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최초의 민주노조 건설 현장, 한독금속 공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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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최초의 민주노조 건설 현장, 한독금속 공장터
  •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4.08.04 23: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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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협약 연재] 인천 민주화의 현장을 찾아서 (6)
영화 <파업전야>를 찍은 공장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곡이다. 1990년 봄, 세상에 처음 나왔다. 20여 년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 추억의 노래는 아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저절로 주먹을 쥐게 만드는 강렬함이 노래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고,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생명을 잇게 했다. 여전히 ‘철의 노동자’는 전국 곳곳에서 ‘현장의 노래’로 남아 있다.

안치환이 이 곡을 쓴 건 영화 <파업전야>에 삽입곡으로 넣기 위해서였다. 장산곶매의 16미리 독립영화 <파업전야>는 부평 갈산동에 있던 한독금속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세창물산 여성 노동자들의 경험이기도 하고 남일금속 노동자들의 삶이기도 하다. ‘파업전야’ 제작진은 이들 공장들을 돌며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채웠다.
 

영화 <파업전야> 제작노트(장산곶매, 199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영화가 크랭크 인에 들어간 건 1989년 겨울. 촬영은 공장 가동을 멈춘 한독금속 공장에서 진행됐다. 당시 한독금속은 회사가 다른 기업에 인수되면서 조업이 중단된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정상조업을 요구하며 농성중이었다. 영화의 책임연출을 맡은 장동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드디어 89년 12월, 회사측의 일방적인 휴업에 대하여 노조간부를 중심으로 정상조업재개 투쟁중인 인천 ○○금속 사업장에서 합숙촬영이 시작되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농성투쟁중임에도 불구하고 ○○금속 노동형제들은 수개월간 멈추었던 기계를 밤새워 보수해가며 이 촬영에 뜨겁게 함께 하였다. 처음, 우리들은 노조원들의 도움에 송구스러웠고, 노조에서도 ‘영화인’들에 대하여 생경하게 느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합숙촬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도움과 협조의 관계는 이땅의 노동자가 잘사는 사회, 노동해방의 긴 노정 속에서의 동지적 관계로 바뀌었다.”([파업전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파업전야>, 장산곶매, 1990)
 
줄거리는 동성금속 단조반 노동자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로 엮어졌다. 한독금속 노동자들 중 일부도 엑스트라로 영화에 출연했다. 한독금속은 단조품과 자동차용 수공구를 생산하던 공장이었다. 춘섭 역을 맡은 배우 엄경환은 용광로가 불을 뿜어대는 공장 안 풍경이 신기한 듯 그 모습을 자세히 묘사해 두었다.
 
“우리가 촬영했던 공장에는 용광로가 있었다. 무엇이든 그 환한 빛으로 녹여대는 것이 신기해서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예컨대 깡통이나 술병, 각종 쇠붙이, 헝겊뭉치, 쓰다버린 볼펜, 부러진 각목 등을 용광로 안에 넣어 보았다. 용광로에 들어간 온갖 잡동사니들은 생김새와 내용물에 개의치 않고 커다란 불덩어리속에 하나가 되어, 예의 그 환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 것이었다.”([연기자의 변], <파업전야>, 장산곶매, 1990)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식당 장면은 한독금속 노동조합 결성 당시를 떠올리게 해준다. 한독금속 노동자들은 1987년 7월 11일 실제로 회사 식당에 모여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미 그해 6월 11일 옥상점거투쟁을 전개하며 임금인상 투쟁에서 승리한 한독금속 노동자들은 꼭 한 달이 지난 후 노조를 갖게 됐다. 6월민주항쟁 이후 인천에서 결성된 최초의 민주노조였다. 이때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황재철 위원장은 울산의 현대엔진 노조 이후 전국에서도 두 번째 민주노조 설립이었다고 기억한다.
 
영화 <파업전야>의 한 장면
 
공장의 벽화와 밴드 ‘혼수상태’
 
한독금속은 방위산업체여서 특례자들이 많이 근무하던 곳이다. 종업원은 200여 명. 코리아스파이서 노조위원장을 지낸 박남수는 당시 한독금속 노동자들이 팀워크도 높았고 동지적 감정이 큰 청년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다른 공장들에 비해 활기차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에 힘을 실어준 모임 중의 하나가 ‘혼수상태’라는 이름의 회사 내 밴드였다. 노조 설립과 때를 맞춰 등장한 ‘혼수상태’는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수련회 등 각종 행사에 초청돼 연주 실력을 뽐냈다.

