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에 전시관이 자리잡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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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에 전시관이 자리잡기까지
  • 곽현숙
  • 승인 2023.07.25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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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책방거리에서]
(7) 책방거리 전시관
- 곽현숙 / 아벨서점 대표
배다리 아벨전시관

 

2002년 봄, 구청에서 책방 사람들을 불렀다. 집현전, 대창, 국제, 한미, 삼성, 창영서점 어른들과 함께 필자도 참석했다. 김창수 구청장이 구청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나는 ‘우리 책방거리에 전시관이 있었으면 합니다.’ 했다. 김 청장은 “시에 가서 구 살림 돈을 타오려면 얼마나 힘든데 십오륙 억은 가져야 만들 전시관을 이야기 하는가?...” 라며 철없는 구민의 한심한 요구에 어이없어 했다. 

그해 9월, (아벨서점을 다시 시작하려던 1981년, 보증금 없이 책방 터를 내어 주셨던) 인천 양조장 집 최정순 할머니를 찾아뵙고, 비어있는 양조장 2층 공간에 전시관을 만들고 싶다고 어려운 말씀을 드렸다.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시더니, (이층 한쪽에 책 창고를 만들어 쓰는 중이라 또 혼자 뚝딱 거릴 것을 염려하시며) “괜찮아?” “네” “해낼 수 있겠어?” “네 공간만 주시면요” 빙긋이 웃으시며 “무슨 사람이 겁이 없어!, 그럼 해봐야지 뭐.” “잘 해 보겠습니다!”

세대(90대 - 50대)를 넘어서 두 여자의 우정 어린 구두계약으로 양조장 건물에 전시관 역사가 시작된다.

책방거리의 책 전시관은 6개월의 시간과 850만원의 돈을 들여 2003년 2월 18일 (항상 아벨서점을 응원해 오신) 박정희 선생님의 ‘깨끗한 손’ 과 조우성 선생님의 ‘인천 자료’ 그리고 아벨의 ‘오래된 잡지’로 첫 전시가 열렸다.

책방 속에 흐르는 살아있는 문화를 알리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책 전시관이었는데, 의외로 언론보도가 계속 이어가고, 전시를 보려고 오시는 발길들이 신기로웠다. 어느 날 한 어른이 전시를 보면서 허! 감탄사를 하시더니 얼마 후 오셔서 소장하고 계신 책을 기증하겠다고 하신다. 참 난감 했다. 우리 사정이 기증을 받을 사정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당신님 책이 있을 곳은 여기 배다리라고 하신다. 평생을 인천 언론과 역사 연구에 일생을 살아오신 김상봉 어르신이다. 세를 내어 꾸리는 전시관에 인천언론의 자료를 안겨 주셨다.

그 책임감은 2005년 1999년 구입했던 건물이 비워져 전시관을 옮기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2006년 전시관 작업 중 내장할 목재를 재단해서 말리는 중에, 인천시에서 직접 나와 배다리 재생사업으로 모든 건물이 없어지게 된다고 알려왔다. 그제야 주변에 산업도로가 나는지 알게 되었다. 전시관 작업은 중단되고 도로 현장에 살면서 시에 민원을 낸 박태순씨와 하유자씨를 만나게 되면서 함께 2007년 배다리 관통도로 반대를 위한 주민대책위를 만들어 갔다.

이희환 선생의 수고로 토론회가 열리고, 인천시민모임이 만들어지면서, '내일 헐리더라도 오늘 한다'는 마음으로 전시관 작업이 재개되고 책 전시와 시낭송회로 이어 갔다. 2011년에는 박경리, 조봉암 두 분이 전시관에 들어서고, 12년만인 2014년에서야 김상봉 선생 기증 도서 전시를 하게 됐다. 그동안 내 책 잘 있냐고 한 번도 물어온 적 없이 믿어주셨다. 전시를 하면서 소중한 인천언론 자료를 알게 되고, 대중일보 강연회 까지 열어가게 되었다. 김상봉 선생의 기증도서는 이성진 선생의 인천자료 기증도서와 함께 잘 소장되어있다.

 

얼마 전 책 창고에서 작업을 하다가 필요한 것이 있어 책방에 들어서니 학생들이 많이 있다. 어느 학교인가 물으니 논현동에 있는 중학교에서 온 학생들이란다. 해 맑게 웃음을 머금은 여교사의 말이, 애들을 데리고 무조건 배다리 책방거리로 왔는데 어디를 가 봐야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일이 좀 바쁘기는 했지만 학생들과 나가는 선생을 쫒아나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평일에는 닫는 전시관을 열어주었다. 학생들이 아래층 책방부터 좋아라하며 이층 전시관을 올라가더니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보던 한 여학생 입에서 “감성 짱!”이라고 연발한다. "마음이 따듯해진다는 뜻이구나?“ "네!” “왜 그래지는지 이집에 대한 얘기 좀 해줄까?” 선생님이 얼른 “네”하고 답한다.

“이 집은 전쟁 후 1954년에 지어진 집인데, 전쟁 중 폭탄을 맞아 무너진 집들의 벽돌을 가져다가 서양식 벽돌로 조적을 하고, 우리 식으로 흙에 짚을 섞어 5센티 정도로 메질을 다음, 그 위에 하얀 회로 1,2미리 정도 메질을 해서 지어진 건물이야.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바깥 열을 덜 타지. 그 시절에는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정성을 더해 만들었어요. 벽돌이 아주 단단해서 조그만 공기구멍을 만드는 데도 하루 일이 됐지, 그렇게 오랜 건물을 다시 정성으로 가꾸어 내니까 생기가 그득하지?” “네!” “하지만 이 전시관도 혼자는 감성을 못 부려, 사람이 들어서서 따듯한 마음으로 함께 할 때, 세월을 머금은 건물이 숨어있던 감성의 품을 맘껏 벌려 깊은 평안의 빛으로 살아나는 거지. 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학생들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독서를 통해 더 많이 배워나가길 바래."

"자! 오늘 학생들은 배다리에 와서 정성스런 작품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만나 얼마나 진실한 감성을 꽃 피워 내는지를 알아차리고 가는 거야! 맞아요? 선생님!” “네!” “오늘은 여기까지!” 박수로 인사하며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좋아하는 모습에서 나는 맘껏 튀는 청소년들의 맑은 감성을 먹는다. 책 작업 속에서 진실의 글들을 만나 먹듯이.

 

배다리 전시관을 찾은 어린이들
배다리 전시관을 찾은 어린이들

 

배다리를 보존하는데 인천 전역의 사람들이 응원해준 사실을 잊지 못한다. 더불어 이제야 양조장집 최정순 할머니의 젊은이에 대한 우정은 김상봉 어른의 지지를 끌어냈고, 김상봉 어른의 믿음은, 무지한 사람에게 인내를 가르치시고 순수로 은혜를 내려 주신 사실을 읽어낸다. 그러하기에 책방 거리에서의 나의 책방 노작은 깊은 인사의 몸짓 일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내내, 하유자씨, 박태순씨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책방에 흐르고 있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할 인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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