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공예상가에 ‘나래공방’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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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공예상가에 ‘나래공방’을 열다
  • 권근영
  • 승인 2021.01.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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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7) 인구의 무늬목 상감, 연희의 부업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연희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인구는 직장을 그만뒀다. 연희는 시가족 많은 집에 남편 하나 보고 시집왔는데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미주종합목재 책임자급으로 어깨가 무거워서도, 자주 밀리는 임금에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무늬목 상감을 연구하고 싶다는 것이 그만 둔 이유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연구라니, 이 무슨 태평하고 배부른 소리인가...

인구는 화장실 옆 창고 방에 책상을 하나 갖다 놓고 ‘연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아침밥 먹고 방에 들어가 책을 읽고, 점심밥 먹고 방에 들어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왕십리 공업사에서 스카시 기계 뼈대와 부속품을 사와, 직접 조립해 만들었다. 송림동 수도국산 달동네 꼭대기 집, 화장실 옆 좁은 방에 책상 하나와 스카시 기계가 놓이니 사람 하나 들어가면 꽉 찼다. 인구는 드레싱 페이퍼에 그림을 그려가 동구청 앞 가게에서 청사진을 뽑아왔다. 커터칼로 오려서, 합판에 붙이고, 합판 밑에 얇은 무늬목을 여러 개 겹쳐서 스카시 기계로 오렸다. 드르륵드르륵 기계 소리가 날 때마다 연희의 마음도 같이 울렁거렸다.

부업 안 할래? 막내 시이모 인순이 연희에게 물었다. 라이터 회사에 다니는 사위가 물건을 날라주면 방에서 조립만 하면 된다고 했다. 연구라는 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당에 연희는 푼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심경으로 부업을 시작했다. 일은 쉽고 단순했다. 라이터 속에 고무 패킹을 넣어 조립하면 완성이었다. 라이터 물량이 없을 땐 다른 부업을 맡아 했다. 플라스틱 통 안에 잉크 심과 스프링을 넣어 볼펜을 조립하기도 하고, 둥그런 플라스틱 몸통에 빗살을 하나씩 꼽아 빗을 만들기도 했다.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일인데 반복하다 보니 눈이 침침하고 어깨가 쑤셨다.

연희는 차라리 도라지 까는 일이 더 좋았다. 현대시장에서 아침에 도라지를 가져와 낮에 까서 저녁에 사람 몰리기 전에 갖다주면 돈을 꽤 받았다. 그 돈으로 무 사고, 파 사고, 콩나물 사고, 생선까지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가득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차리면 골방 연구실에서 인구가 나왔다. 이런 결혼 생활은 상상도 못 했지만, 별수 없었다. 딱 1년이 지나고 인구는 연구가 끝났다고 말했다. 나무가 가진 본연의 색깔로 문양을 만드는 기술은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했다.

1985년 인구는 숭의동에 사무실을 얻어 공방을 차렸다. 무늬목 상감 기술을 가구 회사에 선보여 계약을 따냈다. 주로 장롱이나 장식장 같은 가구에 들어가는 문양이었고, 솜씨가 좋았다. 직원이 12명으로 늘었고, 지금껏 만져보지 못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인구는 어머니 남숙에게 돈을 보이며 이제 환갑인데 쉬엄쉬엄 일하라고 했다. 돈을 보고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인천시 공예품 경진대회와 전국대회에서 수상하고, 인천일보에 인터뷰한 인구.
인천시 공예품 경진대회와 전국대회에서 수상하고, 인천일보에 인터뷰한 인구.

