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협동으로" - 한국 응급의학의 새 장을 열다
상태바
"도전과 협동으로" - 한국 응급의학의 새 장을 열다
  • 김용범
  • 승인 2024.01.29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22) 지훈상 연세대 교수
- 김용범 / '푸른아시아' 전문위원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한국 응급의료체계의 기초를 닦은 지훈상 교수
한국 응급의료체계의 기초를 닦은 지훈상 교수

 

낭만 닥터 김 사부 아니고, ‘지 사부’

돌담병원 응급실. 첨단 의료기기 없이 다 낡아빠진 장비로 환자를 진단하는 열악한 환경. ‘사람을 살린다’를 계명처럼 말하며 한 전문의가 응급실에서 환자를 돌본다. 주말이면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그 응급실 의사. 그런데 그냥 전문의가 아니라 신의 손 김 사부였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오로지 인간 진심으로 다가가는 의사들의 모습을 보인 드라마다. 전국 시청자의 큰 호응으로 연이어 후속작이 제작되었고, 얼마 전에 3부작까지 나왔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문의가 진찰한다’는 내용의 낭만 닥터 김 사부 시나리오는 1970년대였다면 불가능했다. 당시 병원 응급실에는 인턴 과정의 수련의가 근무했고, 이들이 해당 전공 의사를 불러 응급환자를 치료했다.

오늘날 시청자들이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전문의가 신속하게 치료하는 내용의 TV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알려지지 않은, 낭만 닥터 김 사부 같은 한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1970년대 열악했던 병원 응급실 관리에 큰 변화를 이끈 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지훈상(1945~ 현재) 교수다. 지 교수는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8회)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제물포고교 시절 지훈상 교수(뒷줄 가운데 왼쪽)
제물포고교 시절 지훈상 교수(뒷줄 왼쪽)

 

지훈상 교수는 외과(外科)를 전공해 오늘날까지 외과 의사로 살아왔다.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도 주위를 포용하고 협력하는 넉넉한 인품으로 덕장이라는 평을 받았다. 2004년 지 교수가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에 오른 것도 지 교수의 삶의 태도와 인품 때문이라고 한결같이 주위에서 말한다. 그는 뒤이어 총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의사! 도전의 시작

대학 생활을 마친 지훈상 교수는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그 후 모교 전임강사가 된다. 평생 의사 생활 중 세브란스병원 외과 의사로서 1978년 5월 16일 처음으로 단독 집도의로 환자를 수술했던 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환자는 교통사고로 간(肝)이 60~70%가 파열된 중상자에다 출혈 과다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언뜻 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의사는 ‘언뜻’이라는 말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당시 병원에 이 중상자에게 수혈할 알맞은 혈액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부랴부랴 방송사에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몇 사람의 헌혈자가 달려왔다. 이렇게 헌혈로 혈액을 구해놓고, 지 교수는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과 의술을 총동원해 수술을 마쳤다. 길고 긴 9시간 동안의 도전이었고 사투였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환자는 회복되었고, 지 교수는 외과 의사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사로서 첫 출발을 독하게 경험한 셈이었다.

외과 의사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후 많은 사람을 살렸다. 그중에는 골반이 대부분 골절된 채 목숨까지 경각에 달린 한 여고생을 수술해 살린 적도 있었다. 훗날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뒤, 지 교수를 찾아와 감사한 마음을 전했을 때는 남다른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고 전한다.

1981년 8월, 지 교수는 선진 의료기술 연수를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의대 대학교수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니 현실에 만족해서 안주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지만, 그는 과감히 새로운 도전을 택했던 것이다. 미네소타대학 부속병원인 세인트폴 램지(Saint Paul-Ramsey) 메디컬센터에서 외상학(外傷學) 전문분야 첫 연수가 시작되었다. 1년이 지나고 1982년 8월, 이번에는 샌프란시스코 UCSF(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 Francisco)로 옮겨 연수를 이어갔다.

특히 UCSF에서는 입으로의 음식 섭취가 어려운 환자에게 정맥주사로 영양제를 투여하는 방법에 관해 연구했다. 여기서 지 교수는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인체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장에 도달해야 장이 활성화되는데, 너무 오래 시간 음식 섭취가 없으면 장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을 논문으로 작성해 ‘영양제 정맥주사가 환자 회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학계에 보고했다. 그의 결과는 당시 논문 게재가 쉽지 않았던 저명한 외과학회지 <Annals of Surgery> 저널에 실렸다.

 

응급환자 관리 체계 확립

그의 미국 연수의 성과는 의학, 의료적 실적 외에 무엇보다도 우리 의료계에는 거의 생소하다고 할 수 있었던 ‘응급환자 관리 체계’에 눈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제반 모든 의료 분야에서 가장 앞선 미국은 병원의 구급차부터가 달랐다. 1970년대에 이미 구급차에는 무선전화는 물론 심전도(EKG), 산소호흡기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구급차에 적합한 의자 규격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미국 대학 병원의 응급환자 대응과 외상 관리 체계에 충격을 받은 지 교수는 이러한 응급체계와 외상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여 우리 의료 현실에 구축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귀국 길에 오르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선진적 응급환자 관리 체계 구축에 대한 열망뿐이었다.

