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대한 고민... 공감 놓지 않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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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대한 고민... 공감 놓지 않고 싶어"
  • 채이현 기자
  • 승인 2023.11.13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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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 사람들] 제주 4.3 다룬 '나, 죄어수다' 전시 이규철 사진작가
'나, 죄어수다' 전시가 열린 관동갤러리 앞
'나, 죄어수다' 전시가 열린 관동갤러리

 

‘비극’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연극)의 장르로서, 어떤 인간이 신의 뜻 혹은 운명으로 인해 인생의 파멸, 핍박, 엄청난 고통 등을 겪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 비극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벗어나기 위해 불굴의 의지로 애쓰지만, 이런 노력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씌워진 운명의 사슬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예정된 결말을 향해 질주하도록 이끈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실패를 ‘비극’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 사회에서도 ‘비극’이라는 표현을 자주 목격한다. 대체로 끔찍한 일, 큰 재해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는데, 사용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비극은 참사 자체보다 참사를 마주한 인간의 몸부림에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주 4.3사건은 참혹했던 사건 이상의 비극적 의미를 갖는다. ‘살아남은 자들’이 끈질기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무고함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90살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는 판사 앞에서 ‘나 죄어수다(나는 죄가 없소)’라고 쩌렁쩌렁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어이 무죄를 인정받았다.

12일(일) 오후 2시 인천 관동갤러리(중구 신포로)에서 <나, 죄어수다> 전시를 마무리하는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세월이 깃들 얼굴들이 사진으로 걸려있는 고즈넉한 갤러리에서 이규철 사진작가를 만났다.

 

이규철 사진작가
이규철 사진작가

 

- 사진작가로서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부터 관심이 있어 참여한 것은 아니고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제주도는 여행으로 찾는 곳이었죠. 그러다 2016년에 제주도로 이주한 친구가 ‘중산간 프로젝트’라는 작업을 한다며 사진 워크숍을 제안했어요. 제주도 주민 15명, 서울사람 15명으로 30명 정도가 참여했던 것 같아요.

일단 중산간이 뭐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부터 물었죠.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한라산 지역을 중산간이라고 부른대요. 당시 정부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마을 사람들에게 해안가로 내려오라는 명령(소개령)을 내리면서 군인과 경찰들이 투입됐대요.

하지만 중산간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모든 걸 버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막막하고, 가만히 버티자니 소란이 하루 이틀 안에 잠재워질 일도 아니니 고민스러웠겠죠. 일부는 내려가고, 일부는 숨고 그랬죠. 결국 중산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몰려서 죽이거나 잡아갔다고 해요.

사살되지 않고 재판에 끌려갔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관련 자료가 90년대에 세상에 드러나면서,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진 사람이 2,530명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하더라고요. 어떤 사건을 글이나 영화로 접하는 것과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듣는 것은 완전히 달랐어요.

 

- 4.3 사건 피해자이자 생존자들의 사진으로 전시를 여셨는데, 역사적 증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초상 형태가 굉장히 적절해 보이는데요?

▲워크숍 이후, 개인적인 활동을 이어가던 중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아는 분께서 저에게 같이 제주에 가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알겠다 하고 따라가 보니, ‘재심청구(4.3수형 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청구서)’를 하려고 사람들이 모인 날이었어요. 4.3도민연대를 중심으로 변호사도 선임하고, 어떻게 재판을 해 나갈 것인지 얘기들이 나왔죠. 그동안 개별적으로 재심청구를 한 적이 있지만 다 기각됐었다 하더라고요. 그 후로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해서, 18분이 함께 재판을 요구하기로 한 거죠.

사진을 찍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판은 사진도 못 찍는데, 어쩌다보니 재판에 참관을 하고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솔직히 “내가 여기에 뭐 하러 오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면서 재판에 갈 일이 거의 없기도 하고, 맡은 일이 따로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다 차차 생각을 정리했죠. 그래 한 번 들어보자, 책으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직접 증언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낫다, 사진 찍는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고요.

