들 덕분에, 1990년대에 컴퓨터가 일반화 되면서 지식정보가 중요해진 3차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동시에 4차산업혁명 시대가 왔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은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첨단 정보통신기술의 독자적 영역들이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키는 것이 4차산업혁명의 특징이다. 지금 사회의 키워드는 ‘융합’이다.

“4차 산업의 직업군에는 무엇일 있을까요?” 미래직업 강사의 질문에, “드론, 3D프린터,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무인 자동차, 나노 기술, 생체인식 기술, 클라우드 컴퓨팅”이라고, 강서중 중1 학생들은 대답한다. 학생들의 대답에 강사는 깜짝 놀라는 모습이다.

부모들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은 이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학생들은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며 배운다. 부모 세대보다 더 빠르고 광범위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학생들은 필요한 지식을 교사의 설명보다도 훨씬 더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정보를 찾는 능력과 구성하는 능력이 나(교사)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핸드폰 사용법을 그들에게 배운다. 동영상 제작과 편집도 학생들에게 배우고 때로는 부탁하기도 한다.

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왜 공부해야 하는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일깨워 줄 뿐이다. 삶에 대한 방향제시를 해 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 줄 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다. 학생들을 존중해 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주고, 지지를 해 준다. 그러면 그들은 아주 재밌고 유쾌하게 공부한다.

다시 잠 못 드는 밤이다. 나는 교사로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왜 이리 잠 못 드는가? 살아온 삶에 대한 성찰의 단계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교사로서의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학생들을 가르치기가 두렵다. 아니 가르칠 수가 없다.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배운다.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질문하게 하고 대답하게 한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무언가를 가르쳐야한다는 교사의 강박감과 직업병(?)에서 벗어나자. 학생들에게 설명하지 말고 학생들이 찾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 이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자. 현시적 교육과정보다는 잠재적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음을 알자. 그리하여 내 스스로의 삶을 보여주며, 언제나 끊임없이 공부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큰 가르침은 오히려 아주 서투른 것과 같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지혜를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 ‘가르침이 없는 가르침’을 펼칠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교직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제부터라도 그런 교직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공부하자. 그 자리에는 당사자인 학생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자. 대교약졸의 선생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는 있는 것일까? 그런 사회를 만들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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