그러나 그 열망은 귀국 후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부도 의료계도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번은 미국에서부터 우리나라로 환자 수송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동행한 미국 의사가 ‘한국 구급차에는 산소통만 있고, 정작 약품이나 응급조치용 장비는 없는데 청소 빗자루만 있다’고 흉을 보는 말에 적지 않은 충격과 함께 대한민국 의사로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큰 창피를 느꼈다고 했다. 이때의 충격과 창피가 그를 우리나라 응급의학 개선을 위해 더욱 매진하도록 채찍질했다. 그러나 인턴 중심의 응급실 관리와 응급차 개선 노력은 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응급환자 관리 체계 자체에 대해 우리 의료계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이 흐르다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행사가 거푸 열리게 된 덕분이었다. 올림픽이라는 최고의 국제 스포츠 대회를 치르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선수들이나 외국 손님들을 위해 어떠한 응급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는 별도의 의료조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응급의학 의료계의 현실을 바꿀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를 기회로 지훈상 교수를 포함해 여러 명의 의사가 함께 힘을 합쳤다. 그리고 1987년 의학의 한 분야로 응급의학과를 전문 진료과목으로 채택한 국내 최초의 병원을 영동 세브란스에 개설했다. 결국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덕분에 우리나라도 국제적 수준의 응급환자 관리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외형은 일부 갖추었으나 본질적 변화까지 도달하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응급의학 전문의 양성을 위한 관련 과목 개설을 위한 진척은 몇 걸음 내딛지 못할 정도로 느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아직 응급의학의 개념 정립도 되지 않았고, 응급의학 자체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탓이었다. 이후 2년여 기간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1989년 12월 1일 ‘대한응급의학회’가 설립되었다. 응급의학회가 만들어지고 응급실에 전문의가 상주하면서, 응급환자를 살리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낭만 닥터 김 사부>라는 응급실 드라마를 감상하고 감동했던 배경에는 이렇게 지훈상 교수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의 오랜 기간 숨은 노력, 인내, 열정 등 상호 협력이 숨어 있었다. 이제 응급실 운영체계의 달인 지훈상 교수는 처음 가보는 병원이라도 거기 응급실 시스템을 보면 그 병원의 미래 운명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VIP 병동 건립과 로봇 수술 시스템 도입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이던 시절, 지훈상 교수는 새로 신축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VIP 병동 신설을 추진한다. VIP 병동은 응급환자 관리 체계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이지만 당시 의료계 상황을 고려한 남다른 뜻이 있었다. 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의료수가가 너무 낮아 의료기관들은 경영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지 교수는 학교 병원의 의료와 운영의 책임자 자리에서 이 문제 해결에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좀 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의 요구를 효과적인 사회적 약자 치료 재원의 확보와 연계시키는 것! 그것이 곧 VIP 병동 신설 개념이었다.

당시 지훈상 교수는 한창 건축 중이던 병원 설계까지 변경하면서 VIP 병동 신설을 주장했다. 적지 않은 부정적 시각과 잡음이 있었으나 포용과 화합 정신으로 끈질긴 설득 끝에 그의 뜻을 관철시켜 마침내 병원을 성공적으로 개원할 수 있었다.

 

연세대 세브란스 새 병원 봉헌식에서 연설하는 지훈상 교수

 

VIP 병동 개원 후 대표적인 일이 박근혜 전 대통령 피습사건이었다. 2006년 5월,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방선거 지원 유세 중 괴한의 피습으로 안면에 자상(刺傷)을 입고 세브란스에 입원했었것이다. 당시 부총장 겸 의료원장으로 있던 지 교수가 VIP 병동에 입원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치료를 지휘했다. 병원에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들이 상주하다시피 하는 등 국민적 관심이 쏠렸기 때문에 의료원장으로서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2007년 연세대학교 의료원 후원의 밤. 지훈상 교수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훈상 교수의 새로운 도전인 VIP 병동의 가치는 2007년 4월에 열린 의료원 후원회에 참석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면면에서도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한덕수 총리, 김우식 과학기술부총리,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이 참석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별도의 영상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일부 대기업 총수들도 VIP 병동에서 치료를 받은 후 후원회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모은 후원금은 적자로 허덕이던 목마른 재활병원, 정신건강병원, 어린이병원 운영에 단비처럼 사용되었다. VIP 병동을 만든 뒤 이런 긍정적 효과가 소문이 나자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뒤쫓아 VIP 병동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첨단을 위한 도전의 종착점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지 교수는 이른바 ‘생명을 살리는 시스템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중 하나가 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JCI, 미국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로부터 국내 최초로 인증을 획득한 것이었다. JCI는 WHO(세계보건기구)가 인정한 인증기관으로 ‘환자 안전 보장’에 대한 표준 심사를 통과한 의료기관에 대해 인증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지훈상 교수는 우리 병원의 수준을 선진국 표준과 맞춰 JCI 인증을 받으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JCI 인증은 진료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막고, 환자에게 발생할 위해성을 줄여 안전을 보장하고, 의료서비스의 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인증이다. 환자의 입원 순간부터 퇴원 시까지 치료의 전 과정을 평가하는데, 14개 분야 약 1,200여 개 항목을 조사한다. 이런 이유로 JCI 인증은 오래전부터 의료서비스의 세계 표준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식되었다. 국내에서는 2007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국내 최초로 JCI 국제의료기관평가 인증을 받았다.

