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책과 사람과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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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과 사람과 헌책방
  • 최종규
  • 승인 2011.01.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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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마실 2]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아름다운 책과 사람과 헌책방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032) 766-9523

 (1) 새 일꾼

 인천에는 배다리가 있고, 배다리는 헌책방거리입니다. 헌책방거리와 헌책방골목을 잘못 아는 분이 퍽 많습니다만, 배다리처럼 길거리에 이루어진 곳은 헌책방거리이고, 부산 보수동처럼 동네 안쪽 골목에 이르어진 곳은 헌책방골목입니다. 서울 청계천이나 청주 보문로나 전주 홍지서점 거리는 모두 헌책방거리입니다. 대전 원동 또한 헌책방거리이지 헌책방골목일 수 없어요.

 인천 배다리에는 여느 살림집이 있고 학교가 있으며 온갖 가게가 있는 가운데 헌책방이 있습니다.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은 숫자로 치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인천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책이나 헌책방을 아는 이들은 ‘인천 배다리’ 하면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압니다. 일본 도쿄 간다처럼 헌책방이 백쉰한 군데가 있어야 헌책방거리가 아닙니다. 다문 두 곳이 있어도 헌책방거리요, 대여섯 곳쯤 되면 놀라우며 고마운 헌책방거리입니다.

 책을 아직 제대로 사귀지 못한 이들은 헌책방 두 곳이 있을 뿐인데 헌책방거리라 이름붙이는 일이 얼토당토않다고 느끼리라 봅니다. 그럴밖에 없습니다. 책을 제대로 사귄 이라면 ‘고작 두 군데’ 헌책방이라 하지만, 이 두 군데 헌책방에서 책을 보는 데에는 하루로 모자라고 이틀이나 사흘로도 모자라는 줄 압니다. 여러 달에 걸쳐 책을 살피고 읽는데, 겨우 ‘훑는다’ 해야 여러 달 동안 두 군데 헌책방에서 책을 읽습니다.

 일본 도쿄 간다 헌책방거리에서는 몇 해는커녕 몇 열 해를 들여도 책을 읽을 수 없겠지요. 일본 간다 헌책방거리에서는 ‘책을 산다’고 할 뿐이며, ‘그때그때 내 눈에 뜨이는 책만 겨우 산다’고 해야 알맞습니다.

 헌책방 숫자가 열은 안 되지만 다섯은 넘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도 ‘책을 사기’만 할 뿐입니다. 아예 동네사람으로 눌러앉아 날마다 헌책방마실을 한다면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책을 ‘읽는다’고 살짝 말할 만하겠지요. 그런데 배다리 동네사람은 먹고사는 일에 바쁘거나 매여 정작 가까운 헌책방거리 좋은 책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배다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자가용을 몰든 하면서 이곳 헌책방거리로 찾아옵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를 지키는 여러 헌책방 가운데 ‘막내’ 뻘인 〈아벨서넘〉은 막내 뻘이면서 배다리 헌책방거리를 인천 안팎으로 알리거나 지키는 ‘마당쇠’ 같은 살림꾼 노릇을 합니다. 헌책방 〈아벨서점〉이 갖춘 책은 숫자로 보아도 무척 많아, 서울에 있는 웬만한 헌책방보다 알차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책 숫자나 크기를 떠나,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헌책방 터전을 두 분 아주머니가 알뜰살뜰 여밉니다. 인천사람 숫자가 이백만을 넘느니 삼백만을 바라본다느니 하지만, 정작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헌책방 일을 배우며 책사랑으로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젊은이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두 분이 힘들지만 즐거이 헌책방 책삶을 붙잡는 동안 적잖은 ‘다른 아주머니’들이 이곳 〈아벨서점〉 일손을 거들며 당신들 나름대로 책사랑을 배우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 떠났습니다. 이러구러 2010년 12월에 〈아벨서점 전시관〉 자리를 지키던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그만두면서 일손이 더욱 팍팍해졌는데, 마침 새로운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아벨서점〉 셋째 일꾼으로 들어왔습니다.

