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해진 여름, 초록을 더 예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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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해진 여름, 초록을 더 예찬해야겠다
  • 고진이
  • 승인 2023.08.0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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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칼럼] (11) 8월, 초록색

녹음이 절정에 이르는 8월, 사랑하는 여름의 중심에 다다랐다. 아찔한 햇빛과 쏟아지는 폭우에도 여름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왜 하필 여름이냐고 하면, 우거진 초록빛에서 살아있음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즘의 여름은 확실히 예전보다 더 과격해졌다. 이러한 과격함은 지구가 아직 살아있기에 보내는 신호임에 이번 여름이 좀 더 무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내가 사랑하는 여름과 그 색인 초록에 대해 더 예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진정으로 공감할 때 좀 더 그 존재를 소중히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여름 낮, 초록색 양산을 쓰고 아무도 없는 공원을 혼자 산책한 적이 있다. 양산에 드리우는 초록색 빛과 그림자를 보며 걷는 길이 꼭 이 세계처럼 느껴졌다. 강렬한 매미 소리가 고요히 느껴지고 열기를 띤 잔잔한 바람에 슬로우모션처럼 나뭇잎이 나풀거리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쓰고 있던 양산을 잔디에 내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인상을 기억에 담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완성된 2018년 작인 ‘영원한 들’은 기존에 해오던 작업보다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편이라 전시에 걸거나 공식적으로 공개한 적이 거의 없지만 남몰래 무척 아끼는 그림이다. (그림1)

 

그림1_고진이, 영원한 들(Eternal Field), oil on canvas, 91x117cm, 2018
그림1_고진이, 영원한 들(Eternal Field), oil on canvas, 91x117cm, 2018

 

한동안 바쁜 날들이 지나가고 여름의 기쁨도 잠시 잊고 지내다 지금의 작업실에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이사 온 겨울에는 2층 작업실 앞에 있는 나무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여름이 오자 창을 가득 메운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잎과 마주하게 되었다. 온종일 넘실거리는 플라타너스의 녹색 춤을 보고 있으면 내면에 다시 힘이 차오름이 느껴졌다. 여름의 생명력이 그 움직임에서 느껴졌고 즐겁게 그 움직임을 따라 붓을 움직였다. 느닷없이 비가 내리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맑은 하늘이 비치는 대기가 작업실 창을 통해 확장되었다. 과거에는 공간을 직사각 상자로 규정했는데, 점차 그 공간이 밖으로 끝없이 뻗어가며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담긴 ‘팽창된 공간’ 시리즈 중 5번 작품은 여름의 녹음을 머금은 작품이다. (그림2)이 작품은 이미 소장자를 만나 출가했는데, 어딘가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넘실거리길 수 있길 바란다.

 

그림2_고진이, 확장된 공간.5 (Extended Space.5), oil on canvas, 91x116.5 cm, 2021
그림2_고진이, 확장된 공간.5 (Extended Space.5), oil on canvas, 91x116.5 cm, 2021

 

요즘은 사선으로 기울어진 형태의 캔버스에 공간의 물리적인 본성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도해보고 있다. 비슷한 작업만 반복하다 보면 결국 자기 복제를 하는 창의적이지 못한 작가가 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직 더 탐구하고 새롭게 표현하고 싶은 세계가 크다보니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시도를 끊임없이 해보게 된다.

나이가 한살 한살 먹어갈수록 ‘새로움’이 무서워지는 어른의 감정이 들 때도 있지만 이를 계속 넘어 한걸음 씩 나아가려 애쓰고 있다. 우리 눈이 공간을 보는 방법으로 인해 공간을 소실점을 기준으로 사선으로 왜곡해서 보게 된다. 공간을 캔버스에 담는 작업을 해오며 어쩌면 직사각형의 프레임이 안정적이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선으로 기울어진 프레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한 프레임 안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과 그림자의 흔적을 표현한 ‘Memory Hole'은 여름에서 온 작품이다. 일렁이는 초록 그림자와 강렬한 태양 빛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여러 번 물감층을 겹쳐 표현했다. 좀 더 우리가 보는 방식에 가깝게, 자연스러운 초록처럼 우리와 관계된 세계를 담고 싶다.

 

그림3_고진이, Memory Hole.3, oil on canvas, 각변 60cm, 2023
그림3_고진이, Memory Hole.3, oil on canvas, 각변 60cm,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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