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상태바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 박상문
  • 승인 2019.04.01 06: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상문 /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

1945년 12월 백범 김구 선생은 어렵게 환국하였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혼란스런 국내 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정치활동에 집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이 그리워서 황해도 해주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38선으로 가로막힌 남북분단선 때문에 고향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 인천이었다.

백범은 1946년 4월 14일, 15일에 인천을 방문했다. 처음 찾은 곳은 백범 자신이 투옥되었던 인천감리서와 노역을 하였던 인천항 축항건설 현장이다. 이어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내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강연을 하였다. 둘째 날, 15일에는 조일양조주식회사의 도원동공장과 송월동공장(소주를 만드는 공장)을 시찰한 후 송현동에 있는 인천조선차량주식회사와 학익동에 있는 조선기계와 일립제작소를 방문하여 노동자들에게 연설을 하였고 오후에는 신생동 동양헌에서 인천시내 유지들의 환영만찬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 11월 2차 인천 방문 때에는 인천항에서 경비선을 타고 무의도 주민들을 만나고 다시 인천항으로 나와 경비선으로 강화도를 방문했므며 당신의 감옥생활과 부모님의 생활을 도와주었던 강화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했다.

백범이 한해에 두 번씩이나 인천을 방문했던 이유는 그의 저술 백범일지에 잘 기록되어 있다. 백범은 두 번 인천감옥에 투옥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고 두 번의 탈옥을 감행했는데 이런 탈옥 과정에 인천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 또한 백범의 사상적 변혁과 내적 성숙은 인천감리서 옥중생활에서의 독서와 민족운동가 유완무 선생과 인천사람을 만나면서 이뤄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사건으로인해 백범은 인천을 처음 방문하던 날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는 소감을 기록한 것이다.
 
김구는 왜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했을까?
청년 김구는 황해도에서 유교 교육을 받고 글을 깨우쳤기에 위정척사정신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황해도 고향에서, 국모를 잃은 슬픔을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하는 것으로 복수한 것은 당연한 민족애라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재판장에 설 때마다 포효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그의 이러한 기개는 곧 인천시내와 서울 왕실에도 알려졌고 이에 감동한 인천사람들은 그를 지지하고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간수는 그에게 신문화 서적을 제공하였고 강화사람 김주경 형제는 가산을 팔아 백범의 옥바라지를 하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생활을 도왔다. 민족운동가 유완무 선생은 백범을 탈출시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해 무장투쟁을 계획하였으며 본명 김창수의 이름을 ‘김구’로 개명하여 주었다. 주윤창 선생은 도피생활 중인 백범과 강화 장화리 버드러지마을에서 학교를 열어 민족자강운동을 하였다. 또한 인천의 부자들과 엘리트 홍진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을 뿐만아니라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백범을 돕는 동지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백범 김구 선생은 인천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인천에서 생사의 고비를 두 번이나 겪어내고 인천 사람들에게 응원과 지원을 받았으니 청년 김구에게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인천사람들은 왜 백범을 도우며 함께 했을까?
당시 인천은 일본뿐 만아니라 각국의 조계지가 설정되고 새로운 문물이 교류하는 곳이었기에 국내외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인천은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들은 물질적 욕구가 큰 사람들도 있지만 개혁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불의에 강하고 새로운 조류를 습득하는데 빠르며 미래비전을 갖고 있다할 수 있다. 당시 인천은 일제 야욕의 전초지로서 암울했던 식민도시였다. 그래서 인천에 모여든 전국각지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시대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일제에 항거할 내재적 준비가 누구보다 앞서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김구의 기개 넘치는 모습은 인천사람들에게 항일 의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며 청년 김구의 사람됨을 본 인천사람들은 청년 김구에게 미래 조선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인천사람들이 예견했던 상해임시정부의 김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 함으로써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이 인천사람들로 하여금 김구를 흠모하고 그와 함께 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 인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의 도시,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도모하는 도시, 기개 넘치는 젊은이를 도와주고 키워주는 도시,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힘을 모아 하나 되는 도시이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백범 서거 70주년을 맞는 오늘, 인천은 새로운 100년을 위해 남북통일을 이뤄낼 평화도시, 시민 모두가 서로를 돕는 공존도시, 지속가능한 미래도시를 준비하는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 지대”여야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지난해 11월 개최한 전시회 포스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