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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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 최종규
  • 승인 2011.01.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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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사진책, 환경책, 어린이책 읽기

ㄱ. 사진책 읽기

 2010년이 막바지에 이른 요즈음 디지털사진기 하나 안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2009년에도 이러했고 2008년이나 2007년에도 비슷했으며, 2011년이나 2012년이 되면 디지털사진기 갖춘 사람은 훨씬 늘리라 생각합니다. 따로 사진기를 안 갖고 있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쯤 가진 손전화 기계로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계를 잘 못 다룬다 하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조차 손전화 사진기로 손자나 손녀 모습을 찍어 바탕화면에 깔아 놓곤 합니다.

 온 나라 사람이 사진쟁이와 같다 말할 만한데, 정작 온 나라 사람이 손쉽게 사진찍기를 즐기면서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찍기란 어떠하며 사진삶이나 사진책은 어떠한 결인지 살피지 않습니다. 사진이나 사진찍기란 따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기는 하지만, 사진을 깊이 살피거나 사진찍기에 온마음 쏟으려는 사람들한테만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는 않아요. 사진을 찍는 누구나 사진을 알고 사진찍기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다면, 나한테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마음을 알아야 하고, 사진기를 쥔 사람으로서 고우며 착하고 참다운 매무새를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이나 사진찍기는 한 가지조차 배울 수 없습니다만, 사진을 하는 몸가짐이라든지 사진찍기를 하는 매무새는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배울 만하며, 배울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살림을 꾸리거나 밥을 하거나 집을 장만한다고 할 때에 ‘살림이 무엇’이고 ‘밥이 무엇’이며 ‘집이 무엇’인가는 따로 배워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림하는 매무새라든지 밥을 하는 매무새라든지 집을 장만하여 건사하는 매무새는 얼마든지 배우고, 배울 만하며, 배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다 할 때에도 ‘책이란 도무지 무엇이라 할 만한가’를 남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얼마든지 배울 만하고 배울 노릇입니다.

 사진 하나 찍어 얻는 매무새를 헤아려 봅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와닿는 모습을 그 자리에서 마음껏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내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서는 아주 마음에 들어 사진 한 장 찍는다지만, 나한테 사진 한 장 찍히는 사람은 퍽 못마땅할 수 있어요. 나는 사진 하나로 오래도록 떠올리고 싶은데, 나한테 찍힐 사람은 하루 빨리 잊거나 지나고픈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사진책 읽기란 사진쟁이들이 작품을 빚어내어 엮은 책을 읽는 일이 아닙니다. 예부터 사진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정작 사진책이 제대로 팔리거나 읽히지 못했고, 이제는 누구나 사진을 찍지만 사진책다운 사진책을 알아보며 장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나 스스로 내 삶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읽지 못하며, 내 하루가 어떤 모양새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부터 내 삶을 찬찬히 읽는다면 내가 즐기는 사진에 담을 모습이 내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한테까지 즐거울 모습이 되고, 이렇게 사진찍기를 즐기는 여느 사람은 아주 부드러운 손길로 빛깔 고운 사진책 몇 권을 기쁘게 장만할 수 있습니다.

 ㄴ. 환경책 읽기

 지난 2007년 봄, 인천 배다리에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나중에 내가 읽은 책들로 아기자기하게 펼쳐 보이는 작은 도서관을 열고 싶다”는 꿈으로 이었습니다. 나라나 지자체 도움 없이 오로지 내 손으로 앙증맞을 책쉼터 하나 일구고 싶었습니다.

 이제 이 도서관은 도시를 떠나 시골 멧기슭 한켠으로 옮겼습니다. 집식구 몸을 생각하고 내 몸을 한결 사랑하며 아끼고픈 마음에, 시골자락 품에 안깁니다. 시골 ‘구석’에 도서관을 열면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들다거나 누가 찾아오겠느냐 하지만, 참말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시끌벅적 어수선한 도시에서가 아닌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책을 즐기러 마실을 오리라 생각합니다. 인천에 사진책 도서관을 열 때에도 적잖은 분들은 “어차피 열려면 서울에 열어야 사람들이 더 쉽게 자주 찾아오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왜 자꾸 서울로만, 다시 서울로만, 또 서울로만 가야 하나 아리송해요. 인천에도 좋은 사진책 도서관 하나 누군가 열고, 부산이랑 제주랑 목포랑 춘천이랑 진천이랑 문경이랑 옥천이랑 …… 우리네 터전 골골샅샅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책쉼터 하나씩 있으면 더 아름다우며 재미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사진책으로 도서관을 열었으니, 누군가는 만화책으로, 그림책으로, 인문책으로, 철학책으로, 역사책으로, 문학책으로, 어린이책으로, 수필책으로, 잡지책으로, 청소년책으로, 과학책으로 …… 온갖 갈래 살가운 도서관을 열면 더 기쁘리라 생각해요. 자동차 아닌 시골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슬금슬금 찾아가서 책을 즐기다가는 “어어, 이 책들도 좋은데, 이 둘레 멧길과 숲과 논밭 또한 참으로 좋은걸.” 하고 느낀다면 책을 내려놓고 사뿐사뿐 숲마실이나 시골마실을 맛봅니다.

