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또 한숨 … "살기가 너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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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또 한숨 … "살기가 너무 힘들어"
  • 이혜정
  • 승인 2011.01.03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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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창간 1주년 기획] '꼬방동네 사람들' ③ 동구 만석동


젊은 시절 고된 노동으로 무릎이 시리다며 만지고 있는 김 할머니.

1. 중구 북성동 '쪽방촌'
2. 계양구 효성동 '쪽방촌'
3. 동구 만석동 '쪽방촌'

취재 : 이혜정 기자

인천지역 체감온도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진 15일 오후 동구 만석동 '꼬방동네'. 화수동에서 만석부두로 향하는 차길을  두고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왼편에는 18층짜리 만석비치아파트가 우뚝 서 있고, 오른편에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단층 건물들이 모여 있다.

목재공장 건너편에 15개의 계단이 있는 작은 언덕. 그 위 아홉 번째 집에는 김모(74) 할머니가 살고 있다. 할머니 집은  언덕 위 가장 중앙에 있다. 집 겉벽에는 하얀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져 있어 마치 새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방안에는 입김이 피어날 정도로 냉기가 흐르고 있다. 김 할머니는 "어서 들어오라"면서 전기장판에 앉으라고 했다.

"할머니 이 작은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나세요? 엉덩이를 걸쳐 앉기도 힘드실 텐데요."  "이거? 엉덩이를 붙일 정도면 돼. 마루에 좀 앉아 있다가 추우면 전기선풍기도 틀고 하면 견딜 만해."

석유보일러를 사용했는데, 몇년 전 석유파동으로 1드럼당 35만원 했을 당시,  2년간 석유를 쓰지 못해 석유보일러가 고장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난방비를 아끼려고 전기장판 두 개와 전기선풍기 한 대로 겨울을 난다.

"우리집은 앞에 바람을 막아주는 벽도 없어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하면 살 수가 없어. 이래서 내가 더 아픈 거 같아. 겨울만 되면 집에서 생활하기 힘드니까 이 근처에 쪽방촌상담소에 있다가 잠만 집에서 자."

할머니는 한기를 견디기 위해  상·하의를 네 겹씩 입고, 두터운 양말 두 겹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생활을 한다. 그나마 지난해 동사무소에서 헌 대문을 새 철문으로 갈아주고, 찬바람을 막기 위해 스티로폼을 덧대서 도배도 해줬다며 올 겨울은 견딜 만하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할머니는 50년 전 어린 딸을 데리고 무작정 인천으로 올라왔다. 혼자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인천에서 안해 본 게 없다고 한다.

"어린 자식하고 먹고 살려고 찾다 보니 올라 온 데가 인천이야. 정말 안해 본 거 없이 다했어. 스덴공장, 화장실청소, 회사청소…. 철문을 짜는 공장에서 철물도 나르고, 연안부두에서 비료포대 나르기도 하고, 웬만한 '노가다'는 다 해 본 거 같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뭔 복이 이렇게도 없는지 원. 딸 자식 하나 있는 거 잘 살면 좋으련만, 어찌나 허약한지 잔병치레를 많이 했어. 지금도 간이 안 좋아서 약도 제대로 못 먹고. 얼마 전엔 팔을 다쳐서 팔을 접지도 못하고. 아주 속상해 죽겠어."

할머니는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딸을 도와주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팔자가 왜 이런지, 남편복 없으니 자식복도 없다"라고 했다.


김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는 화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 할머니에게 힘든 삶을 잊기 위한 취미가 생겼다. 화초기르기와 음악듣기이다.
 
"사는 게 하도 힘드니까 적적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시작한 게 화초를 키우기야. 이것들 1천~2천원에 사다가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렇게나 자랐어." 할머니의 '자랑'이다.

또 다른 취미인 음악듣기는 몇년 전 친구가 가져다 준 전축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몇년이나 됐을까. 요즘엔 찾아 볼 수 없는 전축 옆에는 다양한 장르의 가수 테잎이 놓여 있다.

