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위에 앙코르와트 백령도 '두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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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에 앙코르와트 백령도 '두무진'
  • 이창희
  • 승인 2013.06.04 20: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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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북단 섬, 북한과 가장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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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는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4km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섬의 위치는 동경 124도 53분,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한다. 북한의 장여군에서 약 10km, 장산곳에서 15km떨어져 있다. 섬의 최고봉은 해발 184m의 업죽산이며 동쪽에 145m의 남산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 162m의 망골산이 있다. 섬의 남부에는 동쪽에 해발 130m의 이랑구미산, 중앙에 해발 114m의 매막골산, 서쪽에 해발 176m의 삼각산이 있다.

섬의 모양은 동쪽을 바라보는 ㄷ자이다. 처음에는 황해도 옹진반도와 이어져 있었으나 후빙기에 해면이 상승하면서 평원에 돌출되어 있던 부분이 수면 위에 남아 형성되었다. 1월 평균기온 -4.5℃, 8월 평균기온 25℃, 연강우량은 755.8mm이다. 면적 45.83㎢, 인구는 약 4,300명(1999)이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으나 광복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곡도인데,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으는 모습처럼 생겼다 하여 백령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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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촌리 조개무지(말등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일찍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백령도를 곡도라고 하였으며 신라 진성여왕 때 당나라로 가던 사신이 풍랑을 만나 곡도에서 10여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후삼국시대에는 당나라로 통하는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지였기에 백령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때 명장이었던 유금필 장군이 무고를 당해 곡도로 유배를 당했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곡도를 백령으로 개명하고 진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051년 백령진에 화재가 발생하여 백령진장 최성도와 부장 최숭망을 처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백령도에 진을 설치하고 진장과 부장을 두어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령진을 설치하였고 1894년(고종 31년) 폐지되었다. 역사적으로 백령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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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으며 1999년 10월에는 2층 규모의 심청각 전시관이 준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심청이의 효심을 배워가기도 한다. 까나리액젓·참다래(키위)·흑염소엑기스·전복·해삼·멸치·약쑥·가리비·농어·우럭·놀래미 등의 특산물이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과 세계에서 두 곳뿐인 사곶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하다.

 
백령이라면 흰 새의 날개를 뜻한다. 예로부터 백령도는 철새의 보금자리로서 한때는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두루미가 깃들였다고 한다. 이 섬의 고구려 때 이름은 ‘곡도’로서, 곡은 고니나 따오기를 가리키는 한자말이다. 흔히 ‘곡곡’이라면 백조의 울음소리를 형용한 말이고, 곡립이라면 백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모습을, 곡망이라면 무언가 학수고대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말하자면 백조의 고향인 이 섬을 백령이라 이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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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가 온통 흰 새로 뒤덮였을 때의 이야기다. 백령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고을 원님의 고명딸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원님 집에서 이 선비를 완강히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원님은 요지부동, 선비를 사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둘 사이를 떼놓을 수 없음을 안 원님이 딸을 외딴 섬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얼마 동안 갈라놓으면 곧 잊혀지려니 했던 것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선비는 전보다 더 처녀를 갈구했다. 갈망도 지극하면 기적이 생기는 법인가, 하루는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와 날갯죽지에서 흰 종이를 떨구고 가는 꿈을 꾸게 된다. 흰 날개를 가진 백조가 암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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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백령의 섬, 잠에서 깨어난 선비는 이내 장산곶에서 배를 얻어 타고 백조의 섬으로 달려간다. 백조의 흰 날개로 뒤덮힌 백령도에는 과연 선비를 기다리는 처녀가 있었다. 두 사람의 포옹은 떨어질 줄 몰랐으니, 백로의 보금자리가 이들 연인의 안식처로 변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죽음으로 끝나는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달리 우리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백령도에서 해후한 이들은 평생 이 섬에서 흰 새들과 함께, 그야말로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다.