 (2) 새 이야기

 새 일꾼으로 들어오신 분은 아직 〈아벨서점〉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벨〉 일도 익숙하지 않으실 테지만, 헌책방 일이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 옳습니다. 헌책방지기 노릇 또한 우리 나라 수많은 일거리 가운데 하나이지만, ‘헌책방을 차리겠다’고 하는 사람한테나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한테 마땅히 직업교육이나 직업훈련을 시킬 만한 데는 어디에도 없어요. 더구나, 직업교육과 직업훈련으로서 ‘헌책방 일거리’를 다루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들은 여느 책손으로서 헌책방마실을 참다이 못 즐기곤 합니다.

 ‘헌책방거리에 헌책방 두 군데만 되어도 몇 날 몇 달 꼬박 새워도 책을 다 못 읽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와 같은 헌책방 책 얼개와 짜임새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헌책방 책손 가운데 헌책방 헌책이 어떠한 너비와 깊이인지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미리/송현아 옮김-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동아일보사,2004)라는 책을 하나 만납니다. 집에도 한 권 있으나 부러 한 권 다시 고릅니다. 나중에 누군가한테 선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유미리 님 책이 잘 안 읽히는 만큼, 이 책은 앞으로 헌책방에 거의 다시 안 나올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앞으로 몇 해에 걸쳐 띄엄띄엄 보이기는 할 터이나, 2015년이나 2020년쯤에는 아주 자취를 감추겠지요.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헌책은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기 바란다’ 해서 짠 하고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어디에서 ‘이 책 좀 보내 주셔요’ 하고 바라지 못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책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미리 여럿 갖추어 놓으며 책손이 알아보고 사 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 사설을 쓴 사람은 아마도 소설을 읽지 않았나 보다. 다른 기사도 눈으로 훑고 싶었지만 아들은 내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알아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깨우면 아들의 생활 리듬이 깨진다. 이불 속에서,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소설작품) 모델이 된 측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문한 기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재판자료와 《돌에 흐르는 물고기》를 읽는 게 필수적이다. 생각하지 않고 기사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기사를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읽지 않고 ‘어쩜 못돼먹은 작가네’라며 최악의 평가를 내릴 것이다 ..  (343∼344쪽)

 유미리 님 책을 진작 알아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생각하기도 하지만, 진작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 알아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진작 알아보았다면 더 깊이 못 읽었을는지 몰라요.

 헌책방이라는 곳에서는 모든 책을 차분하게 마주하면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두루 사랑하거나 말거나 나 스스로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마주해야만 읽을 수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면 일을 할 곳이 없어진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뢰할 수 있는 편집자가 한 명이라고 남아 준다면 (글을) 쓸 수 있다(350쪽).”는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글쓰는 사람한테는 이보다 고마운 일이란 없어요. 책읽는 사람한테는 여느 도서관이나 새책방에서 안 갖추거나 내다 버리는 책일지라도 누군가한테는 뜻있다 싶어 건사해서 적은 돈을 받고 팔아 주는 헌책방처럼 고마운 책쉼터란 없습니다.

 《더글라스 파이크/편집부 옮김-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녹두,1985)라는 책을 고릅니다. 책값을 셈하는 자리에서 〈아벨〉 작은아주머니가 한 마디 물었습니다. “아니, 이런 책도 봐요?” 그럼요. 읽을 만한 책이니 읽고, 내 어수룩한 생각을 가다듬어 주니 읽습니다. 지난 1985년이나 되었으니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같은 책도 번역했지, 2000년이나 2010년이나 2020년이나 2030년 같은 때에 이런 책을 내놓는 출판사가 어디 있어요. 헌책방이기에 이 책을 고맙게 마주합니다.

 옮긴이 이효재 님 서명이 깃든 《실라 로우버덤/이효재 옮김-영국 여성 운동사》(종로서적,1982)도 매한가지입니다. 이효재 님한테서 선물받은 분이 ‘다 읽고’ 내놓았는지 ‘안 읽고’ 버렸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새책으로 사랑받았든 사랑 못 받았든 흐르고 흘러 헌책방 책시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2001년이든 2011년이든 2021년이든 도무지 한국에서 다시 나오기 힘들다 싶은 《영국 여성 운동사》라서 몹시 고마우며 즐겁게 책장을 넘깁니다.

