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무덤에 묻힌 중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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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무덤에 묻힌 중국인들
  • 이세기
  • 승인 2015.10.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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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섬이야기②] 이세기 / 시인

▶ 덕적도 벗개해변에 있는 중국인 묘지
 
수수가 새빨갛게 여무는 쨍쨍한 초가을이다. 섬논도 벼가 누렇다. 마른 밭에는 땅콩 캐기가 바쁘다. “탁탁” 여문 녹두알 터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두둑이다. 나는 고즈넉이 덕적도의 목섬에 붙어있는 환한 이개 갯티를 바라본다. 고요하고 정갈한 바닷가다. 원시의 해조음이 들린다. 석기시대의 바다에 와 있는 듯하다. 함께 학술답사를 온 섬연구모임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좋다”를 합창한다.

매번 섬에 올 때마다 뱀에 기겁을 한다. 살모사가 길을 건너고 간혹 길바닥에 널브러져 죽어 있다. 수초로 뒤덮인 부들 밭에는 네 자가 얼추 될 먹구렁이 껍질도 있다. 사방에서 느닷없이 출몰하는 뱀 때문에 온몸이 오싹하다. 풀섶을 지날 때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섬에는 뱀과 관련된 금기(禁忌)가 많다. 덕적군도 일대 섬에서는 숭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 숭어 대가리가 뱀을 닮아서다. 제삿밥에 머리털이 있는 것도 금기다. 뱀을 닮은 이유다. 섬사람들에게 맹독 뱀은 가장 무서운 적이다. 밭일이나 나물 채취 등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탓이 크다. 터주인 집구렁이가 아닌 바에야 맹독 뱀을 좋아할 리가 없다. 가을 추수가 시작될 무렵 추석이 가까이 오면 뱀들이 제삿밥을 먹으러 섬과 섬을 건너온다. 이럴 때는 조상님이 밥을 먹으러 온다고들 한다. 극진한 환대는 아닐지언정 해코지는 않는다.

우리 일행은 벗개해변에 있는 중국인 묘지를 찾았다. 숨소리까지 들릴만 한 고요다. 아침 햇살에 눈부신 백사장은 물때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 순비기 줄기가 모래밭을 덮고 사초가 온통 사구(砂丘)를 덮고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해변은 어디가 묘지이고 어디가 사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경계가 따로 없다!

해변의 무덤에 묻힌 중국인들은 원래 산둥(山東)인이었다. 1885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따라 들어온 청국 거상들의 일꾼들이 시초다. 이들은 인천의 청국지계에 있는 화교상회에서 일했다. 잡화상, 음식점, 이발관, 중국식 공중목욕탕인 위츠(浴池) 등이었다. 개중에는 시내 외곽에서 채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12년에 청조가 멸망하고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산둥지방에서는 소요가 빈발했다. 이 때 황해를 건너 인천 청관으로 피난 온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는 ‘쿨리(苦力)’라는 별칭이 붙었다. 육체노동 이민자인 쿨리는 대부분 청국지계 인근에 있는 항구에서, 호렴, 잡곡, 산둥고추 등을 싣고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오는 선박의 하역노동자나 축항 노동자로 일하다 주저앉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한국전쟁, 대만 귀속 등으로 영고성쇠를 겪으면서 차이나타운에서 살았던 이들은 나이가 들어 독거노인이 되었다. 지하 양로원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꾀죄죄한 옷에 방안은 거지굴 같아서 누추가 따로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것은 최분도(Father Benedict A. Zweber, 1932∼2001) 신부였다. 당시 덕적도 성당에 와 있던 신부는 섬에 양로원을 짓고 병원선인 ‘바다의 별’로 이들을 극진히 모셔왔다. 이방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신부의 선택이었다.

 
▶ 덕적도 서포리에 있는 공동농장에서 야채를 재배하던 중국인 이주민
 
덕적도에 정착하기 위해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공동농장을 운영했다. 이들은 행색부터 남달랐다. 쑨원(孫文)복장이라고 일컫는 중산복(中山服) 차림에 란한시에(란漢鞋)라는 중국풍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이 강했다. 검소하고 부지런했던 중국인들은 생계를 위해 서포리해수욕장에서 공병을 줍거나, 토마토, 오이, 양배추 등을 재배해서 해수욕장 인근 상가에 내다 팔았다. 자급자족이 원칙이었다. 이는 최분도 신부의 내훈이기도 했는데,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노동관에서 비롯됐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 이주민들은 제야에서 대보름달인 원소절(原宵節)에 끝나는 춘절 동안에는 깨끗한 설빔으로 차려입고 만둣국을 해 먹었다. 차이나타운에서처럼 문짝과 기둥에 영춘길자(迎春吉字)를 써서 붙이고 색등에 폭죽이 울리는 축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고향 산둥을 그리며 춘절을 보냈다. 섬아이들은 중국인 이주민을 ‘중국인 할아버지’로 불렀다. 금의환향의 꿈은 깨졌지만 덕적도는 이들에게 고향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순비기나무와 사초로 뒤덮인 중국인 묘지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이역만리 이주민으로 떠돌다 촌로로 정착한 섬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덕적도는 중국 산둥과 마주한 터라 날이 샐 무렵 머리맡에는 잠을 깨우는 고향의 닭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는지 모르겠다. 노동이 끝난 밤이면 고향 산둥의 버드나무와 우물을 떠올리며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중국 이주민은 끝내 지척의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산둥인이지만 당시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대만인도 아닌 이들은 경계인이자 떠돌이 난민과도 같은 신세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무연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국인들은 신산한 삶을 뒤로하고 지수화풍으로 돌아가 바닷가 묘지의 주인이 되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묘지에는 푯말도 묘비도 봉분도 없다. 해변을 오가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위안이 될 뿐. 사구로 변한 무덤은 흔적조차 없다. 백사장보다 더 희디흰 백골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연장이 따로 없다.

삶과 죽음의 존재감 앞에서 침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연의 삶에 머리가 숙여질 뿐. 시간이 풍화되는 것은 새로운 삶의 탄생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낯선 풍경에 어떤 이는 이방인의 설움을 보고, 어떤 이는 무상을, 어떤 이는 다 같은 삶을 읽는다. 묵묵히 중국인 묘지를 뒤로 한 채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뒤따라온다. 이방인의 심경일까? 어디에서 오든 어디에 있든 사람의 길은 외롭고 낮고 쓸쓸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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