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인천 아는 만큼, 인천은 중국 알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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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인천 아는 만큼, 인천은 중국 알지 못해"
  • 송정로
  • 승인 2012.08.0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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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회 새얼아침대화 '인천은 중국에 무엇인가' 열려


"중국인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인천입니다. 중국인들이 인천에 대한 관심도 많고 역사기록도 많은데, 중국인들이 인천을 아는 것에 비해 인천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 아는 게 적은 것 같습니다."

제317회 새얼아침대화가 8일 오전 7시 중구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김명호 교수를 초청해 '인천은 중국에 무엇인가'를 주제로 열렸다.

김 교수는 "지난 1996년 독일의 저명한 현대철학자 하버마스가 방한할 때 중국의 미학자 이택후가 방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택후가 한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인천이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1840년 세계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인 중국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개방을 강요당했고, 한국은 1866년(신미양요) 개방이 강제되기 시작됐다며 인천 중국 화교촌 역사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1895년 동학혁명 때 청국이 일본에 의해 밀려나며 화교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료를 보면, 1833년 국내 화교는 162명에 불과했으나 1910년 한일합방 시점에 1만1천818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증가했다.

인천의 화교로 산동반도 농민들이 다수였지만 우수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1899년 중국에서 서양종교를 배척하던 의화단의 난이 진압됐는데, 그때 의화단 출신들이 인천항을 첫 기착지로 해서 건너왔다. 광동성 출신 상인들과 군 이탈자 등도 있었다. 광동성 출신의 동순태란 자는 당시 한국에서 자금을 가장 많이 동원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자국민이 해외로 나갈 때 해외자녀 보호정책을 철저하게 펴왔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미국에 나가 있는 동포들이 미국에 지나치게 물들어 자국 예의범절을 해치고 있다는 판단 아래 동포를 모두 불려들여 중국 변방과 조선의 중국조계지(인천, 원산, 부산)으로 분산시켜 살게 한 사실도 있다.

특히 북한과 중국 관계는 한국전쟁에서 맺어진 혈맹 이상 관계이다. 일제 패망 이후 현 중국 정권을 수립할 때에 북한에 신세진 게 많았다. 일제가 투항한 이후 만주는 소련이 먼저 들어가 점령하고 무장해제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밀려 북한에 들어온 중국 팔로군을 북한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군수물자까지 줘서 돌려보낸 역사가 있다. 팔로군은 북한에서 돌아와 본국 지방을 점거하며서 농지개혁 등 '인민'을 위한 정책을 강제하면서 성장했다."

그는 이 같은 배경에서 세계적으로 중국의 지위가 올라가면, 북한도 따라서 올라간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렇지만 중국은 사회주의와는 체질적으로 안 맞는 나라라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사유재산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현 체제를 흔히 말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중국식 자본주의'로 이해하는 게이 빠르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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