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풀리고 7년 무관세, 인천해관 창설 후 생겨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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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 풀리고 7년 무관세, 인천해관 창설 후 생겨난 것들
  • 류소리 객원기자
  • 승인 2023.11.0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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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속으로]
(5) 개항장 관지계석 / 인천해관 진구보단(인천시립박물관)
인천in이 인천시립박물관과 협력하여 본관 및 분관 소장 유물들을 탐사하고 독자·시민들에 소개합니다. 인천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박물관 속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유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지 알아보며 지역 역사문화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섯번째 순서는 시립박물관 본관 소장 개항장 관지계석과 인천해관 진구보단입니다.

 

관지계(關地界)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작은 포구였던 제물포로 외국인과 일거리를 찾는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정부는 외국인의 출입국 사무와 개항장의 질서 유지를 위해 감리서를 설치하고,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 해관을 설치했다.

아울러 감리서가 있던 내동을 중심으로 관립 인천항 외국어 학교와 인천부 공립소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화폐를 찍는 전환국, 우편업무를 관장하던 우체사, 국립 대한천일은행 등이 설립되면서 내동 일대는 개항장의 중심이 되었다.

 

관지계(關地界)(시립박물관)

 

관지계(關地界)는 20세기 초, 인천 제물포 해관(지금의 세관) 부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워 높았던 표지석이다.

지계석이란 땅의 경계를 가리키는 돌을 의미한다. 해관 지계석은 해관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해관 건물과 창고 주위에 세웠던 표지석이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해관의 경계를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개항과 관세 행정의 시작

외국과 교역하는 상품들에 대해 부과하는 관세는 국가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고, 수출기업을 보호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관세정책을 강력한 수단으로 써왔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고립의 길에 있었던 조선은 이러한 세계 정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따라서 1876년 일본의 개항 요구를 수습하기에 급급한 정부에서는 관세 문제를 대비할 여력과 사람이 없었다. 이로 인해 무관세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일본 상품과 일본을 거쳐 들어온 제3국 상품은 조선의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고, 이 땅의 농수산물은 일본 상인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차츰 조선정부도 불공정한 무관세무역의 폐해와 관세 부과의 중요성은 인식하게 되고 1878년 ‘두모진 판찰소’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극렬 반발한 일본이 함포를 동원한 무력시위를 전개하자 중단되었다. 조선정부에서는 1880년경부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본측에 수 차례에 걸쳐 조약개정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2년 미국·영국 등 강대국과 체결한 통상조약에서 조선의 관세 자주권이 인정됨에 따라 일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약개정을 위한 협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일통상조약에 서명함으로써 7년간의 무관세 시대를 마칠 수 있었다.

 

인천해관의 창설

조선정부는 일찍이 관리들을 보내 일본의 세관제도를 연구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관세행정조직인 해관을 모델로 조선해관을 창설키로 한다. 그리고 청나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국해관 경력의 통역관인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차관급) 겸 총세무사(현재 관세청장)로 임명했다.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에 가서 해관원, 엔지니어, 경찰 등 가운데 필요한 인원 20여 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중 제1진이 1883년 6월 16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조선 최초의 근대식 세관인 ‘인천해관’을 창설하게 된다. 인천세관은 현재 이 날을 인천세관 개청일로 기념하고 있다.

한편, 인천해관의 초대 세무사(현재 세관장)로는 영국인 스트리플링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관세 부과는 해관 창설 후 5개월이 지난 11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관세율은 품목별로 5단계로 나누어 5~30% 정도였는데, 수입물품뿐만 아니라 수출물품에 대해서도 관세가 부과되었다. 특산품인 홍삼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으며 수출관세도 가장 높았다.

 

인천해관 진구보단

인천해관 진구보단
인천해관 진구보단

 

인천해관 진구보단(進口報單)은 1897년 9월 16일, 일본 상인이 인천해관에 제출한 문서이다. 인천항(仁川港)의 수입 통관 자료이다. 한지 목판본 양식지에 묵서로 내용을 기입하였다. 이용한 선박은 오와리마루이며, 중앙에 기호, 건수 등의 항목에 해당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오와리마루는 일본우선회사 소유의 선박이다.

인천해관 진구보단은 상품을 수입할 때 세관에 수입의 내용을 신고하는 수입신고서다. 진구(進口)는 수입을 의미하며, 수출은 출구(出口)라고 표기한다.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진구보단은 종이에 푸른색 잉크로 서류 양식이 인쇄돼 있고, 수기로 해당 사항을 기입하는 방식이다.

서류에는 연대와 해당 상품을 들여오는 배 이름과 화주, 화물의 종류와 수량, 가격 그리고 배가 출발한 발선지 등으로 기록한다.

시립박물관 소장 진구보단은 모두 1890년대의 것으로 화물은 대부분 나가사키와 고베에서 수입됐고, 운송 선박은 모두 일본우선회사 소유 선박인 오와리마루(尾張丸)호로 돼 있다.

수입 물품을 인천해관에 신고하는 서류인 인천해관진구보단(仁川海關進口報單) 십수 점이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이 서류에는 함석, 백동과 같은 자재류나 맥주, 생강, 미역, 와사비 등 다양한 식품류들이 수입됐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해관에서 세관으로

1904년 러일전쟁일 발발하자 일제는 한일정서와 한일협약 등을 강제 체결하고 재정고문, 외교고문 형식으로 일본인들을 파견하여 한국정부를 감시했다. 이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의 주권과 외교권은 상실되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재정고문으로 왔던 일본인 메가다는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대부분의 외국인 해관원들은 한국을 떠났다. 한국의 해관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세관 행정을 일본식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해관’이라는 명칭도 공식적으로 ‘세관’으로 바뀌게 된다. 1908년 총세무사는 철폐되고 대신 관세국을 설치해 탁지부 소속에 두었고 관세총장이 세관사무를 감독하도록 만들었다.

 

인천세관 역사관

시립박물관의 관계지석과 인천해관 진구보단으로 세관에 관심이 생겼다면 인천세관 역사관 방문을 추천한다. 복원된 세관창고와 부속건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건물은 인천세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이며 인천세관 구 세관창고와 부속동명칭으로 제 569호 국가문화재지정이 되어 있다.

 

인천세관 역사관
인천세관 역사관
인천세관 역사관 - 세관창고의 건축 기초
인천세관 역사관 - 세관창고의 건축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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