 책이란 삶이고, 삶을 담은 이야기가 책이며, 책이란 다시금 사람이요,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책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책이란 사랑이며, 사랑 나누는 사람들 삶을 책으로 여미어 놓습니다.

 온누리에는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제가 꾸민 도서관에도 숱한 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며 읽을 책을 그러모으는 도서관인데, 이 도서관에 깃든 책을 모든 사람이 모조리 읽을 수 없을 뿐더러, 어느 한 사람이든 이 책을 제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책이란, 이 책을 써낸 사람 슬기와 얼과 마음을 담으면서 누구나 이 슬기와 얼과 마음을 받아먹도록 하니까 섣불리 한 사람이 혼자 차지할 수 없는 가운데, 고맙게 받아먹은 슬기와 얼과 마음에 새삼스레 내 슬기와 얼과 마음을 담아 뒷사람한테 이어줍니다. 돌고 돌며, 잇고 잇는 책이에요.

 이들 책이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살찌우며 사람을 살피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모든 책은 새로운 책이면서 헌책이고, 어느 책이든 내 삶을 담는 책, 곧 환경책입니다. 자연사랑 환경사랑을 외쳐야 환경책이 아닙니다. 《수달 타카의 일생》도 빛나는 환경책이고 《아톰의 철학》도 예쁜 환경책이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멋스런 환경책이에요. 남녘나라에서는 참 안 읽히는 환경책인데, 우리 스스로 우리 누리를 바르며 착하고 참다이 바라볼 때 고이 읽히리라 생각하며 기다립니다.

 ㄷ. 어린이책 읽기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이 1975년에 내놓은 《얘들아 내 얘기를》(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이들한테 읽히는 책은 으레 동시나 동화나 그림책이나 과학책이나 지식책에 머물지만, 이원수 님은 일찍부터 ‘어린이가 읽을 수필’을 써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이들이 읽을 만한 ‘자유로운 글(산문/수필)’은 거의 없을 뿐더러, 자유로운 넋과 삶을 담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커 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도록 힘쓰는 어른은 몹시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줄 ‘자유로운 글’이란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다움을 사랑할 때에 쓸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나라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나라사랑이고, 손으로만 깨작대는 올바른 삶이 아닌 온몸으로 부대끼는 올바른 삶이어야 해요. 이원수 님은 《얘들아 내 얘기를》에서 아이들하고 아이들 어버이하고 아이들 가르친다는 사람들한테 “학교에서 공부해서 좋은 기술만 배우면 장래에 잘 살 수 있다든가, 지식을 쌓아서 사회에 중요한 일을 맡아 할 수 있다든가 하는 생각으로서는 안 된다. 기술이나 지식만으로서는 하나의 기계와 같은 것이 될 뿐, 아름다운 인간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186쪽).” 하고 말을 겁니다.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글을 쓰고, 마음이 슬픈 사람은 슬픈 글을 쓰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은 괄괄한 모양의 글을 쓴다(142쪽).”는 얘기를 덧붙입니다. “어린이들이 책을 사는 것은 그 속에 씌어 있는 글을 읽기 위해서다. 화려한 겉치레를 해야 내용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겉치레가 심해지면 책값은 글값이 아니라 치레값이다(180쪽).”는 생각을 덧답니다.

 어느덧 새롭게 맞이하는 2011년을 헤아립니다. 지난 서른여섯 해 동안 이 나라 학교는 얼마나 ‘기술 교육’을 넘어 ‘사람된 배움’에 마음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나날이 쏟아지는 숱한 책과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어느 만큼 ‘곧거나 착한 글’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동네 작은 책방이 거의 사라진 요즈음 소담스러운 책이나 수수한 책은 얼마나 사랑받는지 아리송합니다.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만 읽도록 어른이 쓰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어린이가 좋아하면 그만인 책이 어린이책이라 할 만한가요. 어린이가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책이 어린이책이 되려나요. 어린이하고 어른이 함께 좋아서 읽는 책이 어린이책일까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마음을 따스하고 넉넉히 돌보는 책이 어린이책일는지요. 어린이랑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면서 누구나 즐길 책이 어린이책인가요.

 어른들은 이런 문학도 즐기고 저런 예술도 누립니다.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수많은 문화와 공연과 영화가 있습니다. 아직 아이한테 보여주기 어렵거나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아이들 생각은 한줌조차 없이 살아가면서 아이들한테는 ‘귀여워 보이는’ 이야기만 던져 놓는다고 느낍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요, 아이들 또한 고운 목숨임을 옳게 살피지 못하는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책(글)은 어린이가 나란히 읽을 만한 눈높이로 써야 아름답습니다. 책(이야기)은 할머니랑 어린이를 마주앉히고 함께 읽도록 들려주어야 아리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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