..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나왔을 때, 한나 미첼은 그들이 우체통을 부수고 교회에 불을 질러도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들이 얼마나 오랜 투쟁을 해 왔으며, 감옥 안에서 무엇을 성취하려 했었던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들을 지원하는 사회주의 남성들까지 공격하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애멜린과 크리스타벨의 조직적인 냉혹성에 염증을 느꼈다. 결국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자, 한나는 그들과 결별을 하고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여성 참정권이라는 쟁점은 전혀 다른 정치관을 가진 여성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주는 수단이 되었다. 물론 이 단 한 가지 쟁점을 통한 통합에 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증가 일로에 있던 노동운동들이 의회주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여성들이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선거권을 획득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려 했다는 것은 묘한 일이었다. 물론 그들이 바랐던 것은 선거권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선거권을 얻으면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힘을 원했다 … 대부분의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의회에서 먼저 개혁이 일어나야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  (96쪽)

 지나온 삶을 더듬는 헌책입니다. 살아온 오늘을 되짚는 헌책입니다. 살아갈 나날을 톺아볼 헌책입니다.

 《이상해,정승모(글),황헌만(사진)-하회마을》(솔,2007)이라는 사진책을 들춥니다. 제법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을 담았습니다만, 영 내키지 않습니다. 사진이 너무 틀에 박혔다고 할까요. 우리 옛 삶자락을 돌아보면서 옛집 숨결을 고이 보듬으려는 사진으로는 좀 딱딱하다고 할까요. 한결 따사로우면서 한껏 보드랍게 사람들 삶터와 집터를 얼싸안는 사진으로 선보인다면 얼마나 기쁘면서 반가웠으랴 생각합니다. 이냥저냥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여길 만하지만, 이대로만 머문다면 슬픈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사라져 가는 우리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는 황헌만 님 사진인데, 정작 우리가 사진으로 담을 모습이란 “사라져 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즐겁고 예쁘게 꾸리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회마을》에 담긴 사진들은 그다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예쁘거나 멋스레 보이려 한다는 느낌은 받지만, 사랑스럽거나 즐겁구나 하는 느낌은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을 삶터이자 집터로서 물돌이마을 집자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덱스퍼드 더그웰/이가형 옮김-루스벨트》(동서문화사,1984)라는 어린이책하고 《정공채-노신》(동서문화사,1984)이라는 어린이책을 고릅니다. 《노신》은 한국사람이 썼군요. 아주 반가워 얼른 책장을 넘기는데, 첫머리부터 뚱딴지 같다 싶은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책 겉에 “중국혼 작가”라 이름을 붙였는데, ‘중국’이 아닌 ‘청나라’라는 이름을 쓰고, 노신이라는 사람은 ‘청나라 겨레 사람’이 아닌 ‘중국 겨레 사람’이라고 틀을 가르는 셈입니다.



.. 천하가 뒤흔들린다. 한 나라의 마지막에는 온갖 부정과 부패가 날뛰고 도둑들이 들끓는다. 중국 넓은 땅을 차지하여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은 중국 국민이야 살든 죽든 알 바 아니었다. 그 넓은 땅덩어리를 다른 나라에 저희 멋대로 떼어 주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강대국은 웃사람 모시듯 하면서도, 살려고 버둥대는 중국사람들을 잡아들여 가두고 노예처럼 부렸다. 중국사람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  (11쪽)

 아름다운 사람인 노신이라고 느끼는데, 왜 노신을 이야기하는 분은 한결 아름다운 넋과 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책을 엮지 못하는가요. 슬픕니다. 노신이라는 한 사람 넋을 이 나라 아이들한테 어떻게 읽혀야 하는가를 살가이 헤아리며 따스히 어루만지면 《노신》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을 텐데요. 중국이 청나라를 억눌러 노예처럼 부렸다지만, 우리 겨레는 중국한테 늘 억눌렸던 겨레였고, 청나라 마지막 겨레는 일본 제국주의자 총칼에 휘둘리며 스러졌습니다. 한족이라서 훌륭하거나 만주족이라고 멍청한 겨레일 수 없습니다. 홍대용 님이나 박지원 님은 청나라 문명이 얼마나 알뜰하며 훌륭한가를 익히 밝혔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섣불리 사대주의로 기울지 말아야 하고, 좋은 모습은 고마이 배우면서 서로를 이웃이나 동무로 삼아 즐거이 어깨동무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3) 새 삶

 그림책 《박기범(글),김종숙(그림)-미친 개》(낮은산,2008)를 고릅니다. 집에도 있으나 굳이 또 고릅니다. 시골마을 도서관에 찾아들 사람들을 헤아려, 이 그림책은 하나 더 있어도 좋다고 여깁니다. 다만, 글만큼 그림이 따라오지 못하지 않느냐 싶은데, 사람들 숲에서 삶터를 잃은 들개가 들삶을 오붓이 꾸리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릴 때에 왜 노상 어둡게만 그려야 하나 궁금합니다.

