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동 채석장에서 키운 꿈, 250톤 거석 조각가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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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련동 채석장에서 키운 꿈, 250톤 거석 조각가로 우뚝
  • 유사랑
  • 승인 2024.01.0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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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사람들]
(19) 한국의 미켈란젤로, 조각가 김창곤
- 유사랑 / 시사만평가·자유기고가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김창곤 조각가
김창곤 조각가(김보섭 작가 촬영)

 

거대한 석상, 거친 재료의 원형성을 살리다

서산 가로림만의 둥근 바다 끝으로 꾸역꾸역 침몰해 들어가는 붉은 해를 바라보다가 까닭 모를 서러움과 공포가 왈칵 어린 가슴으로 밀려들면, 저녁 짓던 어머니 치마폭에 뛰어 들어 오래 흐느끼곤 했던, 유년시절 조각가 김창곤의 예술적 감수성은 노는 것조차 또래 아이들과 달랐다. 양식사업 외에도 상선까지 여러 척 부리던 선주집 아들로 유복했던 그는, 배를 건조하거나 고장 난 배를 수리 중인 거친 배 목수들 틈에서 그들이 쓰다 놓아 둔 끌이며 망치로 나뭇조각을 깎다가 손가락을 잘릴 뻔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 뼈마디를 타고 뚝뚝 번지던 붉은 핏방울의 기억은 지금껏 그의 뇌리 깊숙이에 박혀있다. 어쩌면 그 아찔한 기억들이 조각가 김창곤을 여기까지 벼려온 운명의 볼모가 된 건지도 모른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를 꿈꾸며 이탈리아의 카라라까지 날아가, 세계 최고의 예술적 재능들 틈에서 지중해의 돌들과 오래 씨름하기도 했던 조각가 김창곤(제고 18회). 사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미켈란젤로를 넘어섰다고도 할 수 있다. 무르디물러 조각하기 편한 지중해산 대리석에 그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웬만한 정이나 망치쯤은 쉽게 튕겨 내버릴 만큼 단단한 조선의 화강암, 그것도 100톤을 훌쩍 넘기는 집채만 한 핵석(核石-core stone)에 그는 벌써 십여 년째 꽂혀 지낸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966-1, 소위 아마니고개 삼거리를 지나다보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거대한 석상 수백 기가 우뚝 서있다. 바로 조각가 김창곤의 연천작업실이다. 그곳에 가본 사람은 누구나 단박에 깨달을 것이다. 예술의 정점이 ‘조탁박복(彫琢朴復)’이라면 그는 분명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깎고 다듬는 예술의 완성은 결국 원시적 통나무(원형)로의 환원으로 귀결된다.

그는 젊은 시절 의욕에 사로잡혀 섬세하게 깎고 다듬던 고아(高雅)를 내던지고, 거친 재료의 원형성을 자연 그대로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창조적으로 담아내는 데 혼신을 기울인다. 구구절절 드러내지 않고도 돌덩이 그 자체만으로 뭉텅이째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지, 미켈란젤로조차 혀를 내두를 수준에 그는 저만치 올라서있는 것이다.

 

연천군 전곡읍 김창곤 조각가의 작업장

 

교정 ‘대망상’ 재학시절 제작... 지금도 교정 지켜

김창곤이 고향 서산을 떠나 제2의 고향인 인천 송월동으로 이주하게 된 건, 부친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송월초등학교 4학년 때, 절개지에서 퍼온 진흙으로 꽃무늬 장식의 항아리를 만들어 상을 받더니, 중학 시절엔 적산가옥에서 주워온 화강암으로 누이를 모델로 소녀상을 깎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원래 과제인 비누조각은 너무 시시해, 송림공구상가에 버려진 변변치 않은 쇠붙이를 연장 삼아, 그 단단한 화강암 조각을 해낸 것이다. 지금 봐도 중학생이 제작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소녀상에 감탄한 미술 선생님의 폭풍 칭찬은, 그의 재능을 더욱 춤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 때는 아예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서 교정에 세울 조형물을 그에게 의뢰했다. 당시로서는 꽤 거금이랄 수 있는 5만원의 제작비를 책정해, 어린 2학년 재학생에게 작품을 맡기는 파격을 제안한 것이다. 재능을 나이로 따지지 않는 스승의 안목과 겁도 없이 그 파격에 팔을 걷어붙일 줄 아는 제자의 배짱이 놀랍다.

