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언론탄압에 항거... 해직기자의 치열한 삶
상태바
유신정권 언론탄압에 항거... 해직기자의 치열한 삶
  • 김윤식
  • 승인 2023.11.1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11) 수재 중 수재 박순철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인천in이 이달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고 박순철 시사저널 편집장(한국기자협회 제공)
박순철 시사저널 편집장(한국기자협회 제공)

 

세상을 놀라게 한 서울대학교 전교 수석 입학

인천중학교 8회. 제물포고등학교 5회 졸업생 박순철(朴淳鐵 1942∼ )은 1961년 3월 13일 아침, 자녀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서울의 학부모들 입에서 “서울에서 못 된 것만 보지 말고 저 학교로 가자”는 말을 올리게 한 주인공이 된다.

아니, 서울뿐 아니라 이날 조선일보 조간 1면 사회 만평과 함께 쓰인 이 구절을 읽는 전국의 학부모들로 하여금 찬탄과 선망과 경이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전국 최고의 유명 고3 수재 학생으로 알려졌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서두를 다소 호들갑스럽게 여는 것은 불과 개교 5년, 인천의 신생 제물포고등학교 졸업생 박순철이 당당히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 입학의 영예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서울대학교 전교 수석 입학이라면 말 그대로 손꼽히는 서울의 한두 학교가 맡아서 하던 일이었는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일개 지방 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이 차지했으니, 온 세상 사람들은 놀라 감탄을 하고 혀를 내둘렀던 사실을 다시 한번 널리 세상에 고해 보고자 하는 내심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박순철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공계통 우수학생이었거나 의학계, 또는 법학계 지망생이 아니라 문리대 철학과를 택한 순수 인문학 학도였다는 점이다. 나라 안의 모든 인재가 모인다는 그런 학과 지망생들을 모조리 뒤로했다는 그 놀라움도 더욱 전 국민을 입 다물지 못하게 했다.

 

1961년 3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 (박순철이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이 알려지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
“서울에서 못 된 것만 보지 말고 저 학교로 가자” - 1961년 3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이 알려지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

 

당시 박순철의 서울대학교 최고득점 입학이 얼마나 세상에 회자되었는지, 다른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자. 「수재 중의 수재 박순철 군」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같은 날짜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이다.

금년도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영예의 수석 합격을 한 수재 중의 수재는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출신 박(朴淳鐵=20) 군이었다.

총 응시자 1만4천6백77명 가운데서 608점(700점 만점)을 획득하여 그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한 박 군은 인천 송림국민학교와 인천중학을 줄곧 1위로 졸업한 천재이며 제물포고등학교 재학 중엔 클럽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어 교내 자치 활동을 멋있게 해온 민주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물상을 경영하는 아버지 박(朴允萬=49) 씨와 온유한 어머니 슬하에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 가운데서도 면학에 뛰어난 재치를 보여 왔었다. 아버지는 “그 애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줄 몰랐지만 그의 친구들의 입을 통하여 똑똑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고 그다지 놀라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최종 학급의 담임선생은 “그는 교우가 많으나 두뇌가 명석하고 감성이 예민하여 항상 치밀한 계획과 사고력을 발휘해 왔었다.”고 말했다.

어학과 수학 성적은 늘 최고였으며 문학적인 관찰력과 아울러 음악에도 남다른 취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학 시절에도 늘 1위를 차지하던 그가 고등학교 3년에 와서 5등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때문에 선생들은 염려도 했으나 서울대학에서 최고 득점자가 되고 보니 새로운 놀라움을 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공계통에도 관심을 잃지 않겠으며 철학과 문학을 전공할 생각입니다.”라고 그의 첫 소감을 이런 포부로써 마치었다.

 

박순철. 1961년 졸업 앨범 사진(제물포고 제공)
1961년 졸업 앨범 사진(제물포고 제공)

 

 

 

 

 

 

 

 

 

 

한편 이해 같은 서울대 입학생 중에 제물포고 출신으로 단과대학 수석 합격자였던 홍우일(洪又一)의 소식도 여기에 간단히 적는다. 홍우일은 서울대 약학대학을 수석 입학했는데, 박순철의 전교 수석이 워낙 센세이셔널했던 까닭에 그 영광스럽고 기쁜 소식이 가려지고 말았던 안타까움이 있다.

 

동아일보 입사와 해직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박순철은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상아탑 속에서 공부한 인문학도답게 사회 정의에 대한 웅지와 이상을 품고 1967년 기자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그의 기자 생활은 1975년 초로 막을 내린다.