밴드와 함께 또 하나 공장에 강렬함을 준 건 노조사무실 전면 벽에 그린 ‘노동자천하지대본’이라는 이름의 벽화였다. 1987년 조직된 서울미술운동집단 ‘가는패’와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 미술패 ‘갯꽃’, 그리고 지금은 ‘삼성 무노조 경영 신화’에 맞서 삼성일반노조를 만드는 등 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김성환 등 한독금속 노동자들이 힘을 합쳤다. 1988년 9월 30일에서 10월 26일까지 한달여 간 작업해 완성했다고 한다.

공장 벽에 그린 최초의 벽화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지금은 사진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노동자천하지대본이 적힌 깃발을 휘날리는 인물들이 그림 속을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박소영, [한국의 1980년대 벽화운동], 성신여대 석사학위논문, 2000). 문화는 한독금속 노동자들을 이끈 ‘힘’ 중의 하나였다.
 

‘노동자천하지대본’ 제작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인문연 문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6월민주항쟁 이후 빠르게 한독금속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데에는 활동가 그룹들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위장취업의 형태로 공장에 들어온 활동가들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독금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재철 위원장은 1986년 계양산 중턱에서 ‘아시안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집회가 있었을 때 같은 공장에 다니던 동료가 위장취업자였음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후 학습모임과 대자보 부착 등 한독금속 공장에서도 조금씩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꿈틀대며 일어났다. 그때는 아직 노동현장에 노동조합 무용론이 팽배해 있어서 해고되는 게 운동의 목표가 되기도 했지만 6월민주항쟁을 거치며 조합을 만들면 싸움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조합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 7월 11일, 72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한독금속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노동조합 결성 이후 공장의 상황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88년 3월 9일,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같은 해 6월 18일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가 효성동 성당에서 출범한 이후에는 의장으로 선출된 황재철 위원장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10월 13일에는 한독금속이 타 기업에 인수되면서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노동자들은 다시 조업정상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독금속은 1990년도를 지나며 소리없이 사라졌다.
 

한독금속 파업 현장은 연대 투쟁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쇼핑객들이 찾아오는 공장터
 
지금도 한독금속 출신 노동자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하고는 한다. 공장은 사라졌지만 노동자들은 성장했다. 이들에게 노동운동의 씨앗을 품게 해준 한독금속 공장은 모두 헐려 상가 건물과 아파트숲으로 변했고, 인근에는 대형 쇼핑몰이 생겼다. 한때 경찰과 노동자들이 뒤범벅이 되어 맞서 다투던 거리가, 지원 투쟁을 위해 찾아오는 노동자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았던 공장 정문이 잘 깔린 도로 옆의 상점가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쇼핑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1989년 한독금속 공장과 노조가 설립된 주변 공장들(<인노협신문> 14호)
 
 

한독금속 공장의 변천 과정(인천광역시청 소장 자료)
 
한독금속 공장에 있던 벽화는 민중미술의 유산으로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마을을 덧칠하는 지금의 벽화와는 역사적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이 공간이 이대로 잊히는 건 아쉽다. 힘든 시절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벽화를 남겨둘 생각을 아무도 못했다는 것 또한 안타깝다. 공장과 노동자들이 그대로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닐지. 영화 촬영장소라는 걸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박물관에서 드라마가 촬영됐기 때문이란다. 영화 ‘파업전야’는 상영 자체가 전쟁이었다. 영화 상영을 막기 위해 헬기가 뜨고 천여 명이 넘는 경찰들이 대학에 들어가 헤집고 다닐 정도로 필름을 지키는 게 곧 운동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걸 인천에서 찍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무엇보다 한독금속 공장은 6월민주항쟁의 뒤를 이어 인천에서 민주노조가 최초로 설립된 곳이다. 6·29선언에 모두들 취해 있을 때, 노동자들이 이제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거리로 나섰던, 그 첫발을 내딛었던 공간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이곳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잊어버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곳에서.
 
 
한독금속 공장은 지금은 상가 건물과 아파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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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7 15:24:53
민중벽화에 대해서 조사 중에 있는 학생입니다. 남아있는 벽화가 많이 없네요. 이번에도 역시. 우리의 무지에 의해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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