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산이 품은 절집, 백련사 · 청련사 ·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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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이 품은 절집, 백련사 · 청련사 · 적석사
  • 김시언
  • 승인 2022.11.0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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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5) 고려산 백련사·청련사·적석사

고려산은 산줄기가 길고 폭이 넓다. 강화읍, 내가면, 송해면, 하점면을 아우를 만큼 산이 거대하다. 봄이면 진달래축제로도 유명한데, 이때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진달래를 보러 오는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코로나19로 인해 축제가 열리지 않았지만 그전에는 산으로 오르는 길 입구와 마을회관 주변마다 차량과 사람이 넘쳐났다. 모든 산이 그러하듯이, 고려산은 가을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산자락에 터를 잡은 절집의 가을도 멋지다.

옛 문서에 따르면, 천축국에서 온 스님이 고려산 정상의 우물에 핀 연꽃을 공중에 던져서 오방색으로 피어난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 흑련사, 황련사. 오방색 연꽃이 피어난 곳에 절집이 생겨났다. 지금은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만 남아 있다. 적련사는 붉을 적(赤)을 쓰는 바람에 불이 자주 났다고 여겨 쌓을 적(積)으로 바뀌어 지금의 적석사가 되었다. 

어느새 가을도 깊어가고 어디론가 잠깐이라도 떠나고 싶다면 가까운 절집은 어떨까. 고려산 백련사, 청련사, 적석사는 하루에 모두 돌 수도 있고, 한 군데를 천천히 살펴봐도 좋다. 보기 드물게 모두 큰 나무가 많고 아주 고즈넉하다. 걷기를 좋아한다면 능선을 타고 걸어도 훌륭하다. 동선은 마음 가는 대로 정하면 된다.

백련사 극락전 앞
백련사 극락전 앞

극락전 앞에는 은행나무 이파리가 가득

시월 마지막 날, 필자는 고려산이 품은 절집 세 군데를 돌았다. 먼저 백련사부터 찾았다. 하점면 부근리 삼거리에서 백련사 방향을 튼 다음, ‘백련사’로 들어가는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이맘때쯤이면 절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가 한창 물들 때인데 어떨지 궁금했다.

운 좋게도 은행나무 단풍이 한창이었다. 주차장 옆에 있는 ‘오련’에서는 차향이 그윽하게 풍겼고, 절집 마당에는 가을 풍광을 감상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극락전 앞은 그야말로 가을 한복판이었고, 사람들은 이곳이 절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감탄사를 연발했다. 극락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ㄱ’자 형태로 팔작지붕의 목조건물이다. 1905년에 건립돼 현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5년에 극락전 뒤편에 있는 부엌 자리에 종무소를 지었다.

조선 중기에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 석주 권필(1569~1612)은 백련사 아랫마을에 오류내에 살았다. 그곳에 초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도 하고 정원과 연못을 가꾸며 시를 짓고 살았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이곳에 살면서 수시로 백련사를 찾았다. 친구와 함께 백련사를 방문해 밤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백련사에서 밤에 앉아 회포를 쓰다’라는 시를 지었다. 절은 고요해 중은 막 선정에 들고/ 산은 맑으니 달빛이 더욱 많아라/ 성근 개똥벌레 어지러운 풀에 붙었고/ 어둑한 새는 깊은 가지에 모였어라/ 씩씩하던 뜻은 외로운 검만 남았고/ 곤궁한 삶의 시름에 단가를 부르노라/ 서울에는 형제들이 있건만/ 소식이 어떠한지 모르겠구나

백련사 극락전 내부

 

‘큰법당’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돋보여

청련사는 고려산 동쪽 기슭, 강화읍 국화리에 있다. 보호수 네 그루가 절을 지키고 있으며, 일년 열두 달 어느 때 찾아가도 고즈넉하다. 국화2리 마을회관 건너편 2차선 도로에서부터 절까지는 1킬로미터 정도 걸린다. 마을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주차장에는 차량이 몇 대가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들은 이곳에 주차하고 절집 뒤로 올라가 적석사나 백련사 방향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봄에 진달래가 한창 필 때는 백련사처럼 이곳에도 차를 대고 진달래가 만발한 지역으로 오르는 사람이 많다.

청련사에 막 도착했을 때, 때마침 부는 바람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이파리가 흩날렸다. 주차장 입구에 떡하니 서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절을 찾는 사람을 반기는 듯하다. 언덕을 올라 절집 마당에 다다르면 그곳에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큰나무 옆에 서면 ‘큰법당’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큰법당은 1979년에 새로 지어졌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큰법당에는 보물 제 1787호인 목조아미타불상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불상이 봉안돼 있고, 후불화로는 근래 제작한 후불탱이 있다. 구법당은 사찰의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청련사에서 제일 먼저 지어졌고 규모도 가장 크다. 이 건물은 1821년 절이 중창되었을 때 건립됐다.

주련도 한글로 써서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련에 쓰여진 글씨는 이렇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바다 물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읽어도/ 부처님 공덕 못하네.’

절집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나 마당 한편에는 벤치가 놓여 있어 마냥 앉아 있어도 좋겠다.

청련사 입구에 있는 큰나무들
청련사 입구에 있는 큰나무들
청련사 한글로 쓰여진 _큰법당_
청련사 한글로 쓰여진 _큰법당_

 

일몰이 멋진 낙조대, 적석사 보타전

해질 무렵, 적석사에 올랐다. 적석사에서 오분 남짓 걸어 올라가면 낙조대가 있어 해 저무는 광경도 함께 볼 요량이었다. 적석사를 오르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처음 가는 사람은 당황할 수도 있으나, 천천히 오르면 문제 없다. 저단 기어로 놓고 천천히 오르면 된다. 적석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적석사 경내를 천천히 조용히 살펴보자.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인공으로 쌓은 높은 석조의 기단 위에 놓여 있는데, 기단 아래에는 굴을 파서 관음굴을 만들었다.

적석사는 고려가 몽골 침입에 대항하면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을 때 임금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또 삼별초의 항쟁 때 다른 절은 피해를 많이 봤지만 적석사는 온전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조호란 때에도 큰 화를 입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 같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삼존불상을 중심으로 후불탱으로 <영산회상도>가 있다.

적석사의 우물 이야기는 유명하다.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는 적석사에는 매우 영험한 우물이 있다고 했다. 1783년에 간행된 김노진의 《강화부지》 등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맑고 좋은 물이지만 재난이 닥쳐올 것 같으면 물이 마르거나 혼탁해져서 마실 수 없다고 했다. 지금도 적석사 법당 오른쪽에 우물이 있고, 근래에는 선암 주지스님이 수각을 짓고 그 이름을 불유각이라고 했다.

적석사 대웅전과 큰나무
적석사 대웅전과 큰나무

범종각 옆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낙조대가 나온다. 낙조대는 강화8경에 들어가고,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고려저수지(내가저수지) 전체가 보이고, 서쪽으로 작은 섬들과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멋지다. 또한 이곳은 적석사 보타전이기도 하다. 석조로 된 수월관음상이 안치됐고, 그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널찍하다. 보타전은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보타락가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적석사 보타전은 관음보살의 성지를 상징하는 유명한 기도처이기도 하다.

저녁 여섯 시, 적석사에서 저녁 타종 소리가 들린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세상만사 시름이 절로 가시는 듯하다.

낙조대에서 바라본 일몰
낙조대에서 바라본 일몰
낙조대 적석사 보타전
낙조대 적석사 보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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