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 수도권 서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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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수도권 서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5.02.09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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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시민기자의 한국기행] 마니산
마니산 인기 명산 순위 46위


마니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이다. 마니산의 높이는 472.1m. 강화도 서남단에 있으며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마니산은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산의 정상에서부터 남쪽 한라산까지와 북쪽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우리나라 중부 지방을 북동에서 남서로 달리는 마식령산맥은 서남단인 강화도에 이르러 북쪽에서부터 별립산, 고려산(高麗山)·혈구산(穴口山)·진강산(鎭江山) 등의 산이 차례로 있고, 그 남쪽 끝에 마니산이 있다.

자연환경이들 산지들은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형성된 낮은 구릉성산지이고 침식에 남아난 잔구들이다.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인데,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에 둑을 쌓은 뒤로 육지가 되었다. 북쪽 양도면의 진강산과 동쪽 길상면의 길상산(吉祥山)과 마니산 사이는 매우 낮다.

이는 과거 지질시대에 지각이나 해면의 승강운동을 조금만 받아도 섬이 되었거나 육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니산 일대는 이른바 마니산 화강암(Manisan granite)이라 칭하는 선캄브리아기의 오래된 암석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또 변성암인 결정편암계의 편암이 마니산 동쪽 지대에서 시작하여 정족산의 전등사 일대로 뻗어 있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북쪽 기슭에서 마니산을 오르다보면 굳은 화강암 암반이 넓게 깔려 있는 곳이 있다. 또한 길 양측의 노두(露頭)에서는 풍화되어 부스러진 사질토와 양파 껍질같이 분해되는 박리현상(剝離現象)을 볼 수 있다. 또 중복에는 화강암의 거대한 판상절리(板狀節理)가 나타나고 있다. 산정 부근은 경사가 심하고 화강암의 기암 절벽이 솟아 있다.

산정에서는 한눈에 강화도와 서해 및 작은 섬, 넓은 김포 벌판, 해안의 간척지, 염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마니산의 명칭 유래는 산은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고어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 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게다가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이 있으니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되어 있으며 그 뒤에 마니산으로 바뀌었다.

문화유적마니산 산정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이 있다. 높이 5m로 자연석을 쌓은 것인데, 기단(基壇)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 있다. 이 단의 축조 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4000년을 넘는 유물일 것이다.

또 그 위치나 구조로 보아 천문·관상대와 비슷하므로 후세에 와서 이를 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시대에도 왕과 제관이 찾아가 하늘에 제를 올렸고 조선 시대에도 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단역은 수천 년 동안 계속 수축되어온 흔적이 있다. 정확한 수축 기록은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이다. 현재 이곳은 성역(聖域)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또한 1953년 이후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점화하는 곳이다. 마니산 동봉(東峰) 중복에 자리잡고 있는 정수사(淨水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개산한 고찰로서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법당이 있어 유명하다. 마니산 산록에는 조선 시대부터 형성된 여러 촌락이 있다. 북록의 내리·문산리·상방리는 마니산을 오르는 입구에 있고, 동록에는 사기리, 남록에는 흥왕리, 서북에는 장화리 등이 있다.

사기리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고려 분청사기의 가마터가 발견된 곳으로, 고려가 강화에 천도했던 당시부터 고려의 찬란한 문화 예술의 고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남쪽의 흥왕리에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과 같은 왕도를 만들 때 지어진 이궁이 있던 흥왕리궁터가 있다. 또 강화도는 조선 시대에 제주도 다음 가는 우리 나라 종마의 양육 장소로 지목되어 왔다.

마니산 서남록의 북일장(北一場)은 그 중 한 종마목장이었다. 강화도는 고려의 개경, 조선의 한양에 가까웠고 섬이었던 관계로 여러 번 천도, 몽진(蒙塵)의 땅이 되었다. 그런 관계로 섬 자체의 방어보다 왕조의 방어상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섬 주위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였는데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진보가 12개, 돈대가 53개소나 되었다.

마니산은 삼면이 바다에 면해 있어 산록해안에는 이들 진보나 돈대의 유적이 많다. 서북단의 장곶보(長串堡)는 숙종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검암돈대·미루돈대·동막돈대·분오리돈대·칠오지돈대 등의 유적들이 있다. 방축을 쌓아 바닷물을 막았던 일은 일찍이 조선 시대부터 있었다.



마니산 서북록의 내리(內里) 중앙의 가곶보와 1664년(헌종 5)에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막았다는 가릉포 둑이 그 예이다. 현대에 들어와 마니산 남쪽 해안은 근대 간척사업으로 경지를 넓혀 완전히 지도를 바꾸어놓은 대표적인 지역이 되었다.

강화도는 역사의 고도이며 개국의 성역으로 고려와 조선의 사적이 많고,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관광지로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의 확대와 1970년 개통된 강화교로 전국과 쉽게 연결되게 되었다. 더욱이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 지방도의 완성과 마니산 국민관광지의 조성은 마니산을 전국에서 으뜸가는 유서 깊은 성역 및 관광지로 발전시켰다. 읍에서 마니산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사적 외에 순농촌적 경관을 볼 수 있어 외인의 주목도 끌고 있다.

참성단은 사적 제136호. 1964년 지정.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세전되어 온다. 면적은 5,593m2이며, 상단 방형(方形) 1변의 길이는 1.98m, 하단원형의 지름은 4.5m. 자연의 산석(山石)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고, 돌과 돌 사이의 사춤에 아무 접착제도 바르지 않았다.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下圓壇)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방단(上方壇)의 이중으로 구성하고,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도(江都:江華)는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니(摩利)·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예로부터 일러 왔다.

또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桓雄)의 권속이므로 결국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방(方)과 원(圓)은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 사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참성단의 원과 방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에 두고 설치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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