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시간이 그대로 멈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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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시간이 그대로 멈춘 곳
  • 김시언
  • 승인 2023.07.2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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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26) 교동도 대룡시장 - 70년을 한자리서 가게 열어온 안순모 할머니
시간이 멈춘 곳, 대룡시장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외지인에게 교동섬은 머무는 곳이었다. 배 시간도 맞춰야 하고 비바람이 거센 날은 섬에서 나갈 수 없었다. 꼼짝없이 섬에 머물러야 했다. 뭍에 사는 사람도 섬에 일이 있으면 당일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2014년 7월 1일, 교동대교가 생긴 뒤부터는 강화읍내에서 20분만 달리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새로 뚫린 도로를 달려, 검문소에서 군인한테 신분증을 보여주면 바로 교동대교로 진입할 수 있다. 교동대교 3.44㎞만 달리면 교동섬이다. 대교 오른쪽으로는 북한땅이 가깝게 보인다.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하점면 창후리에서 15분 정도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었다. 휴가철이나 주말이면 창후포구 선착장에는 섬으로 들어가려는 차와 섬에서 나오는 차가 뒤엉켜 아주 복잡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렸다. 당시 창후포구는 어시장을 비롯해 가게들이 즐비했다. 갈매기들은 정박한 배 주변에 진을 쳤다가 배가 달리면 새우깡을 먹으려고 몰려들었다. 지금 창후포구는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한 채 한적한 마을이 되었다. 다행히 새로 어시장이 지어졌고, 그 앞으로 교동대교에 이르는 도로를 공사하고 있으니 조만간 사람들의 발길이 더 많아질 것이다.

필자가 운전을 막 시작할 때, 배로 교동섬을 여러 번 들어갔다. 후진해서 배에 탈 때마다 진땀이 흐르고 손발이 바르르 떨렸다. 물결이 거센 날은 거센 대로, 갯벌이 드러난 날은 드러난 대로 어찌나 무섭던지. 좁은 선착장에서 후진해서 배에 올라타면서도, 꼭 가고 싶은, 꼭 가야만 하는 섬이었다. 섬이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내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은 아니었지만, 한국전쟁 때 헤어진 형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었다. 구청에 이산가족 상봉을 원하는 신청서를 넣고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결국 연락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교동섬은 넓은 들판과 시원한 공기, 바다 냄새가 섬 전체를 감싼다. 2,766명(2023년 6월 현재)이 47㎢의 면적에서 살고 있다. 고구려 때는 고목근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에는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였다. 조선시대(인조 11)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해 경기, 충청, 황해도까지 전함을 배치하는 해상 전략상 요충지였다. 개풍군과는 이십 리 떨어져 있다. 또한 연산군, 광해군, 세종 임금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유배를 간 곳이기도 하다.

 

주말에 대룡시장은 인파로 복잡하다
대룡시장 안은 주로 먹거리가 대세를 이룬다

 

대룡시장은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

대룡시장은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마치 영화세트장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사람 손이 많이 갔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 보니, 여기저기 사진 촬영을 위해 포토존을 곳곳에 마련해 놨다. 또한 꽈배기 호떡 강정 등 관광객이 쉽게 허기를 채우면서 재미를 볼 수 있는 먹거리가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교동을 들어가고 나오는 차가 줄을 잇는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이뤄졌다. 모레면 휴전선이 그어진 지 70년. 대룡시장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잠시 터전을 만든 곳이다. 연백군에서 교동섬으로 잠시 피난 온 사람들이 당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먹고살기 위해 만든 곳.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을 고스란히 담았는데, 이는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골목시장 모습을 그대로 본따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룡시장 입구 중 하나
대룡시장 입구 중 하나

 

유일하게 남은 실향민, ‘만물가게’ 안순모 할머니

대룡시장 안에 ‘만물가게’가 하나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게 다 있다. 안순모 할머니(92)가 주인장. 할머니는 1·4후퇴 때 아버지와 동생 둘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볼음도로 내려왔다가 무학리 사는 형부가 교동으로 오라고 한 것. 어머니와 동생 둘은 연백군에 그대로 머물렀고. 할머니는 70년 동안 이제나저제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여기 시장 있는 데가 다 밭이었어.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가게를 하나둘 만든 거지. 집을 짓다 보니 아주 작게 지었어.” “대룡 사거리 화장품가게라고 하면 다 통했어. 우리 집 아저씨가 얼마나 깔끔하게 장사를 잘했는지 몰라. 아모레 화장품, 잡화, 문방구를 팔았는데 교동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할머니는 섬사람이 꼭 필요한 물건을 팔았다.

안순모 할머니는 금강산 여행이 자유로울 때 금강산을 다녀왔다. “애들이 보내줘서 다녀왔어. 금강산 들어가니까 눈물이 나더라구. 헤어진 엄마 동생 보고 싶었어.” 지난해에는 교동에 생긴 화개산전망대도 다녀왔다. “망원경으로 북한땅을 보니까 엄마 생각도 나고 동생 생각도 났어. 세상 잘못 만나서 식구들이 다 헤어져 산 거야. 식구들이 그리웠지. 너무너무 그리웠어.” 그립다는 말, 슬픈 말이었다.

 

대룡시장1_70년 동안 한자리에서 가게를 한 안순모 할머니
70년 동안 한자리에서 가게를 한 안순모 할머니

 

좁은 시장 골목길을 걸을 때

대룡시장은 전쟁 때 잠깐 몸을 피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을 고대하던 곳이었다. ‘잠시 머물 곳’이었다. 당시에 먹고살기 위해 점포를 차렸던 실향민은 다 돌아가시고, 가게 몇은 실향민의 자손들이 가게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가게는 외지에서 장사하러 온 사람이 그자리를 메웠다.

대룡시장이 생긴 지 어느덧 70년. 주말마다 대룡시장 골목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이 무심히 걷는 대룡시장 골목 골목에는, 70년 전 당장 먹고살기 위해 시장을 일구고 애썼던 실향민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서 잠깐, 실향민이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바빴을지, 북한땅을 바라보며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아주 잠깐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대룡시장2_안순모 할머니 가게
안순모 할머니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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