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상록수' - 중3때부터 이끌어 온 가재울야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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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상록수' - 중3때부터 이끌어 온 가재울야학당
  • 김윤식
  • 승인 2024.01.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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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사람들]
(20) 심재갑 전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수 - 김윤식 /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심재갑 교수
심재갑 교수

'살아 있는 상록수(常綠樹)'

위 제목에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이것이 신문 기사의 제목을 빌려 썼기 때문이다. 원출처는 1962년 5월 18일 자 경향신문인데, 이 신문사에서 그해 향토문화 공로상 수상자 18명의 프로필 소개 기사를 연재하면서 제목으로 썼다.

이 상은 본래 당시 공보부(公報部)에서 ‘농촌의 계몽과 경제진흥을 위하여 헌신 노력해 온 향토문화 공로자’를 표창하는 것이 취지였다. 각 도에서 추천한 122명 중에서 도별로 2명씩 총 18명을 선발해 시상했는데, 경기도에서는 ‘인천중학교 6년제 5회 졸업생 심재갑(沈載甲, 1933~ ) 전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수’와 또 한 사람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으로 유명했던 경기도 광주(廣州)의 농민운동가 고 김용기(金容基) 씨가 수상자였다.

심재갑(29․인천시 가좌동 261) 인천중학 3학년 재학 시절에 벌써 가좌농민학원을 창립하였으며 그의 집 사랑방에서 미취학 아동을 모아 가르쳤다. 아이들이 많아져서 사랑방에서만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염전창고를 빌려서 가르쳤는데 그때 학생은 187명이다. 두 동생을 가진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에 입대하였다가 제대한 후 가좌농민학원장에 피임되어 61년 10월부터는 미 군사 원호처의 원조를 받아 교사 건축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년 5월 18일 자 기사
경향신문 1962년 5월 18일 자 기사

 

이것이 당시 경향신문에 게재된 심 교수 관련한 기사 전문이다. 매우 간략하게 나와 있어 이대로는 상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우나, 심재갑 교수가 벌여 온 서구 가좌동에서의 농민운동, 교육 계몽운동은 지금까지도 인천 지역에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심 교수가 제목 그대로 ‘살아 있는 상록수’가 된 것은 바로 심훈(沈薰)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 때문이었다. 1948년 심 교수가 인천중학교 3학년 재학 당시 담임을 맡았던 국어과 이인수(李仁銖) 선생으로부터 『상록수』 소설 강의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심 교수는 이 소설 강의에서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온건하면서도 내심 강직한 성품으로, 하고자 결단을 내린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 뚝심의 행동가 심 교수는 국어 시간 소설 『상록수』 강의에서 받은 감명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해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에 가지 못한 가좌동 동네 어린이 13명을 모아 방학 20일 동안 야학(夜學)을 연 것이다. 나어린 중학 3년생의 미거(美擧)를 기특히 여긴 담임 이인수 선생은 각 교실 강의시간마다 이 사실을 전파하여 인중 전교생에게 알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가좌동 야학봉사에 모든 것 바친 대학시절

인중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해서도 심 교수는 계속해서 이 야학을 이끌었다. 특히 방학 때에는 초등반, 중등반으로 나누어서 대규모로 야학을 열었다. 물론 여기에는 의기투합한 동기생의 열성적인 도움이 있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인천중학교 동창이자 나란히 서울법대에 입학한 김수열(金洙烈) 동기였다. 심 교수는 방학 중에 김수렬 동기를 아예 자택에서 숙식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심재갑, 김수렬 두 동기생은 대학 시절, 황금 같은 방학 시간을 가좌동 야학 봉사를 위해 고스란히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고쳐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심 교수가 진정 ‘상록수’가 되기에 이른 것이 꼭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감동에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선대인 심운섭(沈雲燮, 1899~1966) 선생이 펼친 브나로드(v narod) 운동 정신과 모범이 아들 심 교수에게 이어진, 부자 2대에 걸친 유전이었음도 밝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심운섭 선생의 선구적 행보를 밝힌 『인천고 인물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심운섭 선생은 현 인천고의 전신인 인상(仁商) 출신이었다.

그는 인상을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25세쯤 고향 마을의 文盲率이 높은 것을 참지 못하고 문맹 퇴치 운동에 나섰다. 또한 한국의 브나로드운동이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이에 동참하여 가좌동 261번지(신진말) 자택 사랑채에다 가재울강습소를 열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선구자인 셈이다. 이곳에서 자신도 가르치고 인상 출신 동창들을 초빙해 가난한 주민들이 교육 혜택을 못 받는 한을 풀어 문맹 퇴치와 더불어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후에 그는 강습소를 확장해 원적산 줄기 아래인 지금의 가정초등학교 자리에 교실과 운동장을 구비한 학교 형태로 확장하여 주민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 인용문을 보면 부자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생각,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계몽운동을 하였던가,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실제 심 교수의 고백을 들으면 더욱 부자 2대의 유전임을 느끼게 된다. 다시 『인천고 인물사』의 기록을 인용한다.