남숙은 그동안 동네 여자들에게 조금씩 꾸어 온 돈에 대해 말했다. 아직 갚지 못한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았다. 송림동 집에 들어와 방 한 칸씩 차지하고 사는 동생들(혜숙, 인순, 경수)의 짐까지 지고 살아온 이야기였다. 조카들 수업료와 수학여행비까지 꼬박 챙기며 악착같이 살아온 것이었다. 인구는 남숙의 빚을 갚아 나갔다. 갚는 와중에도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형우에게 중풍이 왔고, 한의원에서 일반 침보다 몇 배가 비싼 금침을 맞았다. 인구는 치료비를 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해 인구의 여동생 도영이 동인천 송현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인구는 거래처인 보르네오에 가서 신혼부부에게 제일 인기 좋은 가구로 보여달라고 했다. 화장대, 장롱, 장식장, 텔레비전 다이까지 풀세트로 구매해 경기도 용문 신혼집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하자가 있는 B급 상품도 판매하냐고 물었더니, 더 저렴한 가격에 할인해서 판매한다고 했다. 상품을 보니 전문가가 봐도 차이점을 잘 모를 정도였다. 인구는 B급 장롱과 장식장을 추가로 송림동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다.

인구는 공방에서 사업에 힘을 쏟으면서도 연구를 계속했다. 우리나라 단청 문양을 상감으로 표현한 필통을 만들고, 십이지와 탈 문양의 열쇠 손잡이와 열쇠고리, 다용도 합 등을 만들어 무늬목 상감 기술이 일상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공방에 필통, 연필꽂이, 열쇠고리, 시계, 나무 빗, 머리핀 등 나무로 만든 공예품 위로 톱밥이 쌓여 갔다. 이때 동료 목수 경배가 제안을 하나 했다. 배다리 지하상가에 가게를 하나 차려서 공예품을 판매해보라는 것이었다. 인구는 공방에서 기계를 다루고 물건을 만들어 납품해야 했다. 가게를 지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구매하려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을 연희에게 말하니, 자신이 가게를 나가면 어떠냐고 했다. 집에서 배다리까지 가까워서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며 말이다. 1996년 인구와 연희는 공예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가게를 배다리 지하상가에 열고, 나래공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연희는 가족들이 출근하면 집을 치우고 빨래해서 널어놓고 배다리 지하상가에 갔다. 가게 문을 열고, 공예품을 진열하면, 맞은편 가게들도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화장품 가게 여자와도 가방 가게 여자와도 인사하고 커피 마시며 잘 지냈는데, 자주 어울려 논 사람은 건너편 그림 파는 여자다. 가게 이름은 명인방. 그림과 사진을 주로 팔았다. 액자에 담긴 명화, 확대한 영화 사진 같은 걸 팔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제법 손님이 있는 가게라고는 하지만 유동 인구가 워낙 없다 보니 종종 심심하고 지루했다. 명인방 여자가 연희에게 말했다. 나래야, 극장이나 가자.

명인방 여자가 연희를 데리고 간 곳은 애관극장이나 미림극장 같은 영화를 보는 극장이 아니었다. 배다리에서 기독병원 가는 길에 있는 연극 보는 극장이었다. 극장 이름은 돌체였다. 연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극을 보러 갔다. 제목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연극이라고 하면 배우들이 말도 하고 떠들 줄 알았는데, 제목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몇 명 나와서 전철 타고 출퇴근하면서 신문 보는 체했다. 몸과 표정으로 보여주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관객들도 조용히 집중했다. 처음 와보는 연극 극장이 낯설지만 좋았다.

연희와 명인방 여자는 가끔 심심하고 지루할 때면 가게 문을 열어 놓고 놀러 나갔다. 가게는 주변 가게 여자들이 돌아가면서 봐줬다. 자유공원에서 진행하는 미스인천 선발대회를 구경하러 가고, 도원 수영장에 가서 물장구를 쳤다. 발차기를 열심히 해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 물속에 머리를 넣고 ‘음파 음파’ 하는 것도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둘은 해가 지기 전에 배다리 지하상가에 돌아온다. 가게를 정리하고 문을 닫는다. 물건을 한 개도 팔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연희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가게에 나온다.

송림동 집 안방에서 부업을 하는 연희. 빗을 조립하고 있다.
송림동 집 안방에서 부업을 하는 연희. 빗을 조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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