 
백령도에는 전설이 있다.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는데, 고을 원님의 딸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안 원님이 딸을 외딴 섬으로 쫓아 버렸다. 처녀를 그리워하는 선비의 정성에 감동했음인지 어느 날 꿈속에 백조가 날아와 흰 종이를 떨구고 간다. 잠에서 깬 선비는 그 길로 백령도로 달려가 처녀를 만났고 그곳에서 백년해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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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최동단 독도보다 해가 반시간이나 늦게 뜨고 인천보다 평양이 더 가까운 백령도, 이 백조의 보금자리를 두고 앞서 ‘곡망의 섬’이라고 했다. 선비와 떨어져 이곳까지 쫓겨온 처녀는 한때나마 연인을 곡망했고, 이 섬 앞바다 임(인)당수에 빠져 죽은 심청은 봉사 아버지의 눈뜨기를 곡망했다. 백령도의 곡망은 허구의 전설이나 소설상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황해도 주민들이 이 섬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들은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한 장산곶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 지금도 곡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심청각에서 보는 장산곶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북녘 땅 장산곶이다. 그 왼편으로 유독 검푸르게 보이는 바다가 임당수라고 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나의 목숨은 추호도 아깝지 않으나 앞 못 보는 우리 부친 천지에 사무친 원한을 살아생전 풀려고자 이 몸을 바치오니 하느님은 굽어 살피시사 우리 부친 어두운 눈을 불원간 밝게 하사 광명천지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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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버지의 눈뜨기를 바라는 심청의 곡망이다. 백령도와 그 앞바다는 우리의 고전 〈심청전〉의 실제 무대로 알려져 있다. 이 섬은 신라시대 이후 중국으로 내왕하는 선박들의 중간 기착지였으며, 또한 항해의 안전을 위해 용왕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버지의 개안을 위해 물로 뛰어든 심청이 연꽃을 타고 인간세계로 환생했다는 연봉바위는 이 섬의 남쪽, 곧 백령도와 대청도의 중간쯤에 있다. 연꽃이 바다 위에 떠서 이곳까지 밀려왔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실제 임당수 일대의 조류와 일치한다니 〈심청전〉은 단순한 허구로만 볼 일이 아니다.

연꽃은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꽃이다. 물로 뛰어든 심청이가 연잎에 싸여 물 위로 떠올랐다는 건 환생을 뜻함인가? 소설에서의 심청은 용궁의 왕비가 되었다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효심의 표상으로 새겨져 있다. 연꽃 전설의 발상지로 알려진 연화리에는 아직도 연꽃이 핀다고 한다. 이곳 연화리에 피는 연꽃은 어느 연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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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바위는 중화동 해안에서 뱃길로 반시간여의 거리, 두 개의 바위섬을 중심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 멀리서 보면 마치 떨어져 나뒹구는 연꽃처럼 보인다. 가까이서 본 연봉바위는 심청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억겁에 걸쳐 파도에 부서지고 바닷물에 씻긴 세월의 흔적 바로 그것이었다. 바위섬 뒤편에 사람의 인기척이 있어 환생한 심청이 아닌가 하여 긴장도 했으나 그것은 세월을 아랑곳하지 않는 강태공의 모습이었다. 뜻하지 않은 낚시꾼의 출현으로 신비감은 좀 가셨으나 대신 사람을 겁내지 않고 줄곧 우리 배를 따라오는 물개 가족의 환대가 일행을 즐겁게 했다.


백령도 연봉(꽃)바위 바다로 뛰어든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환생한 곳으로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 있다. 멀리서 보면 연꽃잎이 몇 잎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북위 37도,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이 더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으로 백령도는 이제까지 그 아름다운 날개 깃을 접고서 살아왔다. 섬 주민보다 주둔 군인이 더 많은 것도 그런 이유겠지만, 어떻든 이곳은 잊혀진 섬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남북간 해빙 무드가 감도는 오늘에 와서 백령도도 이제 서서히 날개 깃을 펼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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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차례 쾌속 관광선이 닿는 용기포구에는 육지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포구에서 마주 보이는 사곳해안의 규조토 사장에는 오가는 차량으로 분주하다. 규조 껍질로 형성된 사곳해안은 물이 빠지면 콘크리트 바닥처럼 굳어지기 때문에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 항공기의 이·착륙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어떻든 백령도는 이제 더 이상 천혜의 절경을 감출 수 없다. 두무진일대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병풍바위와 콩돌해안의 그 멋진 해수욕장도 어쩔 수 없이 뭍사람들에게 속살을 드러내야만 한다.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백조는 이제 그들의 보금자리를 내놓아야만 한다. 두무진의 의미는 바위 형상이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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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2013-06-08 09:43:28
아주 작은 내용이라도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백령도의 위치를 아무리 두산백과에서 복사해 왔다고 하나 '장산곳'이 아니라 '장산곶'이 맞습니다.
인터넷에 잘못 떠돈다고 그대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그 증거로 복사본이 아닌 기사에서는 장산곶이라고 바르게 표기했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어디선가 복사해 오는 것은 언론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인천in을 아끼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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