초상 사진은 사실 식당에서 찍은 거예요. 재판 때문에 만날 때마다 가는 식당이 있었는데, 이 분들이 연세도 있고 하니까 인물 사진을 찍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천을 가지고 가서 설치를 하고 찍었거든요. 그 때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너무 즐겁고 편안해보이셨어요.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니까 4.3도민연대 측에서 증언을 정리하기 위해 개인별로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 장소 바로 옆에 의자를 세팅해 놓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여기 잠시 앉으셔요" 라고 하고 10분 정도 사진을 찍었어요. 그 사진들은 식당에서 찍은 것과는 많이 달랐어요. 피해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낸 직후의 감정, 불안, 공포, 원한, 회한 같은 것들이 그대로 들어가 있더라고요. 전시회 제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70년의 억울함을 풀어 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기록이 되었으면 해서 이 사진들로 전시를 하게 됐죠.

 

이규철 작가와 승리의 눈빛들을 가진 사람들의 초상
이규철 작가와 승리의 눈빛을 가진 사람들의 초상

 

- 전시 사진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찍으셨다는, 함께 즐거웠던 때의 얼굴 사진도 선물하시면 다들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재판에 참여하시고 무죄판결을 받으신 분들 중에 임창의 할머니가 계세요. 그 분이 돌아가셨는데 가족 분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생전에 찍으신 사진 중 가장 최근 사진이니까 가족들이 간직할 수 있게 사진을 보내주겠느냐고요. 그 연락을 받고 반성을 했어요.

사진을 다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어떤 형태로 인쇄하고, 어떤 액자를 써야 되나 고민하면서 샘플만 여러 개 만들어 놨었거든요. 작품 완성도보다 중요한 게 빨리, 필요한 곳에 드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가지고 있는 사진들을 A4사이즈의 종이액자 형태로 작업을 해서 2개씩 도민연대로 보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전해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재심을 청구하기까지 이 분들의 마음고생도 심했거든요. 살 만큼 살았는데 이제 와서 뭘 더 밝히겠다고 하냐, 그래도 너는 살아남아서 네 인생 산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어야 했고요. 가족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숨기고 계셨던 분들 같은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전시회에 왔다가 친할머니의 사진을 보고서야 알게 된 손녀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시를 제주도에서 처음 했는데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 사진이 당사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해서요. 걱정과 달리 다들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내 얼굴이 작품으로 걸렸다면서요. 제주도에 묻혀있던 슬픔, 억울함, 분노가 소위 말하는 ‘지역적 폐쇄성’의 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이 전시를 육지에서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0차례 정도 진행한 것 같아요.

 

- 이 길고 긴 프로젝트가 작가님께는 무엇을 남겼나요?

▲4.3도민연대에서 활동하시는 분께 여쭤봤어요. 당시 공산주의 세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은 200-300명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을 잡으려고 사정없이 3만 명을 희생시켰다는 사실이 너무 참담했어요. 48년부터 54년까지 7년 동안에 벌어진 일이죠.

지금도 이런 일들은 반복되고 있어요. 현재진행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봐도 그래요. ‘하마스’를 잡겠다고 그들과 관련 없는 민간인들만 계속 죽이고 있어요.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공감하려는 노력을 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늘 숙제 같았고, 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버하지 말고, 나대지 말고, 할 일을 열심히 하자 그런 마음가짐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숙제가 끝나질 않네요.

인천 전시회도 별도의 준비를 했어요. 서울에서 한 걸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인천에 계셨던 분들과 특별히 인연도 있고 해서. 인천형무소로 오신 분들은 그 옛날에 제주도에서 어떻게 왔을까, 생각하면서 기차도 찾아보고, 배타고 왔다갔다 세 번은 한 것 같아요. 반항하지 말자,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해요.

 

- 사진 속의 눈빛을 보면서 이 분들이 단순히 희생자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긴 어두움의 끝에서 승리하신 분들이니까 승리자로 기억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작가님이 작품을 볼 때 너무 깊은 슬픔이나 안타까움에 빠지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승리의 눈빛, 좋네요. 잘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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