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 창간일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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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 창간일의 인천
  • 대중일보 강독모임
  • 승인 2014.10.07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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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대중일보>로 다시 보는 해방기 인천 (1)
1945년 10월 7일 창간된 인천 지역신문 <대중일보>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결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방기 신문이 단명했던 것에 비해 지속적으로 해방공간의 인천과 한국, 세계의 동향을 보여준 소중한 지역매체였다. [인천in]은 10월 7일 대중일보 창간기념일을 맞아 연중기획으로 "<대중일보>로 다시 보는 해방기 인천"을 시작한다. 매주 1회 연재될 이 기획을 통해 약 70년 전 해방기 인천 역사상을 재구성하고, 오늘의 현실을 되비치는 역사적 거울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해본다. 대중일보 강독모임은 매주 정기적으로 <대중일보> 읽기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함께 공부할 인천인의 참여를 기다리며 연재를 함께 시작한다.  <편집자주>

대중일보의 창간
 
<대중일보(大衆日報)>가 창간됐다.
이 날은 일요일이다. 휴일을 기해 2면짜리 신문을 창간했다. 영문 제호는 ‘The Daichoong Ilbo.' 바로 옆에 'The Korean Daily News’라는 부제를 덧붙였다. ‘편집겸발행인’은 최상철, 인쇄인은 윤세원이다. 정가는 한 부에 20전을 받았다. 사고(社告)를 통해 당초 ‘한민일보’를 제호로 해서 발간하려고 했으나 ‘형편에 의하여’ 대중일보로 개제(改題)하였으니 양해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양해까지 구하는 걸로 봐서 그동안 한민일보로 발간된다는 소식이 꽤 알려졌던 모양이다.

<대중일보>의 창간사는 희망에 차 있다. 해방된 공간에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고 있다. ‘청신발랄한 보도’와 ‘엄정공평한 비판’을 내세우면서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이 될 것을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이 약속은 계속 지켜질 것인가. 적어도 창간 당시의 <대중일보>는 인천이 해방된 조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요 그러한 지역의 언론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허투루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알리려 애썼다.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면이 일찍이 적의 수중에서 왜곡되고 약탈되고 말살되었던 것을 이제야 우리 손으로 낯낯이 탈환해 새로운 토대 위에 건설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위대한 임무가 우리의 두 어깨 위에 지어진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임무이며 감격과 영광의 임무인가. 이로 부터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도 오로지 우리 건국의 대업에 기여하는 것이란 것을 깊이 명념하지 아니하면 안될 때가 왔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지금의 정계는 아직 혼돈의 와중에 빠져 있고 따라서 대중의 귀추는 그 향할 바를 몰라 미로에 허덕이고 있다. 갑갑한 심정이 있으되 어디에 토로할 길이 없으며 희미한 방향이 보여도 지도자를 찾지 못하는 것이 현하의 실정이다.
이러한 때 있어 우리에게 허여된 언론의 자유는 모든 부면을 향해 적극적으로 진언하고 정력적으로 보도하지 아니하면 안될 절대의 사명이 있는 것이니 건국수도에 있어 청신발랄한 보도와 엄정공평한 비판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오 가장 건설적인 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인천은 우리 수도의 관문이며, 동시에 공업산업의 심장부인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여기에서 융성할 것이니 우리 국가의 성장과 함께 본지는 같이 성장하면서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 (창간사)

카프에서 활동했던 임화가 이러한 <대중일보>의 앞길에 축전을 보냈다.
 
우리 조선의 서쪽 관문인 인천항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신문이 탄생함은 경축할 일입니다. 인천항은 일찍이도 그리했던 것이지만 새 시대의 조선이 해외제국과 교섭하는 문호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귀(貴) 신문이 연(演)해야 할 정치적 문화적 역할은 자못 중대한 바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구미문물의 수입과 섭취에 있어 우리는 확호한 비판의 기준을 갖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고 생각습니다. 이것은 우리 국가와 민중의 장래에 관계되는 바가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국수주의도 배척해야 하지만 경박한 양화주의는 더욱 경계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는 인천과 같은 국제항의 언론기관이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를 위선 이 방향에서 가장 유효하게 사용해주기를 희망하는 한 사람입니다. 언론의 자유란 것은 결코 몰비판주의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확호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비판하고 다른 어떠한 사람도 아닌 우리 민족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근로대중의 행복의 옹호와 증진에 기여하는 것만이 언론의 자유가 진실로 자기의 진가를 발휘하는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귀지(貴紙)가 이 사명을 수행하기에 추분한 수명을 향유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임화는 ‘우리 민족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근로대중의 행복의 옹호와 증진에 기여하는 것’ 이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몰비판주의라는 그럴 듯한 구호에 매몰되지 말고 확고한 입장에 서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언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중일보> 창간호
  
인천 재건의 사명
 
언론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긴 했지만 인천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식민지 항구 도시로서 다시 정비해야 일들이 적지 않았다. <대중일보>는 우선 수도 문제에 주목했다. 인천의 수도 시설은 1908년 준공한 송현배수지를 통해 1910년부터 노량진으로부터 급수가 시작됐다. 당시 급수 대상은 1만 5148명. 이후 36년 간 수도 시설은 한 번도 정비된 적이 없었다. <대중일보>는 25만 명을 헤아리는 인천에서 시민의 생명과 관계있는 수도시설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수도꼭지를 틀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녹슨 수도관을 청소하는 일이 시급했다. 미군정이 이 일에 곧 착수하려는 계획을 세워뒀다는 것이 창간된 <대중일보>의 첫 소식이었다. 상수도 문제와 함께 하수도도 골칫거리여서 빈민가를 중심으로 서양식 하수도 공사가 곧 시작될 거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송현동 제수변실
 
식량과 물자의 배급
 
식량과 물자의 부족도 긴급한 문제였다. 식료잡화상조합의 관계자들이 경남과 경북 등지로 파견을 나가 그동안 인천에 공급되지 못했던 멸치를 구해 배급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인천세무서에서 청주를 곧 풀어 각 가정에 배급할 것이라는 계획, 전매국 인천지소에서 담배를 역시 멀지 않은 장래에 각 가정에 제공할 것이라는 소식 등이 전해졌다. 담배는 장수연이 많이 나오게 되리라는 전언과 함께였다. 장수연은 쌈지담배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다량으로 공급돼 오던 담배였다. 인천항이 부산항과 함께 석탄의 하역항이 될 것이라는 계획도 전했다. 이로써 다가올 겨울에 연료난을 덜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과 함께였다.
 
인천시정의 정비
 
이 무렵은 일본인 부윤이 아직 시청에 앉아 있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인천 시정을 이끌어갈 행정 관료들을 선정할 일이 급했다. 10월 6일, 창영초등학교 강당에서는 인천시장을 선출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박남칠, 조봉암, 김용규, 김세완, 이승엽, 임홍재 등이 후보자로 나와 그중 임홍재가 추천됐다. 이미 10월 4일 시청 각 부서의 과장과 직원들은 결정된 상태였다.
해방된 지 석 달 가량이 지난 시점에서 창간된 <대중일보>는 인천 곳곳의 소식들을 알리려는 노력과 함께 인천이 직면한 문제, 그리고 인천이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문제들을 짚으려고 애썼다. <대중일보>에 있어 인천은 단순한 언론 시장이 아니었다. 새 조국 건설의 출발점이었고 그 도정에 언론이 한 기둥을 지탱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적어도 10월 7일, 해방 후 인천지역 최초의 언론을 발간하면서 <대중일보> 주역들이 생각한 언론의 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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