김창곤은 미술부 후배들을 동원해 옥련동 채석장의 견칫돌들을 손수레로 실어 날라, 여름방학 내내 '소녀상'을 제작했고,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제물포고등학교 교훈을 주제로, 횃불을 들고 날개를 펼친 천사의 모습을 한 '대망'상(천사상)을 완성한 것이다. 철골로 형체를 뜨고 그 위에 백시멘트로 직조하는 독창적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 '대망'상은 비록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50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지금껏 모교의 교정을 지키고 서있다.

 

제물포고 교정의 '대망'상.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물포 교정의 젊음 . 김창곤 작가의 홍대 미대 2학년 재학 때 작품이다.
제물포 교정의 '젊음'상 . 김창곤 작가의 홍대 미대 2학년 재학 때 작품이다.

 

기울어진 집안 형편 탓에 월미도 간척지와 연안여객터미널, 인천항 부둣가 등지에서 행상도 하고 아이스케키도 팔던, 인천에서의 유년시절이 꼭 잿빛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선창을 놀이터 삼아 철모르고 쏘다니던 봄날의 기억이, 늦은 여름밤 가로등도 없던 자유공원을 넘어 송월동으로 내려가다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꾸었던 달큰한 꿈들이, 물선 이국땅의 바닷가에서도, 문득 만나게 되는 인생의 절망스런 모퉁이에서도, 따뜻한 위로로 되살아나 마음을 덥혀주었던 까닭이다.

홍익대학교 조소과로 진학한 김창곤은 대학 4년 내내, 인천에서 신촌까지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를 통학했다. 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려 다시 시흥신촌 간 107번 버스를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덕분에 캠퍼스의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머릿속이 온통 미켈란젤로 같은 조각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젊음을 상징화한 조형물로 투창 선수로 뛰던 후배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지금도 '대망'상과 나란히 서있는 조각 작품 '젊음'상(창던지는 사람)이 대학교 2학년 때 작품이다.

사실 그를 진짜 조각가로 잔뼈를 키워준 건 대학이 아니었다. 송도유원지 근처 옥련동 채석장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부리나케 통학코스를 되짚어 옥련동 채석장으로 향했다. 당시 옥련동 돌산 중턱에 위치해 있던 채석장은 앞이 바로 바다였다. 그는 시퍼런 인천바다를 바라보며, 맘에 드는 커다란 돌덩이를 골라 손이 짓무르도록 돌을 쪼았다.

채석장의 석공들이야말로 그의 진짜 스승들이었다. 돌의 질을 분석하고 결대로 쪼는 노하우는 물론이고, 하루 10개 이상 마모되고 부러진 정들을 다시 화덕에 달궈 날이 서게 벼리는 법도 모두 그곳 석공들로부터 배웠다. 무엇보다 가난한 예술가의 연습재료인 돌들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어, 김창곤에겐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 석공들 역시 이 젊은 대학생의 자질을 간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예 채석장 한편에 그의 전용공간을 배려해주고, 그가 제작한 작품들도 보관할 수 있게 편의를 봐줬다.

 

연천 작업장에서 

 

마침내 미켈란젤로의 작업지, 카라라의 미술학교 입학

이탈리아 유학을 가슴에 품은 건, 고교시절 전기작가 로망롤랑의 책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를 읽다가 미켈란젤로가 카라라 채석장에서 작업했다는 걸 알고부터다. 그 유명한 다비드상의 재료도 카라라의 돌이었다는 사실은 김창곤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그런 김창곤의 꿈에 불을 지른 소식이 날아든 건,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이태리 유학 중이던 대학 선배 유영교 조각가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한창조 조각가와 카라라에서 만나, ‘조각하기에 최고의 환경’이라며 친한 후배들을 불러 모으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지만 김창곤한텐 그림의 떡이었다. 어떻게든 카라라에 가고 싶어 궁리 끝에 인사동 송원화랑(지금의 노화랑)에서 ‘도불전시회’라는 명목으로 조각개인전을 열었다. 국전에 출품해 수상한 작품과 옥련동 채석장에서 만든 작품 등을 골라 총 12작품을 급하게 전시했지만, 유학자금은커녕 외려 화랑 대여료를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단 한 작품도 팔리지 않은 채, 생애 첫 개인전이 허망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조각에 관한한 하늘을 찌르던 그의 자신감도 함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무거운 돌덩이들을 어찌어찌 다시 끌어다, 당시 작업실로 쓰던 북성동 신일아파트 반지하에 가져다 두고는 한숨을 쉬고 있는데, 전시장에도 다녀갔던 제고 선배 조일도 연극 연출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배다리 남포치과 원장, 영제한의원 원장, 그리고 영등포의원 원장 등을 소개시켜 주며 찾아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시회 때 조악하게 만든 리플릿을 보여주며, 체면불구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사주십사 읍소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던가, 영제한의원 노두식 원장이 선뜻 작품 가운데 제일 큰 국전당선작 등 무려 9점을 구매해준 것이다. 그렇게 비행기 삯과 1년 반 생활비 70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만만치 않은 돈을 마련해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꿈에 그리던 카라라 입성은 쉽지 않았다. 당초 이탈리아 유학을 주선했던 한창조 선배가 파리에 눌러앉아, 카라라행을 차일피일 미뤘기 때문이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우선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시험을 쳐 입학했다. 과거 로댕이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유명한 학교였지만, 김창곤의 마음은 오매불망 카라라뿐이었다. 결국 1년 만에 때려 치고 혼자 이탈리아로 날아가, 로마국립미술학교로 적을 옮겼다. 지금은 홍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형우 교수와 한방을 쓰면서 로마에서 다시 1년을 보낸 끝에, 마침내 카라라미술학교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애초 목표로 했던 카라라에 기어이 입성한 것이다.

