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노을처럼 고소한 시간이 담긴 곳, 수인곡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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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노을처럼 고소한 시간이 담긴 곳, 수인곡물시장
  • 유광식
  • 승인 2022.09.04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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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유람 일기]
(87) 신흥동 수인곡물시장 일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수인곡물시장을 알리는 입구 간판, 2022ⓒ유광식
수인곡물시장을 알리는 입구 간판, 2022ⓒ유광식
취급 물품, 2022ⓒ유광식
취급 물품, 2022ⓒ유광식

 

올해 추석은 절기상 일찍 찾아온다. 명절을 반길 새도 없이 강력한 태풍(힌남노)이 먼저 온다니 지난달 비 피해에 이어 잔뜩 조심하고 볼 일이다. 역대 태풍 중에 가장 강력하다고 하니 할 수 있는 모든 대비를 갖춰 큰 피해가 없기만을 간절히 빌어본다. 이번 명절은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고향 산천으로의 발걸음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가족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당연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야외 행사가 많아지기도 했다. 움츠려 있던 일련의 활동들이 피어나 멈추지 않길 바라면서도 여전히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사회의 운율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진다. 쓰라린 마음을 조금 마취시키고자 고소한 향내가 진동하는 수인곡물시장을 찾아 나섰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트럭 아래편에 누운 턱시도 고양이, 2022ⓒ유광식
따가운 햇살을 피해 트럭 아래편에 누운 턱시도 고양이, 2022ⓒ유광식
오래된 붉은 벽돌 창고와 담쟁이덩굴 그리고 고양이, 2022ⓒ유광식
오래된 붉은 벽돌 창고와 담쟁이덩굴 그리고 고양이, 2022ⓒ유광식

 

신흥동 수인곡물시장은 옛 수인역 주변에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곡물 시장이다. 신광초등학교 담벼락을 맞대고 이어진 좌판 골목과 기름 짜는 집들, 영양탕집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분포한다. 시장의 규모는 더 커지지 않은 채 빛바랜 옛 풍광만 가득한 곳인데, 서해 일몰에 태양초처럼 얼굴 빨개지는 다정한 맛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수인역은 시대의 변화 속에 사라졌고 바로 옆 서해대로 아래로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쉴 틈 없이 큰 트럭이 오가며 위태로움이 크지만, 곡물 특유의 고소한 배부름에 잠시 편안해지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100m가량의 기다란 학교 담벼락에 딱 붙어 기찻길처럼 이어진 상점들의 모습에서 피난의 여정과 바쁘게 살아온 시대적 상황이 교차한다. 

 

도로와 철로(우측 아래는 철로였다), 2022ⓒ유광식
도로와 철로(우측 아래는 철로였다), 2022ⓒ유광식
신광초와 맞닿은 수인곡물시장 동쪽 입구, 2022ⓒ유광식
신광초와 맞닿은 수인곡물시장 동쪽 입구, 2022ⓒ유광식
70년도 넘은 시장 역사에 기대어 상호가 어느덧 바랬다, 2022ⓒ유광식
70년도 넘은 시장 역사에 기대어 상호가 어느덧 바랬다, 2022ⓒ유광식

 

시장 인근에는 오랜 세월만큼이나 북적였을 인파의 흔적이 눈앞에 선하다. 지금은 메워진 철로와 문 닫은 영양탕집들, 빨간 벽돌 창고, 연탄공장 등을 뒤로 하고 거주를 위한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라 거리의 소음은 매미와 자동차의 양자 대결 구도이다. 곡물시장 입구엔 항아리집이 손님들을 특색 있게 맞이하며, 상점 수(50개)가 모자라 전통시장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정 때문인지 어느 시장에나 있는 공중화장실이 없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급한 모양으로 화장실 위치를 이 상점 저 상점에 물어보는 한 아주머니의 당혹스럽기도 했을 법한 사연이 풀리기도 했다. 

 

손님이 오갔을 상점은 이제 보관창고로 쓰인다, 2022ⓒ유광식
손님이 오갔을 상점은 이제 보관창고로 쓰인다, 2022ⓒ유광식
시장 입구 항아리집(곡식을 담기에 좋다), 2022ⓒ유광식
시장 입구 항아리집(곡식을 담기에 좋다), 2022ⓒ유광식
철로가 사라지고 옛 역사 자리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2022ⓒ유광식
철로가 사라지고 옛 역사 자리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2022ⓒ유광식

 

한 가게에 들러 따뜻한 참기름 두 병을 샀다. 주문받은 상품의 곡물을 볶고 압착하여 기름을 짜는 실내는 뿌연 연기와 일정 온도 이상의 열기로 뜨거웠다. 굳이 추천하지 않는 국산 참깨는 중국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미리 주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국산 참기름을 두고 귀한 몸인가 싶어진다. 국산이 비싸 자주 외산을 먹고 지내는 내 몸은 외산인지 국산인지 순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수인곡물시장은 기름으로만 이야기될 장소는 아니나 이젠 참기름, 들기름으로 불리는 부분도 어쩔 도리가 없다.

기존 상점이 그저 창고로만 이용되고 인근에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는 등 구역의 재배치로 시장은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다. 빈집엔 오동나무가 지붕보다 높이 자라 꽃을 피우고 우주영양탕집은 영업을 끝내고 멀어진 위성이 되고 말았다. 담쟁이덩굴은 커다란 창고를 집어삼킬 기세이고 말이다. 시대와 함께 걸어온 수인시장이 또 다른 시대의 급류 속에 섬처럼 남겨지는 건 아닐지 위태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솔솔 퍼지는 깨냄새처럼 고소한 시간을 안겨주는 곳으로 늘 환영받길 바란다.

 

철로 양쪽을 따라 영양탕집이 많다, 2022ⓒ유광식
철로 양쪽을 따라 영양탕집이 많다, 2022ⓒ유광식
화단 채소(호박, 도라지, 토란)와 주택 골목, 2022ⓒ김주혜
화단 채소(호박, 도라지, 토란)와 주택 골목, 2022ⓒ김주혜
휴업한 우주집(청포도 나무와 평상), 2022ⓒ유광식
휴업한 우주집(청포도 나무와 평상), 2022ⓒ유광식

 

수인곡물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신광사거리를 건너 신흥시장으로 향했다. 기존의 시장 주차장을 확장하는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시장 안은 한산했지만, 상품의 빛깔만큼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며 연신 손짓하고 있었다. 노포들 사이로 새 인테리어의 가게들이 단풍 물들 듯 마을 골목에 변화를 주는 가운데, 저녁 모임이 임박했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까워진다. 한편 동쪽에서 달려 온 태양이 서쪽에 안기며 시간을 대신한다. 아무쪼록 이번 명절엔 반가운 얼굴들과 고소한 시간을 볶고 짜내기를 기대해본다. 

 

신흥시장 내 한 떡집, 2022ⓒ유광식
신흥시장 내 한 떡집, 2022ⓒ유광식
신흥시장 서쪽 출구(북녘 지명의 상호를 간혹 발견한다), 2022ⓒ김주혜
신흥시장 서쪽 출구(북녘 지명의 상호를 간혹 발견한다), 2022ⓒ김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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