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돼야, 그 사람이 나타내는 예술도 훌륭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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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돼야, 그 사람이 나타내는 예술도 훌륭한 예술"
  • 김락기
  • 승인 2024.01.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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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1) 한국 서예의 맥을 잇다 - 고 원중식 서예가
- 김락기 / 역사연구자

 

고 남전 원중식 서예가
고 남전 원중식 서예가(사진= 연합뉴스)

 

소박하면서도 근본에 충실한 예술가

“뭐 사실 저는 서예가 뭐 전각가고 실제로 뭐 작가로서의 지금 무슨 삶을 살지 않고 또 여제까지 살아온 것이 그걸 뭐 하나 생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을 안 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뭐 사실은 내가 좋아서 그냥 하나의 생활의 일부로 사는 방법으로 살고 있어요……또 내가 바라던 본래 생활이 그런 자연하고 살면서 내 사람을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 살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일부로 서예라는 것이 내 삶의 가치로 부여받는 생을 살기 위해서이지 내가 서예를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그건 생각이 다릅니다…”(아르코예술기록원 원중식 1차 구술채록문)

스스로 이처럼 소박하고 겸손하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각 분야 예술가의 삶과 작품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추린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활동이 그만큼 사회적 평판과 가치를 획득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님에도 말이다.

남전 원중식 선생(1941~2013)이 바로 이런 분이다. 한국 서예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서 수많은 스승, 선배와 더 많은 후배, 제자와 교유한 큰 인물인 만큼 남전 선생의 생애를 조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arko)의 기획으로 2009년 11월 3일과 15일에 인터뷰한 상당한 양의 자료를 아르코예술기록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어 남전의 생애와 여러 사안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의 구술을 통해 그 생애를 따라가 본다.

 

제고 미술반 활동과 스승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남전은 인천 부평에서 태어나 1957년에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해 1960년에 제4회로 졸업했다. 대학은 서울대학교 농대에 진학했는데, 집이 농사를 짓는 가난한 소농이어서 미술대학에 갈 형편이 못되었고, 시골에서 자라 식물 가꾸는 것을 좋아하므로 자연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검여 선생과의 만남과 서예가로 성장, 농학 전공과 생활인으로서 활동은 남전의 일생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인데, 그 뿌리가 인중과 제고 재학 시절에 형성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 사생대회 나가서 상도 타고 하다가 인중 미술반에서 처음 석고 데생 등의 공부를 했고, 제고 2학년 때는 유일한 미술반원으로 수채화를 그렸다. 이때 인천박물관 주최 사생대회에서 2등상을 타게 되어 시상식에서 관장인 검여 유희강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서울농대 진학 후 제고 동창에게 소개를 부탁해 검여에게 찾아가 무조건 서예 공부를 하겠다고 청했고, 검여가 박물관에 딸린 방을 하나 비워 공부를 하도록 허락하는 것에서 사제 관계가 시작되었다. 여름방학 한달 동안 미군 휴지에 글씨를 써서 ‘길 영(永)’까지 배웠고, 학기 중에는 토요일, 일요일에 댁을 방문해 선생이 작업하는 걸 보고, 혼자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농대에 진학한 이유가 집안 형편인 것도 사실이겠지만, 남전 재학 당시 제고의 교육분위기와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제고 길영희 교장은 본인이 일제강점기에 농대를 설립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농장을 운영하기도 한 분으로 학생 교육에서도 농학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했다는 게 당시 졸업생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남전 스스로도 제고 3학년 재학 시에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가 특강을 와서 덴마크 사정, 이스라엘 집단농장 사례 등을 이야기 한 것을 감명깊게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1964년 남전 원중식 자화상(2016년 남전 원중식 유작전 출품작)]

 

대학 졸업 후 농업직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발령지인 서울시립대학교 부속농장에서 관리책임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구로구청 과장을 거쳐 서울대공원 식물과장을 역임했고, 서울시청에 근무할 때는 조경과를 처음 만들기도 한다.

별세 3년 후인 2016년에 수많은 제자들의 합심 노력으로 개막한 “남전 원중식 선생 유작전” 포스터에는 “예에 노닐다(遊於藝)”가 상징적 문구로 쓰였다. 어쩌면 남전의 일생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글귀가 아닐까 한다. 50세 이후 전업 작가로서 강원도 고성에 마련한 터전에서 생활했지만, 그 이전 공무원으로서 생활할 때에도 항상 서예를 놓지 않았으니 어쩌면 ‘일상 속의 예술’이라는 과제를 가장 앞장서서, 가장 성공적으로 실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2016년 남전 원중식 유작전 포스터

 

전통과 기본을 강조한 실천가

남전의 생전 구술 내용을 따라가 보면서 대단히 완고한 한 작가를 대면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완고함은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자신의 주관을 고집하는 부정적 의미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합리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는 진정한 보수주의로 연결되는 매우 긍정적인 완고함이었다.