이야기를 나눈 지 30여분 만에 할머니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나 음악 좋아해. 사는 게 적적해서 그런지 사랑노래가 얼마나 좋은지. 친구가 몇년 전 가져다 준 전축 덕분에 신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 처음에는 전축을 사용할 줄 몰라 힘들었는데, 이젠 이용하는 데 어렵지 않아."

기자가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할머니, 할아버님은 어디 계세요?"라고 묻자, 처음에 할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 돌아가. 그런 얘기를 뭐하러 해. 그냥 죽었어. 내가 전주에 살 때 있다가 영감 죽고 나서 올라온 거야. 이제 그만해! 이런 거 물어볼 거면 어여 가."

할머니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말문을 닫았다.

현재 할머니는 만석동 인근 '쪽방촌상담소'에서 운영하는 공공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5만~6만원 상당의 보수와 수급비 25만원으로 생활을 한다.

또 다른 만석동 '꼬방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은 이맘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취재진 방문이 달갑지 않다.


이북에서 피란해 많은 일을 했다며 손으로 세고 있는 김 할머니.

수차례 방문 끝에 17일 오후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란을 한 김모(80)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여섯 개 철근 틀에 비닐로 덮인 대문을 거쳐야 한다. 바람이라도 불면 무너질 것 같은 대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수북히 쌓아놓은 연탄과 연탄난로가 놓여 있다. 네 걸음 남짓 걸었을 때, 아슬아슬하게 벽돌을 쌓아올린 뒤 나무합판을 지붕 위에 얹은 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금이 간 벽돌은 금세 무너질 것 같다.

할머니는 전기장판에 손을 넣더니 "이곳이 따뜻하니까 이리 와서 앉으라"면서 "하도 귀찮게 해서 들어오라고 한 거야"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차가운 기자의 손을 만지며 금세 살갑게 대한다.

방안에 들어서자 역시 차가운 한기가 가득하다. 할머니는 방안에서도 몇겹의 상의, 솜바지, 그리고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용하는 방 뒤에는 또 다른 방과 연결된 '창호지 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좁은 공간에 부엌 겸 세면대가 있고, 천정에는 비가 오는 것을 막으려고 슬라이드 지붕이 또 다른 무허가 집과 연결돼 있다. 오른쪽 방이 큰 손자가 쓰는 방이라고 알려주는 김 할머니. 형광등을 켜도 어둡다.건넌방에는 외풍을 막으려고 창호지로 된 미닫이 문에 반투명 비닐을 덧대었다.

큰 손자가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할머니가 안내했다. 대낮에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그 방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할머니 천정이랑 창문은 왜 그래요?" "여기 빛이 안 들어 와서 너무 어두우니까 천정을 뚫었어. 혹시 비가 샐지 모르니까 투명 플라스틱 합판  위에 깔고, 도배를 한 거야."

"형광등이 있어도 너무 어두워. 바람이 들어 와도 저거라도 있으니까 전기세 아낄 수 있어. 전기장판을 좀 틀면 그래도 생활할 만해."

두 방의 천정은 얇은 나무판자를 덧대 센 바람을 막아주진 못한다. 천정 중간에는 형광등과 함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위는 바람을 막기 위해 얇은 벽지로 붙여 놓았다. 옆 방 사정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기름보일러와 연탄보일러를 함께 사용한다. 최근 1드럼에 22만원을 하는 난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전기장판과 연탄난로만 사용한다고 했다.

김 할머니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 초소라는 섬. 1남4녀 중 셋째 딸이었던 할머니는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큰오빠와 사촌오빠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인민군'에게 붙잡혀 감옥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 후 할머니 가족들은 '반공자'로 몰려 보국대에 끌려가 여기저기 흩어져 노동을 해야 했다.

"먹고살려고 농사를 지으면 뭐해. 농사를 지어 놓으면 간신히 먹을 농산물 빼고는 전부 다 공출해 갔어. 이북에서도 먹고살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먹을게 없어 강냉이가루로 죽을 해서 먹었어. 그래도 가족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행복했었는데…."

"말도 마. 그때는 생각하기도 싫어. 우리 오빠랑 사촌오빠가 남한으로 내려가다가 붙잡혀서 평양감옥소에 있다가 다 죽고, 온 식구가 반공자로 몰렸어. 어느 날 북한공산군들이 나를 서교라는 델 보내더라고. 거기선 하루 12시간 이상 죽도록 일만 시키는 거야…."