1961년 5·16쿠데타에 의한 군사정부 시절과 뒤이어 유신 정부 시대로 이어진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정권의 언론 탄압에 항거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유신 정권은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을 통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운동을 제압하려 했다. 이 같은 탄압은 그해 12월 중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가해져 동아일보에 대한 기업의 광고 해약이 속출했다. 12월 26일자 신문에는 이 사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단 광고 지면이 텅 빈 이른바 백지 광고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와 시민들은 격려 광고와 돕기 운동을 통해 동아일보를 응원했지만, 광고 탄압이 장기화하면서 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동아일보는 1975년 3월, 일부 부서 폐지와 함께 기자들을 해고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박순철도 포함된 것이다.

정치부 기자였던 박철순은 실제로 유신 정권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을 기사를 여러 번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해직 기자 명단에 끼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광고 사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동아일보 경영진으로서도 박순철 기자가 부담스러운 존재의 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1974년 8월 1일자에 6·25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중 오스트레일리아가 제일 먼저 북한을 승인한 데, 여기에 대해 박순철은 우리 정부의 ‘외교 무능’을 꼬집으며 ‘적극적인 공세 외교로 전환’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고, 광고 탄압이 한창일 때인 그해 12월 17일에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통일당 최고위원 윤제술 전 국회부의장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입을 빌려 “억지로는 하지 말라, 상대방을 눌러가며 돌진하지는 말라는” 말을 교묘히 기사화하기도 했다.

 

1974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정부 외교 문제를 비판한 박순철의 기사)
1974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정부 외교 문제를 비판한 박순철의 기사)

 

그뿐이 아니었다. 정치부 기자라면 물론 당연히 기사로 써야 할 일이겠지만, 1974년 12월 20일 광주광역시 소재 신민당 전라남도당에서 열린 개헌추진 전남지부 현판식에서 김영삼 총재의 “오늘의 난국을 자초한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하루빨리 개헌을 해서 난국을 타개해 놓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박 대통령 스스로를 위해, 정권의 자리에서 하야하는 것이 명예로운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연설을 고스란히 옮겨 동아일보 1면 기사화한 박순철이 썩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순철 기자는 광주, 대구, 청주에서 벌어진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 개헌추진 현판식을 모조리 취재했는데, 특히 1975년 1월 9일, 청주시에서 있은 충북지부 현판식에서 김영삼 총재가 ’언론 탄압의 방법으로 동아일보 광고주에 압력을 가해 동아일보가 경영난으로 스스로 문 닫게 하려 한다‘며 유신 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한 직격 내용 보도도 또한 편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박순철은 기자로서 언론의 원칙, 정도, 양심을 좇은 결과 직장을 잃었고, 이로써 그의 이름 앞에는 ’해직 기자‘라는 수식이 따라붙게 된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 길영희 교장이 ”조불때기가 되지 말라.“고 훈시하시던 말씀 그대로 박순철은 조불때기가 아닌, 거인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것이 삶의 방책을 버리는 길일지라도 그는 그 길을 걸은 것이다.

『吉瑛羲 선생 追慕文集』에 박순철 자신은 이렇게 썼다.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공업화와 경제 개발은 인간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익과 해로움에는 밝아도 옳음과 그름을 단호히 가리고 신념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일에는 갈수록 몸을 사리게 됐다.“

 

1998. 7. 15. 경향신문(경향신문 오피니언 필자에 든 박순철)
1998. 7. 15. 경향신문(경향신문 오피니언 필자에 든 박순철)

 

또 다른 삶

천직으로 알았던 기자직을 잃은 박순철은 번역일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춥고 외로운 시절을 견뎠다. 해직 이후인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그는 세상을 잊으려는 듯, 학창 시절의 철학, 문학, 미학을 공부하던 순수의 세계로 되돌아온 듯, 아주 정력적으로 번역과 저서 출간, 칼럼 쓰기에 몰두한다.

1977년 6월, 그는 미국의 저술가 톰 울프의 『The Painted Word』를 『현대미술의 喪失』이란 제호로 번역해 열화당에서 출간했다. 1979년 2월 파울 클레의 『Über die moderne Kunst』를 번역한 단행본 『현대미술을 찾아서』를 발간했고, 이어 1979년 5월에 피에르 호세 저 『초현실주의』를 연속해서 번역 출간했다. 그해 9월 W. 슈피스의 『막스 에른스트』를 번역했고, 1980년 7월 M. 아브루제세의 『프란시스코 고야』를, 1980년 11월, E. 페찌 저 『르노아르』를, 1981년 2월 자크 마리땡의 『조르쥬 루오』를 열화당 미술문고로 연속해서 번역 출간했다.