아버지하고 동네 분들이 만든 가재울강습소라는 것이 나중에 석남초등학교를 만드는데 모태가 되고 저의 아버님이 초대 기성회장이 되고 건립위원장 뭐 이런 직책을 맡으셔서 하셨죠. 그런 걸 제가 어렸을 때 봤어요.

이렇게 일찍이 부친이 벌인 문맹 퇴치 계몽운동과 학교 설립 같은 봉사의 영향이 어려서부터 심 교수의 의식 안에 내재해 있다가 이인수 선생의 『상록수』 소설 강의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해 가좌농민학교 설립으로 발화(發花)했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는 후일 심재갑 교수가 교사로 재직하던 제물포고등학교 생도들의 후원을 받으며 1962년 드디어 현대식 건물을 지어 낙성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해에 가좌농민학교의 현대식 교사 신축과 더불어 정부로부터 ‘살아 있는 상록수’로서 향토문화 공로상을 수상하는 두 가지 경사가 겹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모두 ‘선(善)’이요 ‘진(眞)’이라고 생각한 일을 실행에 옮기는 뚝심과 봉사 정신의 결과였다.

 

초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업적도 괄목

여기서 또 한 가지 서울 법대 3학년 시절, 심재갑 교수가 보인 뚝심의 모습을 보자. 1954년 심 교수는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 내의 일이기는 했지만, 그가 총학생회장이 되어 이룬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학은 12개 단과대학이 분산되어 있다가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종합대학을 상징하는 통일된 배지가 없이 단과대학별로 제각기 제작된 것을 달았다.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뭉쳤다면 우선 배지부터라도 통일되는 것이 당연한데, 각 단과대학이 여전히 과거부터 패용하던 것을 고집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난제에 접한 심 교수는 공청회를 열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각 단과대학 회장들을 설득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종합대학 서울대학교의 상징으로서 배지 통일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것은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심 교수는 1969년 2월 12일, 서울대학교총동창회 창립 석상에서 서울대 총장, 12개 단과대학장,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많은 동문 후배로부터 축하와 찬사를 받기도 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정장(正章)
현재 서울대학교 정장(正章)

 

- 국민방위군 자원 입대, 참상 기록 출간, 희생자 위령탑 건립운동

사회 정의와 참된 공공의 목적이라면 의연히 나서는 심 교수의 면목은 6․25 사변과 국민방위군 자원 입대, 그리고 국민방위군희생자위령탑 건립 운동 같은 데서도 드러난다.

1950년 민족의 비극 6․25 사변이 발발하자, 인중 5학년 18살 나이로 심 교수는 국민방위군에 자원 입대해 제주도에서 6개월간 복무한다. 이때 스승 길영희(吉瑛羲) 선생을 제주도에서 만나 뵙고 전쟁 중의 국가 장래와 시국담, 그리고 학교의 미래와 심 교수에 대한 군 복무 격려 등 여러 말씀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심 교수는 국민방위군 복무 당시 이른바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 소금국으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로 이불을 삼는다’는 극도로 열악한 국민방위군의 현실과 그 속에서 아사자(餓死者), 병사자(病死者)가 속출하던 참상을 기록해 『국민방위군일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들의 죽음이 헛되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에서 국민방위군희생자위령탑 건립 목표를 세우고 단신으로 운동을 벌여 무려 5천6백여 명으로부터 서명, 인장을 받는다. 비록 애초의 목적을 달성치는 못했으나, 심 교수는 당당히 이 탄원서를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질로 해서 심 교수는 한때 정치에도 발을 들여놓았었다. 온갖 견제와 방해와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1973년 2월 27일에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로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명 야당’의 기치를 들고 통일당(統一黨) 후보로 나섰으나, 공화당의 유승원(柳承源) 후보, 신민당의 김은하(金殷夏) 후보에 이어 3위로서 그 의욕이 좌절되고 만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유신헌법에 의해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는데, 경기도 제1선거구로 편성된 인천시는 두 사람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어제와 오늘, 우리 정치 현실을 살펴볼 때, 일부 사람들은 이 같은 심 교수의 실패 사실을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정치에 휩쓸리며 만에 하나라도 ‘살아 있는 상록수’의 이미지가 손상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길영희 교장이 인중, 제고의 교훈으로 부르짖은 ‘소금’과 ‘등대’의 역할을 심 교수가 나서서 그대로 보여줄 것을 내심 기대했던 사람들은 못내 안타까워하고 분해 했다.

