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소금, '진염'의 섬,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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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소금, '진염'의 섬, 신도
  • 김정아
  • 승인 2023.10.2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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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닥속닥 인천설화]
(22) 나란히 어깨동무한 섬, 신도 시도 모도

인천 앞바다 나란히 떠 있는 세 섬, 신도·시도·모도를 합쳐 신시모도 삼형제섬이라 부른다.

연도교로 이어진 신시모도 삼형제섬은 1955년 이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분리된 섬이었다. 땟마(작은 전마선)로 왕래를 하거나 간조 시에 2시간씩 드러나는 징검다리를 통해서만 왕래할 수 있었지만 2002년 세 섬을 잇는 연도교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마치 하나의 섬처럼 여행할 수 있게 됐다.

 

모도_25.0x36.5cm_종이위채색_2023
모도_25.0x36.5cm_종이 위 채색_2023

 

신도 시도 모도, 각각의 지명에는 사연이 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신도는 신시모도 삼형제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섬이다.

명칭 유래를 보면 주민들이 착실하고 순박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또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고 서로 믿고 살아간다는 뜻으로 신도(信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명은 진염(眞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진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북도면 벗마을, 염촌이라는 곳이 있다. 마을 앞은 바둑판같은 광활한 문전옥답이어서 섬마을이면서도 농촌형태를 갖추고 있다. 염분(鹽盆)이 있던 갯벌이라 하여 벗마을[鹽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만들던 소금은 그 품질이 뛰어나 소금 중에 참 소금이라 하여 진염이라 하였고, 이곳 사람들을 진염 사람이라 불렀다. 현재도 논벌 중앙지점인 소금창고가 있던 지역에 ‘벗개’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옛날 진염의 고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도_25.0x36.5cm_종이위채색_2023
신도_25.0x36.5cm_종이 위 채색_2023

 

주민들의 입도 시기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광이 발견되어 한 때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의 피난민이 많이 거주하였다. 국영목장(國營牧場)으로 운영되었으나 구한말에 목장이 폐장되어 염전을 논으로 만들기 시작하게 되었고, 6·25전쟁 이후 피난민의 생계대책으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논벌이 형성되었다.

 

시도_36.5x25.0cm_종이위채색_2023
시도_36.5x25.0cm_종이 위 채색_2023

 

두 번째로 만나보는 섬은 시도(矢島). 동쪽과 서쪽으로 300m 거리에 신도와 모도가 있으며, 살섬이라고도 부른다.

지명은 화살섬이라는 뜻으로, 고려 말에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가 강화도 마니산 기슭에서 이 섬을 과녁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화살이 발견된 지점에 화살탑이 세워져 있다.

본래 살섬의 옛 지명은 고서에 거도(居島) 또는 거을도(居乙島)등으로 표기되어 전해져 오다가 시도(시도)라고 불리워지면서 옛 화살과 깊은 관계가 있는 섬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도와 모도 이야기는 11월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참고: 인천광역시홈페이지, 네이버지식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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