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현-마을이음’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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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현-마을이음’을 돌아보며
  • 이상권
  • 승인 2022.09.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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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정책, 듣다]
이상권 / 귤현마을이음 대표

 

귤현동 이야기

인천 계양산과 형제봉 주변은 한강 서부지역의 중요한 이동통로였고 넓게 펼쳐진 평야지대로, 산자락 주변에 오래 전부터,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귤현동은 예로부터 큰말, 작은말로 불리며 집단취락지구로 형성되어 온, 계양구에서는 비교적 넓은 구역(계양1동과 3동)에 있는 법정동이다.

© 2021. 함나우 귤현초4, 귤현여행법
© 2021. 함나우 귤현초4, 귤현여행법

산지와 농경지를 제외한 귤현동은 2000년 말부터 귤현택지개발 전원형 다세대주택들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아파트 단지는 2004년 귤현아이파크 394세대, 2013년 계양센트레빌 1400여세대가 지어져, 현재는 1만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을 멀리서 내려다보면 계양산에서 이어진 소금뫼산 · 모퉁이뒷산 · 양지편뒷산 · 둥그재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과 아라천, 굴포천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귤현지구 한가운데 근린공원에는 백로 서식지가 있으며, 봄, 여름, 겨울 철새들도 찾아오는 평화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

김포,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망, 공항철도, 인천도시철도가, 굴포천, 아라뱃길 물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숲과 생태공원 등 풍부한 자연환경과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는 교통인프라, 삶의 질에 대한 만족도, 높은 수준의 공동체 의식 등 정주 여건이 좋은데 반해, 중학교, 고등학교가 인근에 없어 인구 유출이 많다. 때문에, 영유아, 초등학생 자녀를 둔 젊은 세대와 노년 인구가 많은 편이다. 교육 문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주민들은 이곳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귤현동에서는 이른 새벽 분주한 택배 차량의 움직임부터 저녁 무렵 어린이공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 창업한 업장과 오래된 간판을 새로이 매단 상가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작은 변화도 새롭게 다가올 때가 많다.

 

마을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도시 사람들은 각자 본업과 일상이 있기때 문에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시간과 에너지가 모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치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 갈등에 대해서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인지 스스로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다.

일상과 마주하고 있는 마을에서도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공리를 추구하기 위한 방향은 어느 쪽인지 판단은 하지만, 정작 이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사회적 자산이 풍부한 동네인 귤현동에서 ‘마을활동가’라는 거창한 역할이 아니라,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에 누구나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귤현마을이음’은 사실 ‘단체’가 아니었다. 마을에 필요한 일을 나누고, 일요일 아침 거리를 청소하며 ‘마을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는 주민들의 모임이었다. 올해 초 인천시가 공모한 마을계획 지원사업을 위해 결성된 ‘귤현마을이음’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마을의 동력으로 연결하는 것’은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의견을 모아 사업을 준비했다.

 

8월,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이 마을의 한 빌라에 화재가 일어난 것은 지난 8월 말 햇볕 화창한 일요일 정오가 넘어서였다. 어느 집은 늦잠을 자기도, 어떤 집은 점심을 짓던 그 순간, 불길과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건물을 집어삼켰고, 이웃한 빌라 두 개 동을 태우고서야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사람들은 연기 속 검게 그을린 건물들을 보며 걱정은 하면서도 당장 도와주거나 위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화마로 거처를 잃고, 건강을 잃어버린 이웃들에게 도움을 위한 행정제도와 절차는 너무 더디고 멀었다. 우리는 행동을 위한 마음의 동력을 더해가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화재 소식을 접하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행정력을 이어주는 것, 주민들의 많은 도움의 손과 따뜻한 마음을 한 방향으로 모으기 위해 잘 알리는 것이었다.

화재가 일어난 뒤 얼마 후, 태풍까지 북상하고 있어 ‘귤현마을이음’의 구성원들은 이웃의 재난을 최소화하고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마을 사람들의 컨트롤타워가 되어 피해자들의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공감하고, 필요를 알리며 마을 사람들과 위기를 겪고 있는 이웃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귤현이 빛나는 8월

차가운 도시에서의 삶은 ‘내가 어려울 때 옆에는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슬픔을 주기도 한다. 화재 사건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귤현마을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기도 하고, 살림살이를 기증하기도 하였으며, 이재민들의 텐트 숙소까지 찾아와 생필품과 음식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자원봉사를 위해 모인 주민들은 분진이 많이 날리는 현장에서 살림살이 중 쓸만한 가재도구와 폐기물을 분류하는 것을 돕고, 진화를 위해 흥건히 고인 검은 물을 쓸어냈다.

인간은 이야기를 살아가는 동물이다. 마을은 진행 중인 일상과 이야기의 연결이다.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름도 모르고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이웃들은 피해자를 위한 자발적 모금에 참여하며 ‘힘내세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액수도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함께하는 방법을 성공담과도 같은 이야기로 써나갔고 이 과정은 모두의 마음에 커다란 위로를 주었다.