할머니는 서교에서 너무 힘든 노동을 견디다 못해 열흘 만에 몰래 도망을 나왔다. 그 당시 하늘에서 비행기가 포격을 하고 북한군의 순찰이 심해 밤중에 산을 넘어 도망을 쳤다. 

할머니 고향 초소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마을. 할머니는 배를 타려고 항구로 갔지만 순찰대원들이 버티고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며칠을 항구 근처에 숨어 있다가 배에 몰래 숨어 간신히 고향에 도착했다.

"거기서 도망을 나와서 항구로 갔는데, 순찰병들이 수십 명 깔려 있는 거야. 얼마나 무서운지…. 그 때 생각하면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려. 그 때 내 나이 20살이었어. 어마이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죽기 살기로 초소로 들어가는 배에 숨어서 고향에 도착했어."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엔 이북 말투가 묻어 나온다.

할머니는 숨어 지내다 인민군에게 잡혀 초소에서 10리 떨어진 논골로 또 다시 끌려갔다. 낮에는 건물을 짓는 노동, 인민군 훈련을 받고, 밤에는 내무서 인민군들과 보초를 섰다고 한다.

"아가씨! 여성동맹이라고 알어? 내가 이북에 있을 때는 좀 크면 전부 여성동맹에서 데려가서 인민군 훈련을 받고, 노동을 하면서 살았어. 더군다나 우리는 반공자로 몰렸으니, 훈련이고 일이고 얼마나 고되게 시키는지….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 할머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러던 중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백령도로 떠났다. 전쟁 중 할머니 형제들은 죽거나 흩어졌다. 할머니는 아버지, 남편과 자식들이 어렵게 백령도에서 만나 다시 충청도 안면도로 피란을 갔다. 그 후 할머니는 바다일을 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용유도를 거쳐 인천 만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가 만석동에 자리를 잡은 지도 60여 년. 할머니와 남편은 뱃일을 하며 생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할머니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조개 깨고, 굴 까고, 고기 잡으러 나가고, 배 청소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지 닥치는대로 했다.

"처음에 만석동에 와서 남편이랑 집이라도 구해보려고 죽어라 일했어. 무허가 집이어도 일단은 애들하고 잘 곳은 마련해야 하니까. 그 때 450만원인가 주고 이 집을 샀어. 애들 좀 크고 살 만하려니까…." 갑자기 할머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김 할머니의 '대문' 모습.

할머니 큰아들은 28살 때 대한통운에서 짐을 나르는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 후 며느리는 손자  둘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다. 손주들을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쉴틈 없이 일을 했다.

"손주들이 4살, 5살 때부터 내가 키웠어. 밥이라도 굶길까봐 하루도 빠짐없이 뱃일하고, 소일거리 생기면 닥치는대로 일하면서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어. 어린것들이 무슨 죄야! 저것들 불쌍해서 내가 얼마나 울었던지…. 내가 아들 죽고, 저것들 불쌍해서 눈물로 산 사람이야."

할머니 한숨은 끊이지 않았다. 나머지 두 아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요즘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쉬고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결혼한 큰딸은 10여 년 동안 자식이 생기지 않아 이혼을 하고 친구 집 보모로 일하고 있고, 둘째 딸은 결혼은 하지 않고 지방에서 혼자서 생활한다고 할머니는 전했다.

"남한테 악하게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자식들이 다 그 모양이니. 가슴에 한이 맺혀. 이젠 늙었으니까 바랄 것도 없고, 그냥 우리 손주들 장가 잘 가서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돼."

몸이 불편한 할머니는 큰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 가족 한 달 수입은 큰 손자가 벌어오는 150만원과 할머니 수급비 20만원, 노령연금 9만원이다. 할머니는 큰 손자가 버는 돈은 손자 결혼비용으로 저금하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라는 동구 만석동 '꼬방동네'. 현재 만석동 '쪽방촌'엔 196가구 380여 명이 힘든 삶을 견디며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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