전 세계 재능들이 몰려있는 그곳에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조각에만 몰입했다. 최고의 기후와 환경, 그리고 질 좋은 하얀 이태리산 대리석들, 조각가들의 편의를 안성맞춤으로 제공하는 시스템과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전시들, 일이 끝나면 카페에 모여 정보와 툴을 교환할 수 있는 카라라는, 가히 조각가들의 천국이었다.

유학을 떠난 지 무려 7년 만인 1988년 귀국해, 지금껏 조각계의 거장으로 활발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김창곤은, 동덕여대 금속공예과 장미연 교수와 결혼해 웹툰작가로 활동 중인 아들과 금속공예가인 딸을 두고 있다. 그의 장인은 동덕여대 교수를 역임한 미인도의 대가 장운상 화백이고 장모는 덕성여대 교수를 역임한 이신자 섬유미술가이자 예술원회원으로, 3대가 전부 예술가 집안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창곤은 유학 중이던 1985년, 제7회 카라라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1등을 차지했고, 2018년에는 제32회 김세중 조각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 겸임교수, 경원대 환경조각과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김창곤
김창곤 조각가

 

마지막 바람, 인천 ‘김창곤 거석조각공원’ 건립

김창곤의 작품세계가 거석을 소재로 일대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양평종합운동장 건설현장을 지나다 우연히 ‘핵석(核石)’과 마주하고 부터다. 감자 캐듯 땅속에서 건져 올린, 둥근 공룡알 같은 거대한 핵석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당장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자, 절친인 박은관 시몬느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돌 좀 사주라’는 김창곤에게 박 회장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덜컥 수천만 원의 돌값을 송금했다. 김창곤의 거석작업이 지금껏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박은관 회장의 이런 지원 덕분이다. 박 회장은 그 이후로도 수십억의 제작비를 꾸준히 김창곤에게 지원해주고 있다.

거석작업은 돌을 작업장까지 옮기는 데만, 100여대의 특수트레일러와 대형트럭, 초대형크레인이 동원된다. 큰 것이 무려 250톤을 훌쩍 넘기기도 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거석작업은 순간순간 위험이 따르기 일쑤다. 작업물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다 손이 으스러질 뻔한 적도 있고, 2층 높이의 돌 위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적도 있다. 수년전 수술 받은 척추는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부자유스럽게 한다.

그래도 그는 하루 온 종일,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아슬아슬한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돌을 쫀다. 아마 죽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가끔씩 이해되지 않는, 이 해괴한( 거대한) 고행을 결코 멈출 도리가 없으리라. 평생을 걸려 해온 일도, 또 할 줄 아는 일도 오직 돌을 깎고 쪼는 일뿐인 걸 어쩌랴? 조각은 그에게 인생 그 자체고, 황홀한 신세계고, 빠져 나가려야 나갈 수 없는 무궁의 감옥이다. 그에게 예술이란, 아크로코린토스 산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자신의 유년이 지금도 구석구석 살아 숨쉬는, 처음 자신을 조각가의 운명으로 이끌어 준 제2의 고향 인천에 ‘김창곤 거석조각공원’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의 예술세계에 감화된 여러 인사들이 음으로 양으로 이일을 위해 뛰고 있다. 2만여 평의 공간에 그의 거대한 거석작품들이 들어설 꿈에, 70을 목전에 둔 그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다.

 

고교 동기들이 김창곤 작가의 작업장을 방문했다.
고교 동기들이 김창곤 작가의 작업장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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