지 교수의 도전은 ‘이솝’ 도입으로 더욱 가속화된다. ‘이솝’이라는 이름을 듣고 ‘이솝우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음성 로봇 수술의 이름이다. 그가 의료원장으로 있을 때 국내 최초로 로봇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현재는 널리 보편화된 로봇 수술의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봇 수술은 기존의 개복 수술 또는 일반 복강경 수술의 대체 방법으로 로봇이 의사 대신 수술하는 방식이다. 당시 이솝은 말로 동작하는 로봇이었는데, 의사가 수술 부위를 살피면서 음성 언어를 통해 기계를 동작하게 함으로써 수술을 진행하는 그 당시 최첨단 수술 시스템이었다.

 

국내 최초 음성인식 로봇 '이솝'으로 수술을 진행하는 모습

 

오늘날 첨단 로봇 수술 장비에 비하면 여러모로 뒤떨어지지만, 1990년대 로봇 수술을 국내 최초로 도입, 시행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의료사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그의 도전과 전진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국내 최초로 로봇 다빈치 수술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2023년 세브란스병원은 세계 최초로 로봇 수술 4만 건을 기록할 정도로 발전한다.

지훈상 교수의 활동은 이후 후배 세대에 이어져 해외에 로봇 수술 기술을 전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고 있는데, 선교사들로부터 의료기술을 배우던 구한말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다.

의료원장 시절 지 교수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에 의료 봉사단을 조직해 파견하기도 했다. 국적을 떠나 의사로서 인간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진 피해 지역 의료봉사단 발대식(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협동하여 선을 이루라"

이야기한 대로 지 교수는 외과 의사로서 선진 의료기술을 습득했고, 응급실 관리 체계를 바꾸어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VIP 병동을 세웠고, 국제 기준의 병원 평가 시스템(JCI) 인증을 받았으며, 국내 최초로 로봇 이솝을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의료원을 건설하면서 장례식장 문화도 바꾸었다. 임기 말에는 총장 대행으로 인천 송도 캠퍼스 조성 사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도 했다.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의료인으로서 지훈상 교수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병원협회장이 된 후에는 의료인이 경영난으로 쓰러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이끌었고, 연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후 차병원 그룹에서 부총장 겸 의료원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어린이재단 초록우산의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아울러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외국인으로는 79번째 미국외과학회 종신명예회원으로 위촉되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22년에 그는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지훈상 교수가 받은 미국외과의학회 종신명예회원증
지훈상 교수가 받은 미국외과의학회 종신명예회원증

 

지훈상 교수가 살아온 길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도전과 협동이었다. 자신의 소속, 사회적 위치,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도전의 대상은 달라졌지만, 그의 도전은 항상 불합리와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나 첨단 기술의 도입, 낡은 관례의 혁신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늘 주위 사람과 협력했고 덕을 베풀었다. 덕분에 연세대학교에서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과 더불어 총장 대행을 수행했다는 성과도 얻었지만, 그것보다는 평생 의사로서 다수의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지키는 데에 매진했다는 점에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

지 교수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과거에 없던 새로운 것을 실행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좌우명을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한 걸음씩 쉬지 않고 걸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처럼 살고, 자신의 좌우명처럼 스스로 생각한 바를 꾸준히 이루어냈다. 우공이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한국 전쟁을 겪으며 부모와 일시적이나마 헤어져야 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던 지훈상 교수. 그는 말 그대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대를 살아온 세대 중의 한 사람이다. 어려움은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게나 닥치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일 것이다. 지 교수의 삶을 볼 때, 늘 어려움을 도전과 협동을 통해 극복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자신의 자서전에 ‘협동하여 선을 이루라’라고 요약했다. 

지 교수의 삶을 엿보며 문득 논어의 한 구절 ‘기욕립이립인, 기욕달이달인(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이 떠오른다. '자신이 일어서고자 할 때 남도 일어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할 때 남도 통달하게 하라'라는 뜻이다.

 

자신의 좌우명인 ‘우공이산’ 글 앞에서 김명민(배우) 세브란스 홍보대사와 함께
자신의 좌우명인 ‘우공이산’ 글 앞에서 김명민(배우) 세브란스 홍보대사와 함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