 《임석재-한국구전설화 (경상북도 편)》(평민사,1993)을 봅니다. 1903년에 태어난 임석재 님은 《한국구전설화》를 경상북도 편으로 마무리지으면서 이야기합니다.

.. 편자가 그동안 수집한 구전설화는 이것으로 모두 인쇄에 올려졌다. 개인 단독으로 수집한 설화의 수량이나 분량으로는 꽤 많은 듯하지마는 각지에 산재한 것은 이것의 수백 배 수천 배가 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는 대해의 일율에 지나지 않는다. 편자가 설화에 관심을 가진 지 칠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수집한 설화는 1만 화에도 못 미쳤다 ..  (202쪽/책의 끝에)


 대단한 일을 하신 임석재 님이요, 이 같은 일을 앞으로 누가 이어받아 할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옛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 적바림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옛이야기 아닌 삶이야기를 귀담아 새겨들어 아로새기는 사람도 드뭅니다.

 《에릭 호가드/박기열 옮김-바이킹 소녀 헬가》(학원출판공사,1998 재판)를 고릅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한하운 전집》(문학과지성사,2010)도 고릅니다. 새책을 조금 눅은 값으로 장만하는 셈이네요. 고맙습니다.

.. 동터 오르는 해를 우러러 흥분하는 고동을 멈추면서 마음먹음 김에 오늘이라도 월남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행장을 차린다. 륙색에다 터지는 궤양 치료용 약품을 마련한다. 붕대, 가제, 고약, 가위, 칼, 책 세 권. 그전에 몇 번인가 읽었던 앙드레 지드 작품인 《전원교향악》과 《좁은 문》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방랑과 회향》의 3권, 비누, 치약, 수건, 그리고 포켓용 조선지도, 돈은 조선은행권 백 원권 45,000원을 준비한다 …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어먹었는지 한 발자국도 옮겨놓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다만 한숨을 쉬며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중얼거린다 … “이렇게 헌 데 투성이어서 걸을 수 없으니 전곡까지라도 기차를 태워 주세요.” 하고 바싹 달라붙는다. 그는 “문둥이가 무슨 기차를 타려고 해.” 하고 호통을 부리면서 “어서 가!” 하고 야단이다. 나는 그의 쨍쨍한 소리를 뒤로 하고 전곡 길을 아프고 부자유한 다리를 끌면서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 사이를 걸어간다. 길에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가 걸어가는 농사꾼밖에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눈이 푸르게 물들지나 않을까 할 정도로 푸른 산들이 옛날같이 아름답고 고요만 하고 … 이 사선(38선)을 미국과 소련이 일방적으로 설정해 놓고 그네들은 우리에게 자유니, 해방이니 하면서 구세주같이 큰 얼굴들을 치켜들며 우리 땅에 와서 자유자재로 자기네들의 일방적인 정치 형태의 군정을 설치하고 있다. 이 얼마나 뼈아픈 약소민족의 슬픔인가! 우리는 억울함에 호소할 곳도 없이 노예로 붙잡혀서 그네들의 비대에 충복이 되어야만 하나!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  (399∼409쪽)

 한하운 님은 인천사람이 아니지만, 인천에서 터를 잡고 문학을 했기에 이렇게 인천문화재단에서 당신을 기리며 책 하나 엮어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지역 문화재단을 넘어 한국 문화재단에서 할 만한 일입니다. 또한 인천이며 부산이며 청주며 옥천이며 구미며 진주며, 크고작은 지자체마다 문화재단을 일구어, 내 고향마을을 토박이로서든 바깥사람으로서든 애틋하게 여기며 아낀 사람들 발자취와 삶자락을 보듬으며 책으로 묶어 나눈다면 아주 훌륭하겠다 싶습니다. 죽은 옛사람 글을 그러모아 책으로도 내고, 산 오늘사람 글과 사진을 갈무리해서 책으로도 내야지요.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넋으로 새로운 책입니다. 묵은 글이 새로운 책으로 다시 빛을 보고, 묵은 책이 헌책방에서 새로운 손길을 받으며 다시 읽힙니다.


