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기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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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기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했다"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9.04.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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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민주화운동가 토크쇼②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 '내가 살아온 이야기'



“마음수련원에 3개월 있으면서 다 내려놓고 버렸습니다.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단계에 가니 명치 끝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뭔가 치밀어 올라오는 거예요. 지도 선생님은 ‘아직도 남은 게 있다’고 합니다. 몇 시간 지나니 OOO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용서가 안된다는 것을 알고 답답해서 울었습니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와 인천바보주막협동조합,(사)인천민주화운동계상사업회가 주관하는 인천민주화운동가 토크쇼 ‘내가 살아온 이야기’ 2번째 차례가 24일 오후 7시 부평구 십정동 인천시농협기술센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2번째 이야기 손님으로 이총각(72)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청솔의집 대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초대됐다. 이우재 온고재 대표와 강병수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총장이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1966년 19세의 나이에 동일방직에 입사한 이총각은 1972년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노조 활동을 시작해 노조 상근(총무부장)을 거쳐 1977년 노조 위원장이 됐다. 역사적인 민주노조의 초석을 쌓고 감격적인 결실도 하나씩 이뤄냈다. 그러나 노조를 탄압한 정권과 회사, 권력과 결탁한 노조 간부, 반조직 노조원 등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나서해 했던 투쟁. 나체시위과 똥물사건으로 얼룩지고, 집단해고(1978.4)와 블랙리스트, 복직을 위한 무기단식농성 등으로 점철된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쳐갔다. 토크쇼 사회자가 ‘용서’를 물어왔을 때.
 
“용서 안하면 하나님에게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이총각 전 위원장은 결국 ‘내가 살기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했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톤을 낮추었다.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들, 동일방직 사건이겠죠. 제일 크게는 124명의 해고자 명단(블랙리스트)를 전국에 뿌려 재취업을 막은 섬유본부 중앙 OOO. 한 10년전 세상을 떳는데, 가기전에 한번 만나서 자기가 ‘그랬다 그때는’ 하며 용서, 아니면 이해를 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한 OOO. 우리 내쫓고 자기가 위원장을 조금 했죠. 관리자는 상대적인 것이라 용서할 것도 없지만, 그 친구는... 동일방직의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반조직 행위를 하는 남자 조합원들을 교육시키고 했던 OO상사의 OOO. 몇몇 사람들이 있어요... 용서하기 힘든”

 



만석동의 어린 시절, 하루 두끼도 제대로 못 먹을 만큼 가난했던 이총각 전 위원장은 먼저 입사한 언니의 빽(과장에게 연평도 산 누런 조기 한 궤짝의 ‘뇌물’로)으로 동일방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돈 많이 버는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열심히 ‘기계처럼’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입사 석달만에 3~4년된 모범생이 받을 수 있는 품질관리(QC 써클) 교육생으로 선발될 정도로 앞서 나갔다. 그는 제일 빠르게 기계를 돌려 회사의 모범이 됐고, 임금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6시, 2시, 10시 3교대했는데, 화장실 갈 시간도 없고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생사공장안은 찜통처럼 더웠고, 기계소음으로 호루라기와 몸짓으로 소통을 했는데, 용어는 일본말이고, 생지옥과 같았지요.”
 
돈이 전부인 줄 안 이총각이 노동조합을 알고 그 정신을 실천하며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은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통해서였다.
 
“생산공장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OOO씨가 ‘노조 대의원이 된 건 이총각에게 득될 것이 없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노조 간부가 되고 보니, 정말 지금까지 너무도 돈이 제일인 줄 알고 살았는데, 노조를 알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인간답게 사는 건가를 알았고, 가난이 내 탓, 부모탓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됐어요. 그리고 그 때 그 정신을 불어넣어 준 것은 JOC를 통해서였습니다. JOC를 통해 전태일도 알고, 노동조합도 알았으니까요. 그 정신을 JOC에서 배웠다면, 노조를 통해 행동으로 옮긴 것이지요.”
그는 당시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30대의 조화순 목사 이야기도 꺼냈다. 현장과 식당 앞에서 그가 나눠준 교양지도 노동자로서 그를 일깨웠다.
 
동일방직을 떠난 이총각은 40대 때 ‘청솔의 집’ 대표로 20~30대 학생, 청년들과 함께 공부방을 운영하며 ‘민중’을 돌보았다. 김대중 정부들어 2001년에는 자활후견기관도 위탁받아 센터장으로 밑바닥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신나게 일했다.
 
“공동체의 삶이 무척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돈과 권력을 가졌더라도 혼자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또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아름다움을 채워갑니다. 40대 중반 때였는데, 동네 가가호호 방문하며, 교통비도 못받고 온몸으로 가르치며 헌신하던 청년들과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토크쇼가 마무리될 무렵, 이총각 전 위원장은 밑바닥 노동자의 삶도 조명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혼자 열심히 해서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고, 어려울 때 힘이 되주고 길잡이가 되주어서 자신이 지나온 삶을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며.
 
“동일방직 투쟁은 이총각 혼자한 게 아니잖아요. 동지들이 온 몸 바쳐 투쟁하고 희생해서 이뤄진 거죠. 노조 간부나 위원장은 끝까지 남아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받고, 인터뷰도 하고, 책에도 나오는데, 밑바닥 노동자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있습니다. 아직도 고생하는 동지들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야 합니다.”
 
그는 한 사례로 124명의 동일방직 노조 해고자 중에 유일한 남자였던 부위원장 얘기를 꺼냈다.

“해병대 출신으로 착했던 부위원장님, 송도에 사셨는데, 꼬마(자식) 3명을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해고되면 안되니 손 떼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측에서도 그러면 살려주겠다고 했었으니까. 그 때 그분이 한말이... ‘야, 나만 살자고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버리고 나가냐. 그렇게 할 순 없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똑같이 벌어져도 마찬가지야’. 지금 83세이신데, 해고당한 후 송도에서 돼지 키우셨습니다”



<이날 토크쇼에는 13년째 복직투쟁 중인 콜트악기 방종운 노조위원장이 나와 기타 연주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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