박순철이 특히 미술 관련 서적 번역에 손을 댄 것은 아마도 대학 철학과에 다니면서 특히 문학, 미학 관련 성향으로 그 공부에 힘을 쏟은 영향이었을지 모른다. 한편 이공계 쪽 책도 더러 보이는데,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전교 수석을 차지하고 나서 경향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끝머리에 ”이공계통에도 관심을 잃지 않겠으며 철학과 문학을 전공할 생각“이라고 한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박순철은 번역과 저술로 오히려 더 부지런히, 그리고 더 치열하게 살았다.

박순철은 1980년대 초, 한국산업연구원 연구위원, 개도권(開途圈)연구실장 등을 거쳐, 태국 방콕국립대학에 유학해 2년간 경제학을 연구하고, 유엔 캄보디아 난민구조기구(UNBRO) 특별사업조정관을 지낸다. 1980년대 말, 마침내 언론으로 돌아와 시사저널 편집부국장을 지낸다. 이후 1992년 9월 문화일보 논설위원, 그리고 1994년 10월에 다시 시사저널 편집국장 겸 주간이 되면서 이사직에 오른다.

박순철은 시사저널의 편집을 책임지면서 두 번의 의미 있는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다. 그 첫 기사가 1989년 10월 25일에 있었던 조순 부총리와의 대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조 부총리는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개혁, 경제의 균형화, 공정화, 정상화, 민주화, 국제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말이 아마 박순철이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두 번째는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잠롱 태국 방콕 시장과의 대담이었다. 1980년 8월 1일. 방콕시청에서 잠롱 시장과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내용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이나 박순철 기자가 혹시 방점이라도 찍어두고 싶었을지 모르는 구절만을 인용해 본다.

나는 돈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쓰는 방법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픽업트럭 위에서 손을 흔들고 다닌 것밖에는 없습니다. 음악을 크게 틀어 사람들이 듣고 집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는 꽃다발도 갖다주고 과일도 갖다주며 격려를 했습니다. 트럭 위에 타고 다니니까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거비용은 모두 9천5백 바트(약 28만 원)가 들었습니다. 그중 5천 바트는 입후보 등록비였습니다. 나머지 4천5백 바트는 주로 벽보를 붙이는 데 들었지요.

’선거운동은 어떻게 했는가, 또 선거비용은 얼마나 썼는가‘ 하는 박순철 국장의 질문에 대한 잠롱 시장의 답변이었다.

내 자신이 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과 부하직원들이 돈의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공무원들을 위한 교육과정이 있는데 ‘공무원의 희생정신’이라는 과목을 신설해서 내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8천 명을 가르쳤습니다.

이 또한 ‘부패를 없애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 끝부분이었다. 거짓 없는 잠롱 시장의 고백을 들으며, 우리 자신도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잠롱 시장은 두 달 후 10월, 경실련과 시사저널 공동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강영훈,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고건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과 면담하고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1994년 10월 12일 경향신문(저서 '시간의 춤' 신간안내)
1994년 10월 12일 경향신문(박순철 지음 '시간의 춤' 신간안내)

 

만년의 모습

박순철은 으뜸이면서도 자기 존재를 현시(顯示)하지 않는다. 길영희를 닮아 행색이나 언행이나 외식이 없다. 언제나 천의무봉(天衣無縫)! 받순철은 하늘의 직녀가 짠 원단이다. 그는 천연스레 천마산(天摩山) 기슭에서 살고 있다. 솔기 없는 옷을 걸치고 오늘도 그는 숲의 소리를 들으며 거닌다.

黙守知存道! 친구여! 그대 묵묵히 있으니 거기 도(道)가 깃들어 있음을 알겠네.

이 글은 박순철의 제물포고등학교 동기동창 장성중이 그를 기려 쓴 글로, 젊은 시절 세상을 놀라게 했던 ‘수재 중의 수재’ 철학도의 晩年 ‘自然’ 그대로의 풍모를 읽게 한다.

박순철은 자신의 저술로 『도덕이라는 이름의 자본』 『시간의 춤』 『생명의 틈새』를 남겼다. 물론 여러 편의 경제, 산업 관련 논문, 또는 세미나 주제 발표문도 남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