 (4) 새 길

 《임석재-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2006)이라는 책을 봅니다. 지난 2006년, 이 책이 처음 나오던 때에 새책방 책꽂이에서 들추기는 했으나 사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 또한 골목길 터전을 ‘풍경’으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같이 풍경만 좋아하고 삶은 안 좋아하나 알쏭달쏭합니다. 왜 한결같이 구경만 할 뿐, 동네이웃으로 어깨동무는 못하는지 아리송합니다.

 하다못해, 작업실 하나 골목동네 한켠에 마련해 놓고 이 작업실을 발판 삼아 골목동네를 껴안으면 책이며 글이며 사진이며 아주 달라집니다. 달동네 골목집 방 하나 얻자면 아주 적은 돈으로 아주 즐거이 쓸 수 있어요. 인천은 서울보다 훨씬 쌉니다만, 서울이라 하더라도 달삯 5만 원짜리 작은 방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달삯 없이 보증금 300만 원이나 500만 원짜리도 있어요. 보증금 없이 달삯만 내는 작은 방도 많아요. 자그마한 동네 여관은 한 달 살아가는 데에 12∼15만 원을 내면 됩니다. 여인숙은 이보다 조금 더 눅을 수 있겠지요.

 골목동네 삶을 글이나 사진으로 담으려 한다면, 마땅히 골목동네 한자락에 내 살림집이나 일방을 얻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골목동네 삶을 알아보지 못해요. 왜냐하면, 아침부터 낮과 저녁과 밤과 새벽을 두루 골목동네에서 지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날씨와 흐름과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안아야 ‘골목동네 맛을 조금 보았다’ 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동네사람 아닌 구경꾼으로서는, 제아무리 뻔질나게 찾아든다 해서 골목동네를 알거나 읽을 수 없어요.

.. 유럽 골목길을 보면서 저걸 쓸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골목길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하다. 우리 골목길은 유럽 골목길보다 보존되어야 할 당위성과 가치를 몇 배 더 지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골목길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  (278∼279쪽)

 헌책방을 읽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어쩌다 한두 번 찾아갔대서 인천 배다리를 안다 할 수 없습니다. 인천 배다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한 주에 몇 차례씩 드나들지 않는다면 주민등록으로는 배다리사람일 테지만, ‘헌책방거리 이웃’은 되지 못해요. 헌책방 일꾼 이름을 알거나 얼굴을 안다고 헌책방을 알 수 없을 뿐더러, 헌책방 헌책을 알 턱이 없습니다.

 하버드 도서관도 훌륭하고 스탠포드 도서관도 훌륭하겠지요. 그런데 한국땅 헌책방도 훌륭하며,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도 훌륭하며, 이 가운데 〈아벨서점〉도 훌륭합니다. 저마다 다른 결과 삶과 깊이와 무늬로 훌륭합니다.

 〈아벨서점〉에 한 번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이삼십만 원어치를 산대서 좋은 책손이 되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는 참고서를 사러 왔다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자가용 끌고 어린이전집을 사러 온대서 애틋한 책손이 되지 못합니다. 문학책 하나이든 인문책 하나이든, 주머니를 털어 보배로이 여기는 넋으로 장만해서 읽는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헌책방 책손이 됩니다.

 자주 찾고 꾸준히 찾으며 한결같이 찾는 ‘책방 이웃’으로 지내야 비로소 여러 해 흐르고 흐르는 동안 시나브로 ‘책손’ 이름을 얻습니다. 아름다운 넋을 보듬으며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아름다운 책을 알아봅니다.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는 마음결로 아름다운 헌책방을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운 헌책방을 사랑하는 마실을 즐기는 동안, 이 아름다운 헌책방이 깃든 아름다운 작은 동네를 두 다리로 느끼며 껴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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