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의 미추홀 해상국가 - 옳은 건국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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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의 미추홀 해상국가 - 옳은 건국 방향이었다.
  • 편집부
  • 승인 2021.07.0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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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9) 미추홀 문학산, 역사와 설화의 융합 - 조지형 / 전남대 교수

 

- 문학산과 그 이칭들

‘문학산’이란 명칭은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문학산으로 불리기 전부터 문학산은 남산, 학산, 봉화둑산, 성산, 배꼽산으로 불리었다.

옛 문헌에 가장 많이 사용된 명칭은 남산(南山)이었다. 인천도호부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학산(鶴山) 또는 학익산(鶴翼山)으로도 불렸는데, 문학산과 이어진 연경산 일대 능산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서다. 연경산 앞 동네는 학익동이 되었다.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위치해있어 봉화둑산으로 전해졌고, 산정상부에 산성이 있어 산성(山城)으로도 불렸다. 또 산봉우리가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운 모습과 같아 배꼽산으로도 불렸다.

15세기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천부를 설명하며 ‘남산석성(南山石城)-재군남이리(在郡南二里...’란 문구가 나오는데, 이 남산이 인천도호부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진 문학산이다. 사면이 높고 험준하며 안에 작은 샘이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16세기 중종때 조선 8도의 종합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9권에 인천도호부가 시작하는데 ‘山川’편에 문학산이 아닌, 남산이 소래산, 주응산, 청랑산 등과 함께 등장한다.

문학산이란 명칭은 문헌에 18세기 중엽부터 등장한다. 규장각이 소장한 광여도(廣輿圖)란 옛지도에 문학산성이 등장하고 해동지도(海東地圖)에도 문학산성봉수대가 등장하는데, 문학산이란 명칭이 최초로 확인되는 문헌이다. 당시 어사, 객사가 있고 학산서원, 능허대가 나온다. 이 걸보면 문학산과 능허대가 과거 인천의 인문지리와 관련해서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일본 동양문고가 펴낸 강역전도(疆域全圖)에 문학산이 표기돼있으며 19세기 초 김정호의 청구도(靑丘圖)에도 문학산이 등장한다. 문학산 아래(남쪽에) 남촌면도 함께 나온다.

김정호의 청구도에 봉수대가 빨간색으로 표시돼  있다. 인천부 지도의 가장 중심부에는 문학산이 위치해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삶과 종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여도
광여도

 

- 문학산 설화; 백제 건국신화

인천의 옛이름은 미추홀, 매소홀이었다. 여기서 미(彌)나 매(買)는 물을 뜻하고, 홀(忽)은 고구려계 어휘로 ‘높은 산을 낀 고을’이란 뜻이다. 미추홀은 물과 산이 어울어진 곳이란 의미다.

동국여지승람(성종12, 1482년 완성)에 미추홀이 다시 나타난다. 지명 뿐 아니라 고적(古跡)편에 미추홀국 건국신화도 설명돼있다. 삼국사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와 함께 남행하였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북한산에 이르러 부악산에 올라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신하들이 간하기를, ‘...... 천험지리(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익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니,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거처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는데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 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돌아왔다. 올 때에 백성이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百濟)라 고쳤다.‘

 

백제의 건국신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같이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밀려온 형제이지만 비류와 온조는 경쟁 관계였다.

온조는 하남의 천험지리에서 성읍국가를 이루었다. 농토를 확보하고 방어위주의 국가 전략을 폈다. 반면 비류는 미추홀의 토습수함(土濕水鹹,땅이 습하고 물이 찝질함)에서 해양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대외무역과 상업력을 토대로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국가 전략을 의미했다.

비류가 추구했던 국가모델은 훼손되지 않고 함께 가져갔다. 백제는 성읍국가와 해양국가의 특징 모두를 갖고 있다. 백제가 번성하던 시기 국가 모델은 해양국가였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룬 13대 근초고왕은 해양왕으로 서해를 제패하고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몽고 울란바토르 동쪽 외곽에 8세기 돌궐을 통치한 명장 톤유국의 돌비석이 서있다. 비문에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성안에서는 외적의 침입 없이 안주할 수 있으나 반대로 외부로 진출하지 못한다. 큰 성을 짓던 나라는 빠르게 멸망했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나라, 이를 완성한 명나라가 그랬다. 명나라는 지금 중국 면적의 50%만 차지했을 뿐이다. 결국 유목민이던 청나라에 멸망했다. 고려의 전성기는 예성강 벽란도 국제무역항의 교역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쇠퇴했다.