 

길영희 교장선생님과 함께
길영희 교장선생님과 함께

 

이후 1984년 2월, 5공 정권의 2차 해금 후, 재야의 신당 창당 움직임들이 있을 당시 추진 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건수(韓建洙) 씨가 당사자인 심 교수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인천의 조직책 2인 중 한 사람으로 심 교수를 명단에 올리기도 했었으나 그 이상 정치와는 담을 쌓았다.

 

총동창회, 길영희 교장 추모사업에 전념

심 교수는 자신의 모교이면서 13년간 교사로 재직했던 인중과 제고의 발전은 물론 총동창회와 스승 길영희 교장 선생에 대한 추모 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덧붙이자면 선배 유훈(兪焄) 전 회장이 닦은 총동창회 제반 사업의 발판 위에 심 교수가 그 꽃을 피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심 교수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2회에 걸쳐 인중·제고총동창회장을 연임하면서 먼저 유훈 전 회장이 창간한 총동창회보를 연 4회 발행으로 늘렸다. 인천 지역은 물론 한국사회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동문들의 활약상과 모교의 발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16면, 24면으로 증면을 꾀하는 한편 발행 부수를 늘려 널리 동문 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했다.

 

인중·제고 총동창회장으로 아르헨티나지부 방문 시(1990. 1. 26.)사진: 황준호(고 5) 동문 제공
인중·제고 총동창회장으로 아르헨티나지부 방문 시(1990. 1. 26.)
사진 = 황준호(고 5) 동문 제공
인중·제고 총동창회 정기총회_맨 오른쪽이 당시 심재갑 총동창회장(1990. 5. 26.)
인중·제고 총동창회 정기총회_맨 오른쪽이 당시 심재갑 총동창회장(1990. 5. 26.)

 

1999년에는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익년, 길 교장 선생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동상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모교 교정에 동상을 세웠다. 일개 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의 동상을 동창회가 주동이 되어 세운 학교는 아마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외에 전국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별도의 전기(傳記)에서 자세히 언급할 내용이나, 심 교수의 인중 동기생 김창식(金昌植) 전 오공본드 회장이 1억 원을 쾌척하여 2000년 11월 25일 모교 교정에서 성대한 동상 제막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가화(佳話)도 있었다.

정치에 입문하면서 자주 정당 활동과 관련하여 주요 신문 지상에 동정이 오르내리던 심 교수는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으면서는 주로 길영희선생추모문집 독후감 현상 공모와 그 시상식 관련해서만 기사가 실린다. 그만큼 동창회와 길 교장 추모사업에만 전념했던 까닭이다.

 

동아일보 1999년 11월 25일 자 기사
동아일보 1999년 11월 25일 자 기사

 

전국 남녀 고교, 대학생을 대상으로 독후감을 공모하여 시상하는 이 사업은 길 교장의 교육 이념과 인재 양성을 위한 민주적 교육 방식을 이해하게 하며, 선생의 인간성과 이상을 널리 세상에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심 교수가 가장 열성으로 이끈 사업의 하나였다.

 

모교 교사 시절의 '큰 형님' 사제 관계

심 교수는 모교 인중과 제고에서의 13년간 교사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로 생각한다.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 시절, 반(班) 제자들이 친형님, 큰형님 따르듯 해준 추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 같은 사제 관계의 성립은 아마도 엄하거나 근접하기 어려운 ‘교사’ 모습만이 아니라, 제자이면서 후배인 학생들에게 넓게 열어준 다정한 ‘큰형의 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같은 큰형으로서 沈 교수가 베푼 교육 방법은 학생들 입장에서 매우 유쾌하면서도 친밀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 학생들이 결성한 그룹별 대항 야구시합, 연례 인천 주변 명소 캠핑 같은 협동심,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행했던 까닭이다. 지금으로서는 여건상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캠핑지로는 옛 개건너(가좌동), 송도, 영종도, 부천 계수리, 김포 장릉, 덕적도 등지였다.

거기에 매 학년마다 발간하던 학급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학급지는 인천의 남녀 고등학교 1학년 각 반에도 배포되었다. 여학교인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천여상 등에도 배포하여 건전한 펜팔을 장려하기도 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혹 누가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이라면 이러한 심 교수의 훈훈한 인간적 교수법을 머리에 두고, 오늘날에 적합하게 응용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심 교수는 오로지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의 발전, 그리고 수만 동문들의 건승, 그리고 영원한 스승 길영희 교장에 대한 다함 없는 흠모로써 만년(晩年)을 보내고 있다. 초년부터 지녀온 상록수의 푸르름은 여전히 퇴색하지 않은 채…. 그리하여 논어 자한편의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이 지음의 모습이다,

沈 교수는 1970년 8월, 오랜 지역사회 봉사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350년 고택 관해각. 심재갑 교수의 선대 심운섭 선생은 이곳에 가재울야학당을 열어 미취학 아동 및 성인교육을 시행했다. 관해각은 1600년대 후반기 건축된 이래 수차례 증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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