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노예에서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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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노예에서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비밀
  • 최원영
  • 승인 2023.08.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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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118화

 

새장 속에 사는 새는 주인이 없으면 죽습니다. 혼자 사는 법을 새장 속 새는 모르니까요. 이게 새장 속에 사는 새의 운명입니다. 대중에게 박수를 받기 위해 노래 부르는 가수나 표만을 의식하는 정치인들 역시도 새장 속의 새일 수도 있습니다. 박수와 표가 사라지면 홀로서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노래하는 가수나 국민의 행복을 위해 구석구석을 다니며 법을 만드는 일이 너무나도 즐거워하는 정치인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중으로부터 박수가 사라져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아가 노래를 즐겁게 부를 것이고, 비록 낙선했다고 해도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정치인은 자신의 또 다른 역할을 찾아 구석구석을 다니며 국민의 행복을 위한 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 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엄마가 대신해주어 아무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이들의 삶 역시 새장 속의 새의 삶일 뿐입니다. 편한 것 같지만 사실은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강신주 교수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는 서암스님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 깨끗이 씻은 다음에 방에 앉아 이렇게 자문자답을 합니다.

“주인공!” 하고 부르고는 스스로 “예!”라고 답합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라고 답합니다.

“남에게 속지 마라!” 그리고 “예!”라고 답합니다.

평생 수행한 스님도 스스로를 매일 아침마다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며 자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어라’라는 말이나 ‘남에게 속지 마라’는 말도 사실은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무언가에 홀려 있으면 본질을 망각하게 됩니다. 돈에 홀리고 권력에 홀리고 명예에 홀리는 순간 자신이 왜 살아 있는지 즉, 삶의 본질을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돈과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살아야만 합니다.

성직자가 자신의 사원을 세상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짓겠다는 욕심에 마음을 뺏기면 그때부터 신도들은 자신이 구제해야 할 사람들로 보이지 않고 오직 돈으로만 보일 겁니다. 시주나 헌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잘사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를 원할 겁니다. 이는 성직자의 본질을 잊어버린 겁니다. 이런 이유로 ‘깨어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삶의 본질을 잊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성직자를 찾아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당신께서 그 자리에 올라가셔야만 우리의 사원이 다시 부흥할 겁니다. 나설 자격도 없는 많은 성직자가 그 자리를 탐내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말에 성직자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사원의 부흥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이 한 몸 불태우리라, 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한 자리를 놓고 경쟁자들은 서로를 ‘성직자’가 아니라 우리가 타도해야 할 ‘적’으로 판단합니다. 이제 누구 하나는 죽어야만 끝나는 추악한 싸움판으로 바뀌는 순간이 된 겁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허물을 찾아내 떠벌리거나 부풀려 말하고 없는 사실도 있는 것처럼 포장해야 합니다. 상대 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 성직자의 본래 목적을 잃고 눈꼴 사나운 싸움판으로 바뀌는 겁니다.

정치판 역시도 똑같은 이유로 혼란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요. 생각과 이념이 다른 것은 국민의 행복을 위한 방법이 다른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적’으로 보고, 적군인 너를 없애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국민을 현혹시킵니다. 그래야 내가 이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새장 속에 사는 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작은 새장과도 같은 세상 속에 사는데 그 안에서 성직자이면 뭐하고, 박수받으면 뭐하고, 새장이 크면 뭐하겠습니까? 그저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희롱하고 조종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나는 새장 속의 새와 다를 바 없는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새장 밖을 나와 저 높은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새장 속에 갇힌 것도 모른 채 서로를 비난하며 손가락질이나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자신이 노예로 살아가는지도 모른 채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서암스님은 ‘남에게 속지 말라’고 꾸중을 하고 계십니다. 그저 ‘못생긴 나무일지라도 산을 지켜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못생긴 나무도 때가 되면 땀을 뻘뻘 흘리며 산나물을 뜯던 사람이 땀을 식히기 위한 그늘을 찾을 때 그에게 선뜻 그늘을 내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게 삶의 본질입니다. 이런 삶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종교의 본질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들이 더 많기에 오늘날까지도 종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 역시도 자신의 입지보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분들에게 큰 박수와 응원과 지지를 보냅니다. 이런 분들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너’에게까지 향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비밀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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