“어떤 점에선 내가 내 세계를 뭐 펼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거를 선생님하고 선생님이 했던 그 것를 내가 배웠던 것을 어떡허면 끊어지지 않게 다음 세대에 넘기냐 하는 게 더 지금 시급한 내 사명감이고 또 그런 그걸 추구해가면서 그런 깊이 기본적이고 깊이있는 걸 추구해가면서 전달해 주는 상황이 내가 나타낼 수 있는 작품 세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허는 거에요. 어떻게 하면 새롭게 이 현시대에 내가 뭐 맞춰가주고 그 분위기에 맞춰서 내가 하기 보담은 고집스럽게 어떤 그런 거를 지켜가는 게 오늘 이 시대에 내가 할 일이 아닌가 사실 생각이 드는거죠”(아르코예술기록원 원중식 2차 구술채록문)

남전은 스승 검여와 비교해 자신이 시(詩), 서(書), 화(畵) 삼일체를 어려서부터 갖추지 못한 점의 한계를 아쉬움을 담아 토로했다. 그러면서 서예도 본질적으로는 시각예술이므로 결국은 회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글씨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지만 그림도 공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대학에 서예학과를 별도로 두는 것에도 반대했다며 우선 미술대학에 필수과목으로 서예 과목을 두고, 사학과 같은 데에서도 필수로 공부하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한글전용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며,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과 동아시아 문화 공통의 뿌리로서 한자(漢字)의 중요성, 서양문명과 대비되는 동양문명의 장점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도 한글과 한자의 혼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욕을 먹어도 거론해야 된다”고 까지 말했다.

주장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가르쳐야 효과가 크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강원도 고성의 자택을 교육공간으로 개방해 〈죽정서원(竹亭書苑)〉이란 이름으로 제자들의 자녀 네 명과 함께 생활하는 실천을 보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는 혼자 공부가 안 된다. 아무리 자기가 뛰어났어도 혼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바른 기본적인 가장 기본적인 필법 다루는 법을 선생을 통하지 않으면은 적어도 하나를 긋고 점을 찍는 게 안 된다.……그래서 운필이 가장 중요한데 그거는 선생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아르코예술기록원 원중식 1차 구술채록문)

“서양은 그냥 자기의 어떤 그냥 말하자면 타고난 재질이나 이런 걸 가지고 한꺼번에 꽃을 펴서 무슨 하나의 한 사람의 예술적인 걸 피어내는 거에 대한 문젠데,……동양은 인간적인 걸 먼저 놓고 본다. 사실은. 사람이 돼야 그 사람이 나타내는 예술도 훌륭한 예술이라 보지 , 사람이 안 된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상당히 천박하게 놓고 거기에서 격이라고 본다. 품위나 격을 놓고 얘기하는 게 항상 사람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거지 작품을 얘기하는 게 아니예요…”(아르코예술기록원 원중식 1차 구술채록문)

남전의 이상과 같은 생각과 주장에는 찬반이 있을 수 있다. 넓고 얕은 지식을 알려준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통해 상당한 정도의 정보를 얻고 있는 요즘 세상에 ‘선생’과 전통이 중요하며, 작품보다 작가의 인격이 우선이라는 견해는 낡은 사고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모든 시기가 ‘과도기’라는 말이 있듯 오늘은 어제의 다음이고, 내일의 전날이다. 이 시대는 결코 하늘 아래 새로 열린 시대가 아닌 만큼 스스로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개자로 규정 지은 남전의 입장에 서서 본다면 서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기본을 탄탄히 하기 위한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일 수 있다.

 

《인중․제고 총동창회 회보》 제자(題字)
우현상 이미지(문화재단 홈페이지)

 

고향과 모교에 대한 지극한 정성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뜻한 바에 따라 강원도 고성에 터전을 마련한 남전의 삶을 보면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인천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고향과 모교의 요청에는 언제나 흔쾌한 자세로 응답했다. 모교 총동창회보의 제자(題字)를 맡았고,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 출신의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을 기려 제정한 우현상의 상패에 쓰인 글씨도 기꺼이 써주었다.

필자는 2008년 4월에 남전의 말씀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인천의 기관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왔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고향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러 와 주신 것에 매우 고마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이렇듯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 남전의 생각과 주장을 곱씹어 가면서, 남긴 작품과 어록을 묶어 전집과 같은 형태로 간행하고 이를 다시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 선생을 낳고 키운 인천이 받아안은 또 하나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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