지역의 업체, 단체와 교회부터, 초등학생의 용돈, 할머니의 마음까지.. 귤현동의 주민들은 스스로 희망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보고, 어둠 안에서도 빛을 발견한다. 세상이 각자도생을 말할 때 우리는 사랑을 보았다.

화재로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과 함께 슬퍼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로를 나누는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회복탄력성(resilience)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주로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코로나19 이후에 중요한 화두인 ‘회복탄력성’은 이웃과의 소통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감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다.

마을에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 보람있었던 것은 다양한 계층, 직업, 연령대의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시간과 경험이었다. 관 주도의 거창한 개발계획이나 정책의 빛나는 결과가 아니라, 삶에서 어려운 경험을 서로에게 나누는 것이 더욱 소중한 순간의 기억으로 남는다.

‘불이 나면 부자된다’는 위로의 말도, ‘귤현동은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들만 있는 곳이에요’라는 말조차 감상적인 말처럼 들릴 것 같아 화재 사고로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한 주민들께 적잖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마음이 굳건해진 뒤 부자가 되는 것은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물질적인 자원이나 경제적 자본은 눈에 보이지만,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즉 법질서 준수와 사회규범,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와 협동심, 거래상의 신용, 윤리의식, 네트워크, 공동체 정신, 소통 능력, 지식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intangible capital)”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귤현동의 8월이 빛났던 이유는, 귤현동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재난을 당한 이웃의 어려운 일을 돕는 동안, 선한 동기들이 모여 그 효용이 빛나는 것을 모두 경험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자본이 축적된 것을 함께 목도했기 때문이리라.

 

마을에 건강한 동력이 되기

화재 사고를 당한 이웃에 대해 공감했던 것처럼 마을에 필요한 일을 도출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관심의 씨앗이 필요하다.

관심이 없다면 생각처럼 공동의 일에 참여하는데 이르기 힘들다. 마을의 문제도 계속 연결되므로 관심이 있다면 분명한 방향성이 생긴다. 마을활동가들도 주민의 한 사람이고 이웃이기에 움직이면 방향이 생긴다. 구성원들은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지애와 보람을 얻었다.

‘아름다운 귤현동 사람들’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마을벼룩시장 인 ‘귤현 좋은 장날’, 2년째 일요일 아침 동네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운동인 ‘귤로깅’을 하며 일상에서도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이런 좋은 사람들과 지역의 사회적인 토양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사업의 목표, 취지, 기대효과를 이야기하면 갑자기 먼 이야기가 된다. 마을공동체로 적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진짜 마을’까지 가는 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의제 도출과 공론화 과정은 생경하기만 하다. 당장 해결도 안 되는데 이야기를 나누자, 모이자 하니 답답하고 생업에 바쁜 참여자들에겐 어렵고 불친절한 법 제도와 느린 행정절차라는 과제가 있다. 마을공동체 사업과 모임들이 행정제도와 사람을 잇는 중간지원조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중간’, ‘지원’이라는 말도 영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을의 일이라고 해도 자기중심으로 남을 줄 세우려고 하므로 쉬이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누구나 자기편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내 편을 얻기가 쉽지 않듯 마을 일이 내일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데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마을에서는 가장 쉽게 내 편을 얻는 것이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다.

나는 ‘귤현마을이음’이 사람들이 공통으로 존중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틀’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느슨한 마당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스태프들이 정해놓은 모범답안을 갖고 조정(coordination)을 하면 다양한 의견을 존중할 수 없게 되고, 불특정 다수의 참여와 동기(motivation)를 유발하려면 방향이 불명확해진다. 동등한 위치에서 협업하기도 만만치 않다.

마을의 의제와 참여하게 될 주민들과의 삶의 거리를 좁혀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가고, 이 결정이 마을에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실현될 거라는 확신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다 친숙하고 작은 그룹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공론장을 다변화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 수고, 에너지가 들겠지만, 우리가 진심 어린 한 걸음을 떼었다면 두 번째는 자연히 앞의 걸음을 따라간다. 우리는 이 걸음에 많은 이웃이 동참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대, 각자도생을 권하는 요즘, 귤현동 사람들의 8월은 그야말로 빛나는 계절이었다. 앞으로 마을공동체 활동들이 어려운 사업의 이름표를 달고 성과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기보다, 이웃과 함께 마을에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상을 함께 겪어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가 마을의 일을 관리하는 컴퓨터 속 폴더 안에는 쓸데없는 욕심과 미완의 민원들, 허무맹랑한 계획, 잡다한 상념이 가득히 담겨있지만, 최상위 폴더명은 Envision Gyulhyeon이다. 귤현지역을 ‘마음에 그리다’, ‘상상하다’, ‘용기를 북돋우’겠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더불어 마을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기대도 담아 본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에서 ‘소유 지향적 삶은 필연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로 귀결되고, 존재 지향적인 삶은 새로운 가치로 채워질 사회를 꿈꾸게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귤현동 사람들이 화재를 당한 이웃에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듯, 마을공동체 활동도 나와 우리의 ‘소유’보다는 일상처럼 함께 ‘존재’하고자 하는 소박한 목표를 꿈꾸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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