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양평 사나사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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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양평 사나사계곡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3.08.26 16: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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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서편 백운봉 기슭의 천년 고찰 사나사
천 년 고찰 사나사 계곡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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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용문산은 대개 은행나무가 유명한 용문사를 먼저 기억나게 한다. 그러나 수목이 푸른 이 계절에는 용문산 서쪽 백운봉 기슭의 천 년 고찰 사나사를 둘러볼 수 있다. 이 산행 코스는 약 12km 정도인데 사나사 계곡에서 주능선 안부를 거처 함왕성지를 지나 장군봉으로 길을 잡으면 용문산에 오를 수 있고, 마당바위와 용문사를 지나 하산할 수 있다.

또한, 사나사 출발코스는 오후 2시 이후 산행을 제한하는데, 하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 출발을 서둘러야 한다. 또한, 사나사 계곡은 굽이굽이 에두르는 물길로 호젓하고 깨끗해서 한여름의 더위를 물러서게 한다.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는 부처님의 품안과 같이 즐거울 수 있다.

    
 양평군 옥천리에서 용천리를 거쳐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함왕성지가 있는 산간 평지가 나타난다. 속칭 ‘절골’에 사나사가 위치한다. 사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사나사란 이름은 노사나불의 약칭으로, 923년(신라 경명왕 7년, 고려 태조 6년) 대경대사와 제자 융천 등이 함께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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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의 창건설화로는 삼국시대에 스스로 화주승이라 칭하는 한 범사가 이 땅에 사찰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려고 백일 간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공중에서 천장노사나불이 출현해서 즉시 그 불상을 조성하고 ‘사나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나사는 창건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고려 말인 1367년(공민왕 16년) 보우국사가 140여 칸에 달하는 대찰로 중창했다는 기록 이전 것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전소한 것을 선조 41년(1608년) 재건했으며, 영조 51년(1773년)에는 지역 신도들이 불량답을 마련해 사찰에 헌납했다. 이를 기념해 세운 ‘당산계불량비’가 전해진다.

이 불량비가 세워진 곳은 사나사 경내에서 벗어나 절 입구 쪽에 있기 때문에 모르고 갔다가는 보지 못하고 내려올 수 있는 후미진 곳에 있다. 또한, 1907년에는 의병과 관군의 충돌 때문에 모두 탔으나,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탓에 다시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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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때마다 피해를 입어야 했던 사나사는 1956년에 두준 스님이 대웅전과 산신각, 함씨각 등을 세우면서 복원이 시작됐다. 1982년에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 일주문을 옮겨 세웠으며, 1993년 대적광전을 건립하고, 기존 대웅전을 동쪽으로 옮겨 미타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에도 범종각과 조사전 증축 불사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전란 때마다 피해를 입어야 했던 사나사는 1956년에 두준 스님이 대웅전과 산신각, 함씨각 등을 세우면서 복원이 시작됐다. 1982년에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 일주문을 옮겨 세웠으며, 1993년 대적광전을 건립하고, 기존 대웅전을 동쪽으로 옮겨 미타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에도 범종각과 조사전 증축 불사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사나사 경내에 태고보우국사의 원증국사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가 세워져 있다. 고려 중기에 세운 높이 2.8m의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과 함씨각이 있다.

    
탑은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돌종 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어서인지 더 정감이 간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에 고려 우왕 9년(1383)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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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는 자연암반을 이용해 만든 지대석 위에는 홈을 파서 비신을 끼워 세웠는데, 비신 양쪽에는 4각형의 기둥을 세워 비신을 보호하고 있다. 비신은 전면 상부에는 ‘원증국사석종명’이라는 비명을 새긴 아래 비문이 있다. 비문은 정도전이 지었으며, 글씨는 재림사 주지인 의문선사가 썼다. 비신은 곳곳이 탄흔으로 심하게 깨어져 나갔고 풍화가 심해 해독되지 않는 글자가 많다. 옥개석은 아래 면을 둥글게 마름질한 장방형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국사의 사리를 간직한 곳은 가은 양산사와 고양 태고사에 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과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가 있다.


사나사 복원 불사에 양근 함씨들이 참여하면서, 경내에 함씨각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양근(양평)에는 함왕성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성 밖 계곡 아래 있다는 함공혈이라 부르는 바위굴에서 삼한시대에 주악이라는 함씨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근 함씨의 시조 함혁이 삼한시대에 석성을 쌓고 스스로 함왕이라 칭했으며, 이곳을 세거지로 정한 함씨들이 이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웅거하였다가 멸망하였고, 그 자손들이 본관을 양근으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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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숙 객원기자 2013-08-27 19:09:59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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