온조가 지은 국가 모델은 안정적이지만, 외부교류가 어려우므로 좋지 않다. 오히려 비류는 해양국가의 모델을 취함으로서 진취적이며, 성공 가능성도 높았다.

 

백제 우물터
백제 우물터

- 문학산 설화; 우물터, 비류왕릉, 삼호현, 능허대, 안관당

문학산에는 백제 우물터가 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세속에 전해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오히려 남아 있으며, 성안에 비류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 문학산에 이상한 우물 전설이 있다. ‘문학산정에 수심이 너무도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큰 홍두깨를 이 우물에서 찌르면 그 끝이 저 멀리 팔미도 앞바다에서 떠올랐을 정도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우물의 깊이를 말한다기 보다, 문학산에 도읍한 비류의 세력이 팔미도 앞바다 일대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비류가 온조의 하남을 보고 샘이 나고 분통이 터져 미추홀로 돌아와 화병으로 죽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하여 비류왕릉을 에분(恚墳, 성질내다가 죽음)이라 불렀는데, 무덤의 소재는 알 수 없다. 지금 인천부 남쪽 10리 거리의 해평(海坪바다와 인접한 곳)에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세속에서 미추왕의 무덤이라 전한다. 이는 비류의 무덤이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썼다. 여기서 이십일도란 우리나라 역사상 도읍지가 됐던 21개 지역을 말한다. 비류 백제의 미추홀이 그 중 한 곳으로 한 국가의 수도였던 것이다.

‘미추홀’ 회고시는 다음과 같다.

 

대동강가에서 슬픈 노래로 형제간 이별하고

산에 오르고 물길따라 급히 남쪽으로 내려갔네.

삼한의 땅이 강굉의 이불처럼 적으니

문학산에 높이 에분성을 쌓지 말았으면!

 

능허대
능허대

백제에서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 임금의 명으로 중국으로 가게 된 사신은 가족들과 작별을 하고 홀로 길을 재촉하여 사모지고개에 이른다. 이때 뒤를 돌아 가족들을 향해 “잘 있으라”하고 크게 세 번 외치고 고개를 넘었다 하여 삼호현(三呼峴)이라 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과의 교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형성된 이야기로 능허대(한나루)와 연결된 이야기다.

능허대는 사신이 중국으로 가는 배의 선착장이 있던 자리로, 비류가 인천을 통해 중국과 적극적인 교류를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학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문학산의 지도를 보면, 삼호현 고개가 보이는데 문학산은 송도역 쪽으로 사람들이 주로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고, 삼호현에서 백제우물 지나 문학산을 기점으로 관악쪽에서 능허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사신의 핵심길은 '백제 사신길'이라 이름붙여 현재도 찾아볼 수 있다.

안관당(安官堂)은 문학산성 내에 있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사당이 있었는데 목조로 남녀 상을 만들어 의복을 입혀 놓았다. 옛적에 인천부사 김모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은 후 가끔 김모의 영적(靈蹟, 신령의 흔적)이 내리는 고로 동네사람들이 이 분을 안관당에 모셨다. 그런데 이곳에 병란과 같은 변고가 있을 적에는 김 장군이 목마를 타고 창검을 들고 산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또 이 사당이 보이는 산 아래를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굽이 붙어서 움직이지 안았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 김민선이라는 실존 인물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안관당 설화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민선이 인천지역의 수호신(산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또 김민선의 영험함에 대한 인식으로 안관당을 지날 때는 ‘하마’(下馬)를 통해 존경을 표시했다. 안관을 흉본 부인이나 임산부가 그 댓가로 화를 당하는 설화도 전해져 내려온다.(식칼래 이야기)

안관당 설화는 이후 더 전해져내려 오는 것이 없이 잊혀졌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문화, 교육, 행정의 중심지가 개항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애착을 가지고 사는 곳이 고향이다'라는 생각을 전하고 싶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가지고 장소에 대한 애정을 가진 곳이 고향이라 생각한다.

지역감정은 좋은 것이 아니나, 지역의식과 애착을 가지고 내가 이곳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각박한 삶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인천은 과거의 역사가 깊은 곳이므로 인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삼호현
삼호현
백제사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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